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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leen Jan 26. 2016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고생

2학기를 열면서

짧은 여행을 자주다니던 요근래 내가 내린 집의 정의는, 비행기에서 착륙하자마자 휴대폰 서비스가 터지는 곳. 이었다. 한달만에 돌아온 요즘의 집은 아주 익숙하고 따듯하게 날 맞았다. 두 해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 도시의 칙칙한 공항의 분위기가 익숙하고, 비싼 택시요금이 익숙하고, 자비없이 빨리빨리 걷는 출근길 퇴근길 사람들이 익숙하다.

돌아왔다. 새학기를 지내러.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고생을 하러.

런던에서 지낸 방학 한달은 해가 없어도 따듯하고, 비가와도 포근한 그런것이었다. 엄마아빠가 있는 일산 집의 느낌보다 조금 더 어렸고, 조금 더 자유로웠다. 예를 들자면, 고기구워먹고 와인한병을 둘이서 끝낸다음에 픽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서 빈속에 초콜릿 과자를 먹는 식이었다. 바쁘지 않았지만 매일 할 일과 만날사람들이 나름대로 있었고, 관광하러 간 건 아니었지만 관광지도 지나다녔다. 원대한 꿈을 품고 간 여행이 아니어서 소소하게 감사했던 일들이 꽤 예쁘고 소중하게 기억될 것 같은 여행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산에 있는 엄마는 집에 코빼기도 모습을 안비추는 딸이 아쉽지만 내색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작년에는 그래도 방학때마다 한국을 들어가서, 이번으로서 엄마를 가장 오래 못 본 기록을 갱신했다. 또 오만하게도, 고만고만 하게 사니까 엄마가 보고싶지만 못봐서 죽을것 같지는 않다. 아프면 그렇게 서럽고 보고싶더니. 인간이란 그렇게 애매하게 야비한지 애처로운지 모르겠는 생명체인가부다. 아니면 내가 애매하던지.

돌아온 뉴욕 집 근처에는 한달 새 새로운 레스토랑이 생기고, 또 있던 레스토랑이 허물어지고 했다. 집착하듯이 변한것들을 눈으로 쫓다가 금새 관두기로 한다. 변한것들을 찾느라 변하지 않은것들을 놓치는 실수를 또 건물들에게 한번 더 하고싶지는 않은 마음이 조금 있기도 했다. 그동안 똑같은 실수를 인간관계에서, 학교 작업에서, 또 다른 이곳저곳에 저지르고, 쓰린마음을 대충 이렇게 저렇게 땜질하듯 메워버리고 후다닥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에, 이미 빠져나간 것들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대책없이 허망한 일인지를 배웠기 때문에. 이번 분기에 도전해볼 일은, 빠져나가기 전에 알아보고 후회없이 마음을 쏟는법을 배우는거다.

나의 뉴욕은 한국만큼이나 “빨리빨리”가 중요한 곳이기떄문에, 마음 결정도 빨리 해버려야 할 때가 많다. 다들 상처받기엔 너무 바쁘니까 일찌감치 마음을 닫거나 열거나를 결정하려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고, 합마다 속도가 다른법일텐데. 그래서 그렇게 나와 속도가 비슷하고, 우리 합이 진전하는 속도가 적당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래 못 본 가족처럼 반갑고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짓게 되는가부다. 인간관계가 그렇게 힘들다고 입을모아 말하는 그 뉴욕에서 서로서로 엄마아빠의 조각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12시간 후에는 새로운 한 학기가 시작될 거고. 나는 또 고상한 고생을 약 4개월간 하게되겠지. 이것만큼 고급스러운 고생이 어딨나 싶다. 이렇게 정신없는 성장기에 하고싶은 일을 알고, 그 일의 조금 더 세밀한 가닥이 잡혀가는걸 볼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사치스러운데, 든든한 지원자들까지 있다는게 얼마나 분에 넘치는 일인가. 다만 일주일동안 10시간도 못자는 주가 있을때, 계속 쏟아지는 과제에 시간 계산하느라 내가 몇살인지도 까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떄, 이런 감사할 일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투덜거리며 응석을 부리는 때가 오면, 이렇게 학기 시작전에 쓴 글을 읽고 마음에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하도록 해야지.

또 한학기. 열심히. 그리고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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