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상냥한 주인이 빈세트 반 고흐의 명화(아몬드 나무)가 새겨진 찻잔에 커피를 가져다주셨다. 내 양산에도 같은 그림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여주인은 그림을 남편은 악기를 연주하는 예술가다. 작업실까지 구경시켜 주며 제주에서 공방을 운영하면 좋겠다며 호의를 보이시니 낯선 제주에 조금 다가선 듯했다.
정류장 가는 길엔 접시꽃이 줄 선 근사한 돌담을 지났는데, '접시꽃 당신'의 글귀를 만날 수 있었다. 접시꽃이 그리 다정하고 키가 큰 줄 몰랐다.
어느 날. 바람 쐴 겸 제주에 다녀올까? 간 김에 허름한 집도 알아보고."라고 말했고
"그럴까?"라고 답했다. 하여 그 바람에 제주로 날아갔다. 설마 집을 뚝딱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집을 찾아가느라 탔던 버스가 고장 나서 딱 서 버렸다. 지금 여기가 바로 그 건너편에 있었다.
심사숙고가 필요했고 마침 출출해서 근처 국숫집에서 멸치국수를 큰 사발로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고 나서 덜컥 계약을 해 버렸다.
로망과 현실
창가에 앉아 제주의 심상찮은 바람과 단단하고 소복한 브로콜리와 콜라비가 빼곡한 밭의 푸릇푸릇한 풍경을 드로잉 한다. 그 너머 차귀도 유람선이 여행객들을 실어 나르는 지구내 방파제까지는 당산봉을 끼고 유채밭 청보리밭을 지나 걸어갈만하며 차귀도의 극적인 일몰을 볼 수 있는 수월봉까지 올라갈 수 있는 올레길이 여럿 있다. 흔하게 돌고래가 출몰한다는 신도리를 비롯한 해안은 검은 현무암으로 형성된 여가 널렸고 무수한 고양이들이 낚시꾼들의 고기를 낚아챈다. 신창리 풍력 발전기의 위용이 제주 하늘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며 크기, 모양, 색이 다 다른 등대마다의 쓰임마저 궁금해진다. 숭숭 구멍 뚫린 돌담과 길게 늘어선 밭담이 바람을 막아주어 무, 양배추, 콜라비, 브로콜리 등을 키우는 게 신기하고 나 같은 사람도 느긋하게 오를 수 있는 만만한 오름이 많다니 다행이다. 저녁녘 오묘한 빛깔의 석양을 보며 산책하는 중이라며 사진 찍어서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마는 곳. 날씨 좋은 날 유채꽃 만연한 들을 지나 소풍 같은 낚시를 갈 수 있고 바람 불고 빗방울이 떨어져도 유명제과 찐빵 한 봉지 챙겨서 그림 한 장이라도 그리고 싶은 로망. 이런 것들이 제주로 오자고 나를 부추겼을 것이다. 마치 최종 목적지가 이곳인 것처럼 그래서, 새로 시작하고 시도할 것들의 목록과 계획을 짜고 실행할 목적이 생긴다는 설렘 때문인가 싶다. 물론 먹고 살 방법이 가장 큰 문제이며 현실인데, 무모하지만 방법을 찾아갈 것이므로 괜찮다. 2023.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