(예전에 라디오에서 내 글과 사진을 토대로 다시 구성하여 방송해준 글)
사진이란, 어떤 특정한 시간을 정지시키고 드넓은 세상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오려냅니다.
그러나, 정지된 사진 한 장. 그러니까, 선택된 그 시간과 공간 속엔 수많은 풍경과 이야기는 물론
날씨나 냄새까지도 배어있습니다.
그 옛 사진 중에 한 장을 들추어볼까요.
꼬마 둘
얼마 전 개발 붐을 앓았었던 경기도 파주의 금촌.
33년 전 금촌읍 한가운데에는 버스정류장을 중심으로 불과 몇 미터의 사이를 두고
철물점과 양복점 그리고 짜장면집과 구멍가게 같은 것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당연히 버스 한번 지날 때마다 희뿌옇게 흙먼지 이는 그런 읍내였지요.
그 읍내 거리에 꼬마 둘이 섰습니다.
어머니가 아주 이쁘게 단장해서 내놓은 여섯 살 소녀와 다섯 살 사내아이입니다.
소녀는 제 볼보다 더 올라온 포동포동한 얼굴을 하고는 아주 야무지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실로 짠 조끼까지 갖춰 입은 사내아이는 폼을 재듯이 세발자전거에 올라있습니다.
이 거리 양복점 집 아이들입니다.
세발자전거에 올라있는 사내아이와 그 자전거를 잡아주는 여자아이는 한 살 터울의 남매입니다.
그 남매 뒤로는 함석 차양 밑으로 물건들을 내놓은 친할아버지의 철물점이 있고요,
그 옆에 차양과 담벼락만 조금 보이는 아버지의 양복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간판들은 페인트칠을 한 간판들이라서
큰 바람이 불거나 하면 간판이나 차양들이 떨어질 듯이 보였지만,
그 거리는 그래도 파주의 번화가였습니다.
양복점을 하시는 아버지는 늘 양복만 입는 멋쟁이셨습니다.
학교 운동회 날이면 교장선생님이 앉아계신 하얀 천막 밑에
양복을 입고 앉아계셨던걸 보면 동네 유지에 속하셨나 봅니다.
어머니는 유독 자식들의 옷차림에 신경을 쓰셨습니다.
이 날도 여자아이는 짧은 원피스에 모자를 썼고 사내아이는 남방에 조끼와 모자를 갖춰 입고는
금촌 읍내에서 유일한 세발자전거를 뽐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멋진 세발자전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양복점 건너편엔 버스가 섰고 그곳에선 맛있는 짜장면 냄새가 퐁퐁 풍겨 나왔습니다.
짜장면 배달을 하는 소년은 꽤 뚱뚱한 소년이었죠.
나이도 제법 있는 소년은 늘 양복점 아이의 자전거가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짜장면 배달을 하고 온 소년은 자전거에 올라 용을 쓰며 페달을 밟았고 ,
그 멋진 세발자전거는 의자 밑동이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세발자전거가 사라진 뒤에도 유일하게 까만색 전화기를 가지고 있던 양복점 집 아이들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옛날 극장 마당
아이들이 늘 모이는 곳은 가게에서 좀 떨어진 극장 마당이었습니다. 아이들만 모이는 게 아니고 저녁이면 엄마들이 번갈아 아이들을 찾으러 오던 곳이기도 했죠. 저녁밥이 다 식도록 땅따먹기에 술래잡기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놀던 곳.
그러다, 철물점에서 양복점이 분가하면서 남매는 금촌 읍내에서 떨어진 법원리로 이사했습니다.
초등학생이 된 남매는 토요일마다 할아버지가 계신 금촌으로 가기 위해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코가 찡하도록 생각나는 할아버지!
토요일을 할머니는 반공일이라고 했습니다.
반공일 날 꼬마들 손에는 엄마가 사 주신 <한산도> 담배 한 보루가 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한산도를 <아리랑>이나 <개나리>로 바꿔다 양을 늘려 피우셨습니다.
남매가 찾아가면 할머니는 어둡고 눅눅한 다락으로 올라가셨죠.
그 다락엔 고모들이 사다주신 과자와 사탕들이 보관되어 있던 비밀스러운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굵은소금만 넣고 찐 감자나 슈가를 넣고 찐 옥수수를 한솥씩 삶아내셨죠.
그러니, 이 남매는 엄마의 말씀을 거역 않고 즈 이들끼리 덜컹대는 버스를 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 댁엔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약주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시는 할아버지의 뻣뻣하고 삐쭉이는 수염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하필 그 수염을 남매의 볼에 비비는 걸 좋아하셨는지....
도망칠 수도 없고 참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할아버지 주머니 속에선 많은 동전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동전을 어디다 다 까먹었는지 사진 속에서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서도 잘 생각나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