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짙은 녹색 배경 위, 거대한 초록빛 정육면체를 마주한 한 인간의 모습. 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문학동네 ©
『너무 시끄러운 고독』너무 시끄러운 고독
한탸는 35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노동자다.
그의 하루는 어둡고 눅눅한 지하에서 시작된다.
도살장의 잔해와 함께 뒤섞인 피가 묻은 종이, 각종 폐지와 먼지 위에 물을 뿌린다.
그리고 압축기가 내뿜는 묵직한 진동음이 그를 둘러싼다.
그는 수많은 쥐떼와 파리떼, 부패한 오물 속에서 술이 그를 마시는지 그가 술을 마시는지 모를 정도의 취기 속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 혼자 일한다.
위를 향한 시선은 없기에 몸은 점점 구부정해지고, 세상은 그를 잊은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역설적이게도 책이 좋아 폐지를 압축하는 노동자가 되었고,
그 폐지 속에서 한 줄기 빛 같은 책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버린 문장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철학서, 한때 누군가의 삶을 흔들었을지도 모를 책들을 그는 버리지 못한다.
그는 책과 만나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술을 마시며,
술을 통해 사색의 대상을 불러내어
야만적인 현실을 끌어안는다.
책을 압축하며 부수는 순간에도 그는 책 속의 문장을 읊조린다.
그의 일은 파괴이지만, 그 속에서 그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그는 말한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 주었다.”
그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에게 책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와 고통, 구원의 흔적이 압축된 세계였다.
그는 그 책들을 부수며, 그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냈다.
한탸는 폐지를 압축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었다.
그는 폐지 더미 속에서 찾아낸 명화의 복제본을 압축된 꾸러미의 겉면에 감싸고,
그 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책 한 권을 펼쳐 함께 넣는다.
그에게 그것은 단순한 작업 방식이 아니라,
책을 향한 한탸만의 신성한 의식이 아니었을까.
그의 손끝, 압축기의 녹색과 빨간색 버튼 아래에서 책과 함께 파괴된 폐지는 명화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그 압축물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의 수문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탸가 책을 사랑한 이유는,
그 책 속에 인간의 숨결이 살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책을 통해 나와 인간을 배우고, 인간의 고통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로 아는 깨달음이 아니라, 땀과 먼지, 술과 어두운 현실에 섞인 몸의 앎이었던 것 같다.
그의 책 사랑은 감상적인 열정이 아니라,
한탸 자신이 자가 실험체가 된 듯 녹록하지 않은 삶을 온몸으로 받아내듯,
매일 폐지와 함께 책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다시 사랑했고,
그 모순 속에서 인간으로 남는 듯했다.
나는 그 장면들을 읽을 때마다 묵직한 무게가 가슴에 남았다.
책 속 문장 하나하나보다,
그 문장을 붙잡고 살아가는 한탸의 손과 눈빛을 떠올릴 때, 그 끈끈하고 질퍽한 질감이 나를 붙잡았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무게였다.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몰라 머금고 머금다, 한꺼번에 숨을 몰아쉬게 되는 그런 밀도의 감정을 느꼈다.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이해했다.
그는 그 책들 속에서 인간의 비극과 구원을 동시에 배운 듯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은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세상은 사고와 상식의 충돌이 일어나며 냉정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은 사유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구했지만,
그것을 세상을 피하는 통로로 사용하지 않고 세상을 견디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의 책은 지식 습득용이 아닌 숨 그 자체였다. 한 권의 책은 그에게 하루를 버티게 하는 산소였고, 그가 세상을 향해 남긴 유일한 흔적처럼 보였다.
나는 책을 사랑한다.
하지만 한탸를 만나고 나니,
내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벼웠는지, 얼마나 머리로만 책을 읽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비록 지금의 나는 책을 통해 변화되었다고 믿고, 변화되었으며 앞으로도 책이 나를 이끌어 주리라 믿는다.
한탸는 책을 사랑한 나머지 그 자신이 책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책이 될 순 없다는 걸 안다.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었지만,
나의 사랑은 현실 속에서 부드럽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한탸의 책 사랑이 눅진하고 끈적한 사랑이라면, 내 책 사랑은 서서히 스며드는 방식의 사랑이고 싶다.
삶의 희로애락 앞에서,
가볍지도, 그렇다고 한없이 무겁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서 책과 함께 녹아가듯 살아가고 싶다.
예전에는 힘든 일이 생기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책을 읽었다.
그때의 나는 책을 피난처로 삼았고, 그 안에서 현실을 잊으려 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이제는 내 삶의 구비마다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책은 내게 방법을 가르쳐주기보다는,
때로는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게 해 준다.
어떤 날은 길을 비춰주고, 어떤 날은 그저 내 옆에서 묵묵히 함께 걸어준다.
이제 나는 책을 통해 달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과 함께 머물며,
삶을 조금 더 짙고 깊게 살아가고 싶다.
한탸는 책 속으로 들어가 책이 되었지만,
나는 책과 함께 걸으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의 사랑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나의 사랑은 일상의 온도 속에 스며들길 바란다.
그가 압축 속에서 완성을 찾았다면,
나는 매일의 독서 속에서 나를 확장해 가길 바란다.
책은 여전히 나를 더 새로운 나로 변화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책 읽는 속도가 책을 집으로 데려오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 무한한 잠재력에 매료되어 오늘도 나는 새로운 책을 집으로 데려오기를 멈추지 않는다.
또한 그 믿음이 나를 책 곁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책의 한 문장 속에서,
조용히 나 자신을 읽고, 다시 살아갈 힘을 배운다.
책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나와 함께 살아가며,
내가 세상을 견디고 이해하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이고,
한탸를 읽으며 배운 가장 단단한 진리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책도 타이밍이란 게 있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래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땐, 132페이지의 얇은 책인데도 마음에 닿는 구석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는데 개안을 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울 만큼 구절구절이 마음에 닿아 찌르르한 상태로 책을 덮었습니다.
제 인생 책 중에 한 권으로 등극했습니다. 곁에 두고, 두고두고 펼쳐보려 합니다.
책을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셔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책은 어떤 의미인가요?
혹은 삶을 견디게 해주는 '한 권의 산소'는 무엇인지 여쭙고 싶은 밤입니다.
긴 추석연휴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네요. 긴 연휴의 끝이라 모두들 아쉬움이 많이 남으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내일 출근하면 다시 주말이니까 조금은 덜 힘드시기를 바라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