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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썽으니 Sung Oct 26. 2019

아이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미얀마

조선 땅에 오셨던 선교사님들을 떠올리며

미얀마하면 떠오르는 것은? 


미얀마로 출발했을 때 사실 미얀마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없었다. 어디선가 한 번 쯤 들어본 듯한 아웅산 수지 여사 그리고 초등학생 때 읽었던 버마 선교사 아드니람 저드슨에 관한 신앙 만화 정도 였다. 또한 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미얀마의 모습은 아직 시골 느낌이 풍기는 국가였는데 도착해보니 띠용(?) 너무 도시였던 것이다. 솔직히 도착해서 굉장히 놀랐다. 생각보다 정말 깔끔하고 도로가 넓게 뚫려 있으며 차들도 많고 주위에 현대식의 건물들도 많았다. "아, 미얀마가 이런 곳이었나? 내 상상과는 너무 다른데?"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

그러나 다음 날 미얀마에 계신 선교사님을 만난 후 내 궁금증은 풀렸다. 내가 봤던 양곤의 모습은 아주 도시의 중심가였고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삶의 형편을 본 것이었다. 같은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이라 할 지라도 중심가에서 30분만 벗어나도 극빈한 삶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것이 진짜 미얀마였다.


미얀마 일반 가정집의 모습
가정집 내부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미얀마 전통가옥, 미얀마 시골집이라고 해서 이런 모양의 대나무로 엮어서 만들어진 집이 나오지만, 그들에게 이 집의 형태는 전통가옥도 아니고 시골집도 아니고 그냥 삶의 현장이다. 양곤 중심가를 제외하고 어림잡아 90% 이상의 서민은 대나무 집에서, 아니 이 집도 있으면 다행인 곳이 미얀마이다. 한 채를 짓는데 한화 60만원 정도 하는데 지붕은 양철로 세워서 우기를 대비하고 다른 부분은 대나무로 짓는다고 한다. 

일상 생활 모습

미얀마에는 부모가 있지만 먹고 살 형편이 어려워 버려지는 고아가 굉장히 많다. 이 경우 부모는 대부분 아이를 절에 보낸다. 미얀마의 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불교의 특별한 지위에 대한 언급도 있는 만큼, 정치와 불교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국가적으로 불교에 대한 금전적 지원이 각별하다. 때문에 부모들이 절에 아이를 보낼 경우, 불교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끼니를 해결해주고 글도 가리켜 준다. 이로 인해 90% 이상의 국민이 불교신자인 대표적인 불교 국가이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집 안에 액자가 걸려있다. 바로 아웅산 수지 여사의 사진이다. 집 뿐 만이 아니다. 거리의 가게 대부분에 아웅산 수지 여사와 그녀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사진이 걸려져 있었다. 마치 국민적 영웅처럼. 지금 국제 사회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민주화의 수치로 여겨지지만 아직 미얀마 사람들에는 국민적 영웅인 것 같다.  


아웅산 수지 여사


오며 가며 신문 읽다가 혹은 교과서에서라도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었으나, 내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 이 세상에 타인에 대해 크게 관심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히스토리를 가진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미얀마에 여행 오면서 하나같이 모든 가게에 그녀 사진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찾아보게 되었다. 솔직히 우리 나라 대통령 사진을 떡하니 대문 앞에 붙여놓은 가게... 쉽게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니까 강요에 의해 김정일 김정은 사진을 붙여놓는다고 해도, 이미 민주화된 국가인 미얀마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본인 가게와 집에 붙인 사진이라면 '저 여인은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국민적 영웅이 되었는가?' 궁금해져서 검색했다.


우) 아웅산 수지 여사

아웅산 수지 여사는 식민지 시대 때 영국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어낸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아웅산 장군은 우리나라의 김구선생님처럼 국민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였으나 독립 이후 민주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암살 당했다. 이 일로 인해 아웅산 수지는 15살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중에 영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영국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이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던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이름을 고치고 새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폐쇄적인 외교 정책, 소수민족 억압, 타 종교 탄압, 기이한 화폐 정책 실행으로 인해 본디 산림자원과 지하자원이 풍부하던 미얀마 땅에 깊은 빈곤이 자리잡았다. 미얀마 내의 대부분의 사업이 군부와 그 자녀들이 모두 독점하고 있는 형태로 사유재산화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아웅산 수지는 어머니의 간병 차 잠시 미얀마에 오게 되는데 이때 미얀마 민주화 시위 (8888시위)를 맞닥들이게 되었다. 1988년 8월 8일 8시에 일어난 이 시위에 아웅산 수지는 감명을 받고 미얀마의 민주화에 몸담아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이후 국민적 영웅이었던 아웅산 장군의 딸이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군부 독재 정권은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택연금, 정치인 탄압 등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의 민주화에 앞장섰다고 하여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계속된 군부 독재 정권의 탄압 가운데 2016년 드디어 독재 정권에서 선거결과에 승복하기로 했고 아웅산 수지는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미얀마 헌법 상 직계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는 수지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측근인 틴쩌를 대통령에 세우고 실권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어마 어마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에 대해 이제와서 국제 사회가 등을 돌려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미얀마에서 '인종 청소' 논란이 일어났다. 이슬람교를 가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이 미얀마의 불교도들에 의해 대량 학살되고 있는데 실질적인 국가원수인 아웅산 수지가 눈감고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된 정치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민주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수지가 인종 청소 작전 으로 불리는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군의 탄압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불교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어렵게 잡은 정권을 놓칠까봐 현 사태를 묵인하는 것 처럼 보인다며 국제 사회의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었다. 아웅산 수지에게 수여되었던 노벨평화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권상들이 박탈되었으며, UN은 로힝야를 위한 보호조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아웅산 수지는 인도적 해결을 약속했으나 이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언행이 일치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미얀마는 버마족(70%)과 130여 개의 소수민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얀마의 남자들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


무거운 정치 이슈에서 벗어나 미얀마의 문화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미얀마에 가면 남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다닌다. 이 치마의 이름은 '론지'인데 미얀마 전통의상이다. 원래는 안에 팬티도 안입고 다닌다고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팬티와 짧은 반바지 정도는 안에 입고 론지를 걸친다고 한다. 전통의상이라고는 하나 현지인 10명 중 5-6명은 론지를 입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일상복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옷이라기 보다는 원통형의 천이고 허리춤을 둥그렇게 말아서 본인 사이즈에 맞게 고정시키는 형태로 입는다. 쉐다곤 파고다 같은 미얀마 불교 사원에서는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나 스커트를 입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입구에서 론지를 빌려주기도 한다.

론지를 입고 일하고 있는 미얀마 남성


미얀마의 선크림, 타나카

내 29년 인생에 처음 더위를 먹은 곳이 양곤이었다. 처음에는 몸살기인 줄 알았는데 온몸이 너무 아파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고, 결국 샤워하다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며 10분 동안 화장실에 쓰러져 누워있었다. 더위를 먹으면 진짜 누가 스치기만해도 정말 온 몸이 소스라치게 아프고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온다는 것을 미얀마에서 처음 깨달았다. 그만큼 양곤의 햇빛은 굉장히 쎘고 더웠다. 이러한 미얀마의 날씨 속에서 미얀마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얼굴에 바르고 다니는 하얀 진흙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타나카이다. 타나카 나무를 돌에 갈아 물에 희석시켜 바르는 미얀마의 천연화장품 겸 자외선 차단제이다. 다양한 모양으로 얼굴에 바르기도 하는데, 특히 여성들은 거의 100%의 확률로 모두 타나카를 바르고 있었다.  



'나도 한 번 발라보고 싶은데...' 어떤 것이든 그 나라에 가면 특이한 것을 해보고 싶어하는 나의 성격 상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에 타나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뭐라고 설명 해야할까? 어디를 가야 팔까?' 궁금하지만 말도 안통하고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도중 여행 정보 센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다행히 영어로 엄청 잘 설명을 해주시는 직원 분을 만났다. 그 분도 얼굴에 바르고 계시길래, 얼굴에 바른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타나카'라고 말해주시면서 갑자기 무언가를 들고 오셨다. 고체의 무언가를 물에 막 푸시더니 얼굴에 발라주셨다. 얼굴이 갑자기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너무 농도를 옅게 풀어주셔서... 이걸로 미얀마에서 타나카를 해봤다고 하면 유튭각이 안나오는데... 라는 유튜버 정신에 의거해서 어디 파냐고 물었더니 슈퍼에 다 판다는 것이었다. 

핑크색 통의 로즈향 타나카를 사서 물에 희석시켜 발랐다

슈퍼를 가서 직원에게 "타나카 타나카"하면서 타나카가 발라져있는 내 얼굴을 가리켰더니 타나카 통 앞으로 인도해주셨다. 양이 많나 싶었지만 미얀마에서 매일 바르고 다니자라는 모토로 통 크게 구매했다. 혼자 바르기 좀 어려워서 참신하게 꾸며달라고 고백친구들에게 맡겨 놓았으나 타나카로 내 얼굴에 낙서를 하였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던게지... 그래서 나도 동일하게 낙서를 해주었다. 미얀마에서는 타나카로 얼굴에 낙서하는 재미가 추억으로 남았다.


씹는 담배인가? 마약인가? 꽁야(Kunya)

꽁야를 만들고 있는 좌판이 거리에 정말 많다

미얀마 길거리에는 빨간색 핏자국이 많이 보인다. 사실 핏자국은 아니고 미얀마인의 씹는 담배라고 불리우는 꽁야를 하고 나서 거리에 뱉기 때문에 생기는 자국들이다. 잎 뒷면에 석회를 바르고 빨간 꽁 열매를 비롯해 여러가지 씨앗과 첨가물을 집어넣고 쌈을 싸서 판매하는데 일종의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열매도 넣는다고 한다. 그래서 담배처럼 중독이 되고 남성, 여성할 것없이 꽁야를 많이 씹는데 가정집을 방문하면 손님 접대용으로 내놓을 정도로 일반적인 문화이다. 하지만 꽁야를 하게되면 석회가 체내에 쌓이게 되고 치아 건강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게 된다. 꽁야 쌈을 넣고 씹은 후 고이는 물을 삼키지 않고 모았다가 한 번에 뱉는 방식으로 꽁야를 씹는데, 꽁 열매가 붉은색 물을 내기 때문에 처음 보면 피를 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선교사님을 만났을 때 미얀마인들을 위해 봉사로 운영하시는 병원에 갔었는데, 치아가 꽁야로 인해 검게 썩어가고 붉게 착색되어 치아가 몹시 손상된 상태에 있어도 치료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를 갖지 못해서 100% 무료로 치과진료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안온다고 하셨다. 아파도 본인이 아픈 건지 모르고, 치료 받을 수 있는데도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슬프게 다가왔다. 당장 벌어 먹고 사는 삶도 가능할 지 미지수이기 때문에 그 외의 것에 대한 생각의 확장을 펼치지 못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병원 앞에 나갔는데 아이들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니까 신기해보였는지 해맑게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 미얀마 전반적인 경제 상황을 선교사님께 듣고 나니 아이들의 얼굴만 봐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초콜렛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아니 밥 한 끼 걱정없이 마음껏 해결할 수 있을까? 공부하고 싶다는 꿈 자체를 갖는 것이 이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아이들과 인사를 한 후 뒤돌아서 한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고백아시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솔직히 나는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명예를 갖고 성공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사실 MBA를 도전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찬이니까 겉으로는, 아니 마음 안으로도 '내가 성공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거야' 라는 다짐을 했지만 그건 내 의식적인 노력일 뿐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솔직한 삶의 동기는 '나의 성공'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다녀온 여행지 중에서는 미국, 호주, 일본처럼 선진국들도 있었지만 빈곤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물론 사람들의 겪는 내적 고통의 크기는 측정할 수 없지만 내가 평소에 느꼈던 염려에 의한 고통들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나는 꿈을 꿀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계획할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일상이 되어버려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던 삶의 부분들에 대한 감사함과 함께, 내게 주어진 축복들을 나누는 것이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 같았을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 처럼 식민지 시대 때 일본으로 부터 민족 말살 정책에 희생양이 될 때도 있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장사리'라는 6.25전쟁에 관한 영화를 보았는데, 비록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은 분명 그 참담한 전쟁의 시대를 겪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참혹함과 생사를 오가는 공포 앞에서 나는 겸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여러 국가들은 본인 국가의 이익에 따른 정치적인 입장을 취했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은 이화, 연세 학당들을 통해 평민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었고, 병원이 없어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본국에서 기부금을 모아 병원을 짓고 무료로 치료했다는 사실은 연세 세브란스 병원 및 다수의 기독교 기반 병원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6.25 전쟁 때 UN 연합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까?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미얀마 유치원
한국어 학당 교실
 후원금을 통해 미얀마 학생들에게 한국으로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나라도 불쌍한 사람이 많은데, 왜 해외가서 돕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 어느 땅에 있는 누군가는 우리를 도왔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땅에도 분명 가난한 사람이 존재했고, 타국의 군인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을 도왔다. 나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던 극 빈민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지금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많은 사람의 섬김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9개월 간의 긴 여정을 통해 가장 크게 얻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나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나의 삶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세상을 둘러봐야겠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겼다. 삶의 이유가 새로이 생겼다. 남들과 비교하며 얻는 '나의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가 더해질 수록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감사한 환경에 대한 책임이라고 느낀다. 청년 세브란스가 1904년 그 시절에 병원 설립 자금 15,000달러를 기부했던 것처럼, 필요한 곳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내 미얀마 이름은, 표야디

양곤의 어느 호수가를 지나가다가 멋진 궁전을 보고 멈춰섰다. 우리의 발걸음이 재빠르게 향한 그 곳은 선상 레스토랑이였다. 디너 가격이 무려 한화 35,000원. 미얀마 물가를 생각해볼때 거의 재벌을 위한 레스토랑이 아니었을까? 이 곳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미얀마 문화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문 앞에서 타나카를 발라주는데, 우리가 산 것 처럼 가공된 타나카가 아니라 타나카 나무를 직접 갈아 물에 희석시켜서 발라주었기에 특별했다. 

Kandawgyi Lake
Karaweik Palace 선상 레스토랑

그러나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미얀마 이름을 만들어 줄 때였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생년월일을 이야기해주면 그에 맞게 카드를 골라 작명해주었는데, 소영이는 왕국의 꽃(Royal Flower)이라는 의미의 '틴다씬', 보준이는 용감한 왕(Brave King)이라는 의미의 '투야밍'이었다. 내 이름은 우아한, 단아한, 품격있는(Graceful)이라는 뜻의 '표야디'였는데... (말잇못) 그래 오늘부터 우아하면 되지! 우아하자!

치우의 이름은 '초링아'였는데, 넷 중에서 치우의 미얀마 이름이 가장 본인과 매칭이 잘 되었다. 아주 장난을 많이 치는 <초딩>같은 치우에게 꼭 맞는 미얀마 이름인 것 같다.   


이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는 2시간 동안 내내 미얀마 전통 공연을 한다. 사실 식사 자체는 서양식 뷔페로 차려져 있었지만 맛은 없었다. 그러나 35,000원을 공연 관람비로 생각하면 저렴하다고 할 만큼 고퀄리티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는 도중 갑자기 천장에서 '후두두두두두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공연 소리에 묻히긴 했지만 한 번에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는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놀라서 밖을 나가보니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말잇못)"


그러나 이 상황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으니 염려하기 보다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와 공연을 즐겼다. 그리고 공연이 다 끝난 후, 우산이 없는 우리는 비를 쫄딱 맞고 생쥐처럼 숙소로 돌아갔다.


쌈닭 커밍아웃


나는 관계에 있어서 타인과 큰 소리를 내는 것을 굉장히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치우랑 보준이가 (놀려서) 화나게 할 때도 화내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기도했다. 내 심정을 주님께 토로하는 편이지 사람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9개월의 여행기간동안 양곤에서 만큼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물론 고백친구들에게 화낸 것은 아니고, 현지인과 영어로... 맞짱떴다. 

양곤 숙소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짐만 방에 들여다놓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저녁 10시쯤 들어와서 씻으려고 했는데... 샤워하러 먼저 들어간 소영이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언니...!"


캄보디아에서 미얀마로 이동한 날이기 때문에 굉장히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특히 소영이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돗물이 정말 까맣디 까만 녹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소영이가 녹물에 몸을 담구어 샤워하기 전이었고, 옷을 빨래하는 도중에 녹물인 것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나를 부른 것이었다. 소영이는 처음에 빨래를 하는데 끊임없이 검정색 물이 나오길래 '옷이 이렇게나 더러웠나?'라고 하며 더 열심히 빨래를 했다고 한다. 계속 빨고 있는데도 검은 물이 나오자 뭔가 이상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물이 검은색이었다. 아니 이럴수가...! 


치우, 보준이의 방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혹시 너희 방도 녹물이 나오니?"라며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아직 샤워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잠깐만"하고 화장실에 들어간 치우는 비명을 질렀다. "끄악!!!!!!!!" 

  

아니 샤워기에서도 나오는 녹물은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두 방 모두 녹물이 나오는데.. 벌써 밤 11시가 넘어 12시를 향하고 있던 터라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 지 난감했다. 우선 프론트에 내려가서 이 상황을 설명했다. 말이 잘 안 통할 것 같아 녹물 비디오를 찍어서 내려갔다. 프론트 직원도 난색을 표하면서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우리는 그 설명에 더 경악했다. "오늘 물탱크의 물이 다 소진되면서, 마지막에 남은 물이라 녹물이 나온 것 같은데 내일 물탱크에 물을 채우면 녹물이 안 나올 거야." 


"뭐라고......?" 


그 말인 즉슨 우리가 지금 어느 방에 가도 같은 물탱크를 쓰는 이상 녹물이 나올 것이며, 내일 물을 채운다고 해도 물탱크를 청소하고 붓는 것이 아니라 녹물을 깨끗한 물로 희석시켜서 검은색을 보이지 않게끔 한 후 고객이 쓰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프론트에 내려갔던 우리는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녹물에 빨래하던 소영이 손은 생수로 긴급히 씻어서 급한 불은 껐지만, 당장 양치도 못하고 메이크업도 못지운다는 소리이기 때문에 당장 이동할 만 한 새로운 호텔을 빠르게 알아보기로 했다. 아니 제일 궁금한 건 다른 손님들은 왜 호텔에 그냥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 정도되면 손님들 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싸그리 난리쳐야 맞는게 아닌가? 


그러나 환불 요청하러 내려 간 프론트에서는 오늘은 이미 체크인했기 때문에 오늘 것은 안되고 내일 것부터 환불해 줄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말이 되? 말이 되냐고!!! 녹물이 나오는 호텔에 단 1원도 지불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호텔이 말도 안되는 녹물 때문에 짐을 싸서 밤 12시가 넘어서 이동해야하는 판인데 택시비는 안 내줄 망정 환불이 안된다고? 우리가 환불해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하니까 매니저에게 다시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동안 로비에서 직원의 통화를 지켜봤고 그녀는 매니저가 환불해줄 수 없다는 방침이라고 전했다. 


내 전공은 한국어로는 외식 경영이지만 영문으로는 Hospitality Management, 즉 호텔을 비롯한 환대산업 전반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다. 이런 문제에서는 권한이 없는 직원을 붙잡고 이야기해봐야 답도 안나온다. 나는 프론트 직원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수화기 이리내. 매니저에게 다시 전화 걸어. (Give me your phone and call to the manager)"  

직원은 당황하더니 매니저에게 전화걸어서 손님이 통화하고 싶다고 매니저에게 말한 후 나를 바꿔줬다. 내가 들은 그의 첫마디는 "오늘 묵으신 환불은 좀 어려우시고..." 그 말에 나는 갑자기 영어 방언이 터졌다.

"너 어딨어? 방에 있다며, 당장 내려와. 이런 문제에 손님한테 매니저가 직접 사과도 없이 전화로 이래라 저래라야? 환불이든 뭐든 내려와서 얼굴 보면서 얘기해. 알겠어? 나 로비에 있으니까 내려오라고"

솔직히 스스로 말해놓고도 내가 영어로 내가 이렇게 이 상황에서 쏘아 붙일 수 있다니!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매니저는 "오...오케이"하고 전화를 끊었다. 치우는 여전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던진 한 마디 "누나... 무서워...". 잠시 후에 직원에게 매니저가 다시 전화를 걸더니 환불해주라고 했다. 직접 내려왔다간 멱살 잡힐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방값 자체는 환불 받았고, 아고다 예약 수수료를 살짝 떼이긴 했지만 이것까지 받아내려고 하다가는 오늘 안에 씻고 잘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기에 새롭게 알아본 호텔로 얼른 이동하기로 했다. 무려 새벽 1시 반에. 


녹물이 나온 호텔은 외국인 리뷰 밖에 없었는데, 새롭게 예약한 호텔은 한국인 리뷰가 있었다. 한국인 여성이 자녀와 함께 묵고 간 호텔이라면 이곳은 청결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거북이 등껍질 마냥 20kg의 짐을 지고 이동한 달밤의 행군은 '아, 역시 에어아시아는 우리를 얼굴보고 뽑은 게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정신력보고 뽑았구나'라는 확신을 주었다. 15분 이상을 걸어가서 호텔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예약한 호텔과 동명의 다른 호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새벽에 이게 왠 날벼락이야. 그 다음부터는 어처구니가 없는 이 상황에 그냥 미친사람처럼 웃으며 다시 세번째 호텔로 이동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세번째 호텔에서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웰컴주스를 주는데, 새벽 2시 반에 마시는 웰컴주스의 맛이란!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한국어! 다른 한국인 손님이 오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다급히 물었다. "여기..  녹물 안 나오죠?"

우여곡절을 거친 체크인 후, 우리는 무사히 씻고 양곤에서의 첫날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미얀마의 불교


굉장히 화려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무소유의 이미지인 것에 반해, 미얀마의 불교의 첫인상은 화려함이었다. 불상도 화려했고 사원도 화려했다. 미얀마에서는 불탑을 '파고다'라고 부르는데, 미얀마 내 어느 곳에서도 사원이 보일 수 있도록 곳곳에 만들어두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얀마 3대 불교 성지 중 두 곳인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와 만달레이의 마하무니 파고다를 방문했다. 쉐다곤 파고다 불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포함하여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와 2,317개의 루비와 사파이어, 대형 에메랄드가 박혀있어서 그 화려함과 위상을 자랑했다. 만달레이의 마하무니 파고다의 불상도 이에 못지 않았는데, 이곳의 특징은 사람들이 직접 금박을 사서 불상에 기도하면서 불상에 붙이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 공간은 금가루가 그렇게 많이 날린다고 하는데, 여성들은 들어가지 못해서 금박을 사서 남편이나 가족에게 대신 붙여달라고 부탁을 해야한다. 

쉐다곤 파고다 (양곤)
마하무니 파고다 (만달레이)
불상에 금박을 붙이는 남자들

양곤의 차욱타지 파고다(Chauk Htat Kyi Pagoda)에는 미얀마에서 두번째로 큰 불상이 있는데 무려 길이 67m에 높이 8m로 광각으로 찍히는 카메라임에도 전체가 담기지 않을 만큼 컸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있는 포즈에 속눈썹 연장, 아이쉐도우, 립스틱, 매니큐어, 페디큐어는 불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이를 통해 미얀마인들은 부처님 얼굴에 생기가 돌게끔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신기하다고 해서 앞에서 똑같은 포즈로 인증샷 찍으면 모독죄로 잡혀갈 수 있으니 부적절한 포즈는 주의해야한다.

차욱타지 파고다 와불상


여행 로맨스, 드디어 '썸'탔다


양곤을 떠나 도착한 미얀마의 두번째 도시 만달레이. 바쁜 일정에 지친 고백친구들은 쉴 사람은 쉬고 나갈 사람은 나갈 수 있게끔 개인시간을 하루 갖기로 했다. 물론 콘텐츠 사냥꾼인 나는 번아웃 될 때까지 더 많은 것을 담기위해 찍으러 나갔다. 치우가 갑자기 인근에 옥시장이 있다고 했다. '옥'을 파는 시장이라니! 뭔가 참신할 것 같다는 생각과 보석을 혹여나 싼값에 살 수 있을까 하여 옥시장으로 향했다. 치우랑 나랑 단둘이 향했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은 치우가 아니였다. 치우는 내 로맨스 영화의 카메라 감독님. 

 

이 곳에서는 옥 원석을 팔 뿐만 아니라 가공하는 것까지 보고 완제품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빛나는 옥 사이로 반짝반짝 내 눈에 띄는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아앗! 이 빛은 뭐지...?


성은) "잠깐만 치우야" 

치우) "뭐야...?"

성은) "방금 잘생긴 애 봤다."

치우) "끄악 누구야 누구!!! 보여줘!!!"


우리는 다시 뒤로 후진해서 그 친구에게로 갔다.

뭐랄까. 우리나라처럼 댄디하거나 세련된 멋은 없지만, 90년 대 아이돌 같은 패션의 이 소년은 마치 미얀마에 숨어있는 원석 같았다.

성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솔직히 SM연습생 들어갔을 것 같은데..."

치우) "오바야~"

성은) "꽃미남 스타일이잖아 얼굴만 봐봐 패션말고."


그는 물건을 정리하다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씨익 웃었다. 매일 가족같은 치우와 보준이만 보고 있다가...이게 얼마 만에 보는 화사한 뉴 페이스인데! 이런 건 덕담 한 마디 건네고 가야한다. 물건을 보는 척하다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유 핸썸 핸썸" (당신 잘생겼어요)


동남아에서는 영어를 문장형태로 얘기하면 더 못알아듣는다. 그냥 단어만 던지는 것이 전달력이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그는 핸썸이라는 단어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바디랭귀지를 사용했다. 


'얼굴을 가리키고 엄지척!'


역시 바디랭귀지는 만국 공통이다. 알아들었는지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오 녹는다 녹아.  


치우는 옆에서 절레 절레. 주책인 누나를 타박하는 동시에 2달 간의 촬영 교육에 길들여진터라 '얼른 옆에 가서 찍어' 하면서 카메라를 들어줬다. 역시 뛰어난 나의 유튜브 조력자! 그 소년도 뭐라고 미얀마어로 하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 가게에 있던 소년의 친구가 오더니 짧게 번역해주었다. 


"유 프리티" (너도 예쁘대)


오우 쏘 스윗~ 맨날 치우랑 보준이한테 못생겼다고 구박받다가 이런 칭찬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물건 팔려고 하는 말일지라도 감격적이었다. 제주데마레(고마워)라고 하고 그 가게를 떠났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았다. 시장 안쪽에서 옥 세공 과정까지 모두 구경한 후 치우한테 그 소년의 가게로 다시 가자고 했다. 가게는 안가더라도 주위에서 조금만 더 그 친구를 지켜보고 가면 안되겠니? 

티 안나게 주위를 서성거리는데, 그 소년과 아까 번역해줬던 친구가 나를 불렀다. 그러더니 뭔가를 건넸다. 


'응...?! 팔찌? 사라는 건가...?'


사줄까 고민했다. 치우가 옆에 오더니 '사줘 ㅋㅋㅋ 그냥' 그래서 'How much?'라고 말하며 돈을 세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그의 친구가 하는 말.


소년의 친구) "No No present(아니 선물이야)" 

성은) "응...? 선물?"

소년의 친구) "응 얘가 너한테 선물 주고 싶대~"

성은)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소년의 친구) "아니야 선물이야 받아"


하면서 팔찌를 건넸다. 한 번 더 사양하면 그 소년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될 것 같아서 고맙다고 하며 선물을 받았다. 처음보는 남자한테 팔찌를 받다니! 다시 생각해도 너무 감격적이다. 치우는 "오~~~ 잘해봐 잘해봐"라며 옆에서 박수를 쳤다. 물론 언어도 안통하고 미얀마라서 페이스북도 안하고 연락할 방법이 아예 없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인연임에 틀림이 없지만, 잘해주고 싶었던 소년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서 감동적이었다. 뭔가 받기만 하면 너무 미안해서 나도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짐을 숙소에 다 두고 카메라만 달랑 들고 나와서 줄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성은) "아 나도 뭐 주고 싶은데 줄게 없어"

치우) "누나 아무 것도 없어?"

성은) "빅시아(카메라)밖에 없어. 어떻게 해. 가져올 수도 없고 미치겠네. 나도 주고 싶은데"

치우) "머리띠 줘 머리띠" 

성은) "머리띠? 땀 났는데? 쓰던건데?"

치우) "괜찮아 그냥 줘. 쟤도 머리띠 했네"

너무 활짝 웃는 것 같아.그렇게 좋았니 성은아?

치우의 묘안으로 내가 하고 있던 녹색 머리띠를 건넸다. 쓰던 물건이라 마음에 걸렸지만 그 소년은 웃으면서 머리띠를 받았다. 그리고 팔에 감았다. 패션 아이템(?) 팔찌로 쓰려는 모양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인사하고 떠났다. 아주 잠시였지만 나의 첫 여행 로맨스는 설렜다. 두번째 '썸'은 언제쯤 오려나?   


친절한 택시 할아버지, 훌레


양곤에서 만달레이는 슬리핑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생각보다 버스가 굉장히 편했다. 버스터미널에 VIP라운지가 따로 있어서 한 번 놀라고, VIP좌석이라 그런지 버스 의자가 굉장히 편해서 두 번 놀라고, 버스 안의 태블릿에 한국 영화가 담겨져 있어서 세 번 놀랐다. 미얀마 버스에 한국 영화라니!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 승무원이 함께 타서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음료수, 과자, 칫솔, 담요같은 물건들을 계속 꺼내주셨기에 지루할 틈 없이 9시간을 이동할 수 있었다. 만달레이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가는데, 운전하시는 할아버지가 영어를 정말 잘하셨다. 단어 단어 끊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계셨다. 솔직히 미얀마에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 현지인을 본적이 없는데! 심지어 나의 원데이 썸남도 영어를 단 한 단어도 못해서 속상했는데! 젊은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가 어떻게 영어를 잘하실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할아버지 세대 때는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된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라서 필수 영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잘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 교육과정에서는 영어를 예전만큼 가리키지 않아서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하셨다. 생각해보니 상황이 이해가 갔다. 우리나라도 젊은 세대는 개인적으로 배우지 않는 이상 일본어를 못하지만,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필수 교육과정에 일본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어 회화를 훨씬 잘하는 것처럼 말이다. 택시 할아버지는 본인을 훌레(미얀마어로 '삼촌')이라고 부르라며 여러가지 미얀마 어도 알려주셨다. 친절하고 영어도 잘하는 훌레를 만난 김에 다음날 민군으로 가는 택시 투어를 부탁드렸다. 

   

만달레이에서 빼놓지 말고 들러야하는 관광지로는 민군(Mingun), 만달레이 힐(Mandalay hill), 우베인 브릿지(U bein bridge), 마하무니 파고다(Mahamuni pagoda)가 있다. 민군은 만달레이에서도 거리가 꽤 되서 하루 차를 렌트해서 다녀와야 한다. 차를 타고 육로로 이동하면 2시간 30분이 걸리지만, 훌레는 배를 타고 이동하면 30분 만에 건너갈 수 있다며 선착장까지 데려다 주셨다. 역시 가장 효과적인 여행 방법은 현지인에게 물어봐야한다는 진리! 그런데 그 이전에, 분명 아침 8시에 호텔 픽업으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7시 30분에 오시더니 함께 모닝티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미얀마 현지 찻집이었는데, 많은 로컬 사람들이 간단한 아침 식사와 함께 모닝티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인도식 짜이티, 맥심 맛의 미얀마 커피, 깔끔한 그린티를 마셨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일 때 문화적 영향력을 많이 받은 만큼, 미얀마도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특히 차문화를 특징적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마신 모닝티도 이미 미얀마 문화의 일부로 느껴졌고, 오후 3-4시 즈음에도 시장에서도 판이 깔리고 사람들이 노상으로 나와 애프터눈 티타임을 갖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프터눈 티를 즐기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

모닝티를 마시고 민군으로 향하는 배를 타러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역시 민군에 가는 사람들은 여행객들 뿐이었다. 캐나다, 벨기에,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과 만나서 30분 간 시간가는 줄 모르게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친구들과는 꼭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는다. 팔로워 목록을 보면서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기억들이니까. 


드디어 우리의 배가 민군에 도착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소 달구지 여럿이 배를 향해 우르르 달려와서 공포감을 느꼈다. '뭐지 이 소들은?' 라고 든 생각도 잠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소 달구지에 Taxi 라고 써져있는 것이 아닌가! 소 택시라니. 어머 이건 타야되! 

소 택시

소 택시라니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이었다. 덜덜덜덜 떨려서 승차감은 몹시 좋지 않았지만, 소가 달리다가 오줌도 싸고 응가도 싸는 아주 난리나는 택시여서 타면서도 계속 배아프게 웃었다. 자연현상으로 얼룩진 택시 탑승의 유쾌한 경험이었다.


양곤이나 만달레이 본토의 사원은 보석이나 금으로 꾸며진 화려함이었다면, 민군 지역의 사원은 자연적인 화려함과 닮아있었다. 물론 이것도 사람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메이크업하지 않아도 쌩얼로도 예쁜 사원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녹색 자연과의 어우러짐이 돋보이는 암석 사원 민군 대탑(Mingun Pahtodawgyi)은 엄청 큰 브라우니 느낌의 직육면체였고 사이즈가 어마무시했다. 통으로된 돌덩어리 같았는데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올린 벽돌 전탑이라고 한다. 버마의 마지막 왕조에서 짓다가 왕이 죽는 바람에 건설이 중단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완성되었다면 건물의 높이가 150m로 세계에서 가장 컸을 것이라 예상하며, 미완성인 상태로도 가로 200m, 높이 50m에 달하여 오늘날 벽돌로 만든 건축물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중간에 지진으로 중간에 금이 가서 꼭대기는 출입 금지라고 하는데, 미얀마도 꽤나 지진이 많은 국가인 듯하다. 


민군 대탑 옆에는 만달레이의 핫플레이스인 Mya thein tan pagoda가 있다. 인스타그램에 미얀마를 치면 여기서 찍은 인증샷이 우수수 쏟아나온다. 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백색의 파도모양의 사원이 정말 아름다운데, 대부분 이 곳에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민군에 방문한다. 민군 대탑을 지은 왕인 바지도 왕이 왕자시절 죽은 부인인 신뷰메 공주를 기리기 위해 만든 사원이라고 한다. 하얀색이 여성스러운 느낌을 물씬 자아내는 사원으로 흰색옷을 준비해가면 훨씬 아름다운 인증샷을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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