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中. 구의 집, 인간을 잃은 공간에서

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혼모노』성해나 소설집 표지. 반으로 나뉜 초록색과 빨간 사과가 진짜와 가짜의 대비를 상징한다. © 창비]






언제인가 얘기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겐 이상한 버릇이 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지는 영화나 책이라고 하면 괜히 멀리한다. 그러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마음이 동하면 뒤늦게 작품을 본다. 뒷북도 그런 뒷북이 없다.

오늘의 뒷북은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다.


『혼모노』/ 성해나 저 / 창비 출판


7편의 단편집을 묶은 형태로 진짜와 가짜, 욕망과 위선, 세대 간의 갈등 등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다.

책 띠지의 문구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가 꽤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졌다.


각 단편이 주는 몰입감과 재미가 상당했다.

책을 덮을 즈음엔 작가소개란을 다시 한번 보며 제대로 된 이야기꾼을 만났다 싶어 반가웠다.


2025년 3월 발간 시점부터 지금까지 책의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초반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여전히 온라인 서점 상단을 차지하고 있고, 이후 책을 접할 독자들의 즐거움 또한 생각하며 단편 집 中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한다.






인간을 잃은 두 건축가

해당 단편은 한 시대를 살아낸 두 건축가, 여재화와 구보승의 이야기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묻고 있다.


건축은 인간을 위한 공간을 짓는 일이지만, 이 작품 속 공간은 인간을 밀어내고 있다.

한 사람은 신념을 말했지만 자신의 욕망에 무너졌고, 한 사람은 생각 없이 살다 삶이라는 파도에 휩쓸려버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마지막에 다다른 질문은 ‘우리는 얼마나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였다.



여재화 – 욕망을 지키려다 자신을 잃은 인간

여재화는 빛과 바람, 온도와 여백이 사람의 마음을 살게 한다고 믿었고, 그 마음이 살고 싶은 공간이 건축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군부독재 시절,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명성과 지위 앞에 타협을 선택하며, 대통령 사저와 대공분실 같은 권력과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는 공간을 설계했다.


그 선택은 그의 건축이 더 이상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을 위한 건축’을 하고 있다는 듯, 기능과 효율성만을 따지는 구보승의 설계를 지적하며 질책한다.


언뜻 여재화의 문제제기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한발 물러나 생각해 보면 여재화는 이미 타락의 길 위에 서 있었고, 겉으로만 올바름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신념을 잃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언행은 단지 타락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심리적 방패라는 것을.


“재능은 있는데 야망은 없는, 주무르기 쉬운 놈.”

그는 자신의 앞길에 해가 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고, 영 달갑지 않은 제자 구보승을 대공분실 설계 조수로 선택한 이유였다.


여재화는 윤리를 말했지만, 그 윤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남았다.

그가 말하던 건축의 ‘인간’은 이미 그 안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욕망을 포장하는 말뿐이었다.


그의 비극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진심이 언어의 껍데기로 변해버린 데 있었다.



구보승 – 감각이 결여된 채 기능만 남은 인간

구보승은 여재화와 닮지 않은 듯 닮은 인물이다.

그는 신념이나 윤리를 모른다.

단지 기능과 효율을 먼저 생각할 뿐이다.


건축의 목적이 무엇이든,

그저 설계가 정밀하고 완벽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재화가 이 일이 대공분실 설계임을 알렸음에도 그는 일말의 동요도 느끼지 않은 채, 그곳을 정확한 구조 계산이 필요한 ‘작업 대상’으로만 보았다.


구보승의 설계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고통을 상상해 인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무너트리는 공간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에게 건축은 삶의 윤리가 아니라 기술의 완성도를 증명하는 일일 뿐이었다.


설계 막바지에 이르렀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여재화에게 질문을 받는다.

“자네는 아직도 그곳이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나?”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구보승은 자신이 만든 공간의 의미를 떠올리며, ‘정말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스쳤음에도 오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마음으로 단언한다.

그는 그렇게 윤리적 언어를 가질 기회를 스스로 흘려보낸다.


윤리적 생각을 하지 않았던 노년의 구보승은, 이제 합리를 중시하는, 수완 좋은 공중개사가 되어 발길 닿는 데로 걷다 자신이 설계했던 건물 앞에 선다.


정초석(건물의 공사 착수를 기념하여 설치하는 돌)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50보와 100보의 거리에서

여재화와 구보승 ― 둘은 다르지만 결국 닮았다.

여재화는 생각했으나 자신을 속였고,

구보승은 생각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여재화는 자신의 욕망을 윤리의 언어로 포장했고, 구보승은 윤리라는 단어가 안중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는 ‘윤리를 잃은 자’,

다른 하나는 ‘윤리를 알지 못한 자’.

그러나 그 둘 모두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여재화는 구보승의 설계를 두고

“그건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라고 꾸짖지만, 정작 자신 역시 욕망에 물들어 인간을 위한 건축을 하지 않았다.


이 모순의 순간, 구보승에게는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생각(윤리) 없이 사는 대로 사는 인간’으로 돌아간다.


모든 이익은 자신이 취한 채

명예롭지 않은 대공분실의 이름을 구의 집이라 짖고 정초석 설계자의 이름을 구보승으로 남긴 여재화는 비열하고 졸렬한 인간이다.


하지만 비극적인 인간을 얘기한다면 구보승일지도 모른다.

비록 여재화는 비겁했지만 욕망을 쫓으며 자신까지 속인 채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다 갔지만, 구보승은 자신의 언어조차 없이 그저 주어진 세계에 반응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의 우리에게

이야기를 덮고 나니 묵직한 물음이 남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 변했는가.

우리의 오늘은 구보승이 살았던 세상보다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간다.


윤리적 언어를 따지고 생각하지 않아도,

나만의 실리를 따지고 기능과 효율성만을 쫓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윤리적인 인간으로 남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각박한 세상은 갈수록 야만의 시대로 퇴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는, 그 크기에 차이만 다를 뿐, 타인의 존재를 나와 같은 무게로 느끼는 감각이 남아있다고.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상처 입은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짧은 순간, 부조리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 그 한 번의 시선.


인간의 품격은 그런 찰나의 선택 속에서 드러난다.


세상이 효율을 말할수록, 우리는 더더욱 그 느림의 감각을 지켜야 한다.

생각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는 일은, 타인의 상처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 짧은 순간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여재화와 구보승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다만 그 경계 위에서, 어떤 질문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지 않을까



성해나 작가가 그런 구상을 염두에 두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보승을 읽으며, 양경헌 문학평론가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 역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접했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아픈 역사로 남았지만, 대공분실이라는 장소를 이야기로 엮어서인지

‘사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행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다시금 깊이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이유로 스스로의 감각을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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