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클레어 데더러의 책 『괴물들』 한국어판 표지. 붉은 배경에 ‘Monsters’라는 글자가 위아래로 겹쳐 인쇄되어 있다. 상단에는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문구와 저자·역자 이름이 쓰여 있고, 하단에는 추천인과 주요 언론의 “올해의 책” 표기가 있다. - © 클레어 데더러 / 열린책들]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들, 즉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창작자들의 예술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그래서 제목 또한 ‘괴물들’이라고 명명했겠지만, 나는 이 제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 그 당사자는 괴물이라는 모호함 속에 흐릿해지고, 그의 구체적 잘못은 그 추상성 속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름, 그의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희미해지길 원치 않는다.
물론 ‘괴물들’이라는 단어는 작가가 의도한 윤리적 사유의 장치였겠지만, 결국 그 말은 블랙홀처럼 구체적 책임을 ‘괴물’이라는 모호성에 빨아들여 버린 듯이 느껴졌다.
현실의 폭력이었음에도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나와는 무관한 가상의 세계처럼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프롤로그를 제외하고는 각 장의 소제목에 단순히 ‘피카소’나 ‘우디 앨런’의 이름만 붙인 것이 아쉬웠다.
그들이 저지른 일을 명확히 함께 기록했더라면 어땠을까?
짧은 생각으로 법적인 문제의 소지로 명기를 못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설사 그렇다면 ‘피카소의 예술과 여성 폭력 논란’, ‘우디 앨런, 그를 둘러싼 아동학대 의혹’으로만 쓰였어도. 이 책은 훨씬 더 그들의 행위에 질문하는 무게감 있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봤다.
그럼에도 이 책이 고마운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어두운 이면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읽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많은 부분들을,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떠올리며 동시에 또 다른 불편함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는 점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졌다.
피카소의 작품 중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고통을 절절하게 담아낸 『게르니카』를 좋아한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폭력과 야만 앞에서도 끝내 인간이 저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느낀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부정할 수 없는 대작이며, 피카소는 시대의 고통을 형상화한 천재적 예술가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폭력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에게 가했던 폭력과 착취의 행위들에 침묵할 수 없다.
그의 예술이 위대하다면, 그 위대함 속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결함 또한 더더욱 함께 얘기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적 성취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감동의 자리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간적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예술은 예술가의 그림자 위에 서 있다.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일과, 그 사람의 행위를 기억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게르니카』를 통해 여전히 감동을 받지만,
그 감동이 피카소라는 인간의 불편한 면모를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예술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재능에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은 또 다른 침묵의 공모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다.
피카소나 헤밍웨이 같은 예술가들이 지금 이 시대에 존재했다면, 과연 그들의 행동이 여전히 용인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지금처럼 평등하지 않았고, 그만큼 폭력과 착취에 대한 감수성도 사회적으로 미약했다.
예술의 이름으로, 천재의 명성으로, 그들의 행위는 오랫동안 침묵과 묵인 속에 덮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건 시대가 자연스럽게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했기 때문이다.
‘그건 예술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천재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 말들을 계속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폭력과 착취가 ‘개인의 성향’으로 미화되지 않는다.
그 긴 시간의 싸움과 질문이 쌓여서, 이제 우리는 “예술은 자유롭되,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장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도 여러 아티스트들이 용서받지 못할 행동으로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건 누군가를 몰락시키기 위한 집단적 비난이 아니라, 이제야 사회가 스스로의 윤리 감각을 갱신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계속 질문하고, 계속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은 조금씩이나 변해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묻는다.
“우리가 사랑한 예술가가 괴물이라면, 그 예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질문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가 그 질문 앞에서 끝까지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과 윤리적 혼란을 솔직히 고백했지만, 정작 자신이 내린 판단이나 입장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망설임이 인간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지만, 그 여백이 너무 커서 오히려 독자로서 나는 길을 잃은 듯했다.
짧은 소견이지만 질문을 던졌다면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이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진정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것과, 작가가 책임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나는 괴물인가?”라고 자문하며 글을 맺지만, 그 문장은 윤리적 불편함을 두꺼운 가림막으로 덮어두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결국 책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질문의 여운이 아니라 판단의 공백이었다.
“나는 괴물인가?”
그 문장은 겉으로는 정직해 보이지만,
실은 질문을 흐리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마치 성경 속 구절처럼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이 던지는 울림은 크지만, 그 논리로는 아무도 돌을 던질 수 없다.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모두의 책임을 연기처럼 허공 속으로 흩어버리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침묵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우위에 서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말하는 것이다.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인간이기에 질문하고,
인간이기에 책임을 묻고,
인간이기에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나는 괴물인가’가 아니라,
‘나는, 우리는 인간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한 예술가가 괴물이라면, 그 예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술을 사랑하는 일과, 그 예술가의 행위에 책임을 묻는 일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감상은 자유이지만, 그 자유는 망각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예술을 통해 감동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이 누군가의 고통을 지워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지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남긴 생각이며,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나에게도 오랫동안 좋아해 온 가수가 있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다정히 어루만졌고, 그가 만든 음악을 듣는 일은 나에게 하나의 위로이자 사랑이었다.
그가 발표한 노래 중 혐오와 차별의 시대 속에서 사랑이 끝내 승리하리라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있다.
뮤직비디오 속 두 주인공은 서로의 존재를 캠코더로 기록한다.
현실에서는 한 사람은 시각장애를, 다른 한 사람은 청각장애를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영상 속에서는, 캠코더 화면 안에서 그들의 장애는 사라진다.
그들은 아무 결핍도 없는 평범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보인다.
처음 영상을 보았을 때 팬의 입장에서 눈물이 났다.
그토록 아름답고 가슴 시리게 사랑을 노래한 장면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입에 침이 튀도록 극찬을 하는 나를 두고 며칠 뒤 동료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영상이 장애를 결핍의 상징처럼 표현했다는 것이다.
열렬 팬으로 나는 본능적으로 부정부터 했다. ‘아니에요 오해예요’, ‘스토리를 봐야 해요’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드러나는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동료에게 사과했다. 그의 말이 옳았고, 그것은 분명한 잘못이었다.
아마 그 가수의 입장에서 해당 작품을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도, 그 가수도 인권 감수성의 시선을 놓친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시선에서는 충분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장면이었다.
인권감수성은 자연스레 장착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잘못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인간이기에 배워야 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 일로 일개 팬인 나도 이렇게 속상했는데
그 가수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그 가수는 더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사람만이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위선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될 수 도 없다.
그렇기에 작품을 사랑한다면 더더욱 그 예술가의 잘못을 외면하거나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찜찜한 마음으로, 문제의식을 품은 채 그 작품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진짜 팬의 자세 아닐까.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더 냉철하게 봐야 한다.
감탄과 비판이 함께 있는 그 복합적인 시선이 결국 예술을 더 인간적인 자리로 이끌어간다고 믿는다.
우리는 질문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우리는 계속 묻고,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 가능성을 믿는 일.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나의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묻고 도달한 결론이다.
글을 쓰다 보니 의도치 않게 제 ‘최애’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가수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중가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를 떠올리실지 아마 짐작하실 겁니다.
저만의 소중한 비밀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가져주세요.
또한 이 글이 조금이나마 여러분께 해당 주제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제 생각이 정답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논의가 깊어지고, 서로의 생각이 확장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더 나은 길을 찾을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작가가 던진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시렵니까.
날씨가 춥습니다. 매 시간을 따뜻함으로 채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