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말에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은 한 음절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손', '발', '귀', '눈', '코', '입',
생명의 근원인 '물', '불', '해', '달'이 그렇다.
중요한 말일수록 한 음절로 굳어졌고,
'글'은 그보다 훨씬 뒤에 생겨났다.
'말'은 한자로 '언어(言語)', '글'은 '문자(文字)'다.
흥미롭게도 '말'과 '글'은 순우리말이지만,
낱글자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은 없다.
'낱글'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나중에 만들어진 표현이다.
글의 가장 작은 요소인 '자(字)'를 지칭하는 고유어가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문자 체계를 받아들일 당시
이미 한자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할아버지 댁 서랍장 속에서 누렇게 바랜 천자문을 발견했다.
한글을 갓 뗀 어린 나에게 그 책은 낯설고 신기했다.
'天地玄黃'—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똑같이 네모난 칸 안에 있지만,
어떤 글자는 획이 많아 빽빽했고,
어떤 글자는 몇 획 되지 않아 시원했다.
'人'은 사람이 두 다리로 서 있는 모습,
'山'은 뾰족뾰족한 산봉우리가 세 개,
'門'은 서부 영화 술집 문처럼 양쪽으로 열리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림 같으면서도 글자이고, 글자 같으면서도 그림이었다. (상형자—象形字)
더 신기한 건 글자들이 모여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나무 목(木)' 자가 두 개 모이면 '수풀 림(林)'이 되고,
세 개 모이면 '빽빽할 삼(森)'이 되었다. (회의자—會意字)
중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한문'이라는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다.
예쁜 선생님을 짝사랑해서 그런지 성적은 언제나 좋았다.
이후 일본에서 5년을 살았고,
지금은 중국어를 배운 지 1년 반이 되어 간다.
돌고 돌아 아직 한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자 문화를 공유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중에
우리나라는 한자를 읽거나 쓰지 못해도 문자 소통에 큰 불편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헷갈릴 때가 있다.
나의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가 문득 떠오른다.
체코 출신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
지금은 '드보르자크(Dvořák)'로 표기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드보르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드보르'라는 사람이 작곡했다는 뜻의 '드보르作'으로 오해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신나는 노래의 악보 왼쪽 윗부분에 적혀 있던 '행진곡 풍으로'라는 말이다.
그때 내가 아는 '풍'은 오로지 '바람 풍(風)'이었기에,
행진곡과 바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했다.
그 수수께끼는 20여 년이 지나 일본어를 배우며 풀렸다.
유학 준비를 하며 일본어를 익히던 중, '~風に(후-니)'라는 표현을 배웠다.
'어떠어떠한 느낌으로'라는 뜻의 부사구였다.
결국 '행진곡 풍으로'는 일본식 표현을 직역한 것이었다.
요즘은 순화된 표현으로 '~한 느낌으로'라 쓴다.
그럼 다음 문장에 나오는 '고'字는 각각 어떤 한자일까?
멤버십 브런치북을 퇴고하여 발행하니,
창작자 정산으로 은행 잔고가 늘어 있었다.
입금액에 고무되어 더 열심히 글을 쓰게 되었다.
먼저 퇴고(推敲)는 '밀 퇴(推)'에 '두드릴 고(敲)'다.
나는 한때 '퇴학(退學)'의 '물러날 퇴(退)'에
'원고(原稿)'의 '볏짚 고(稿)'로 생각했다.
사실 이 단어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스님이 달 아래에서 문을 '밀다(推)'로 할지
'두드리다(敲)'로 할지 고민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다음으로 잔고(殘高)는 '남을 잔(殘)'에 '높을 고(高)'다.
나는 당연히 '창고(倉庫)'의 '곳집 고(庫)'라고 생각했다.
이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가 그대로 수입된 경우다.
더 흥미로운 건 일본어 발음이다.
'잔다카(ざんだか)'라고 읽는다.
'잔(殘)'은 한자 그대로 음독(音讀)하고,
'고(高)'는 '다카(たか)'로 뜻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고무(鼓舞)는 '북 고(鼓)'에 '춤출 무(舞)'다.
이 단어는 중국어에도 같은 한자를 쓴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하지만 한글로 '고무'라고만 적혀 있을 때,
그 안에 북을 치고 춤을 춘다는 뜻이 담겨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비슷한 뜻의 '고취(鼓吹)'는 '북치고 피리까지 부는 것'이다.
얼마나 사람을 힘나게 하는 역동적인 표현인가.
이렇듯 우리는 익숙한 한자어를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틀 안에서 오해할 때가 많다.
미국에서 한국 회사로 이직한 직후,
나의 '말하기' 능력은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영어 단어 사용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다 보니 말을 고르게 되었다.
'이 단어나 표현이 한국인들에게 낯설면 어떻게 하지?'
'너무 굴리는 발음으로 상대방이 거부감을 느끼면 어떻게 하지?'
굳이 '해외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가급적 한국어 단어를 우선으로 쓴다.
대안이 없다면 영어 단어를 쓰되 정직한 한국식 발음으로 말한다.
둘째, 회사 업무에 널리 퍼진 일본식 한자어나
일본어 표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어제·오늘·내일을
昨日(기노), 今日(교-), 明日(아시타)로 쓰고 읽는다.
일본도 표기만 한자로 하고 고유어로 말하는데
발표나 보고서에 '작일', '금일', '명일'이라고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다.
더구나 원뜻도 모른 채 쓰는 여러 일본어 표현들도 불편했다.
"네가 마도 잡고 일해라"에서 '중심을 잡다'로 쓰이는 과녁 的(まと, 마토),
"겐또 때려 맞춰라"의 '어림짐작하다' 見当(けんとう, 겐토-),
"나래비 세워서 골라라"의 '줄 세우다' 並び(ならび, 나라비)
같은 표현들 말이다.
셋째, 나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민감성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 '눈이 자유롭지 못한 분'
(目の不自由な方)이라는 표현이 매우 신선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맹인', '장님' 등의 차별어 대신
'시각장애인'으로 순화하려는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최근까지도 나는 농아(聾啞)의 '아'가
아이를 뜻하는 '아'(兒)인 줄 알았다.
'농'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아'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렇게 여전히 부족한 나지만 직장내 차별어는 순화하고 싶다.
특히 '여사원'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반도체 공장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 직원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사원'이라는 표현 속 '내려보는 톤'과
'성 고정관념'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냥 '직원' 또는 '라인 사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이렇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말할 때마다
단어를 고르느라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아니다.
언어는 우리 생각을 담는 그릇이자,
동시에 우리 생각을 만들어내는 틀이다.
그 본질을 들여다볼수록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한자어가 70%를 차지하는 우리말에서,
한자를 아는 것은 단순히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다.
말의 유래를 살피고 주변 나라의 언어와 비교하다 보면
같은 문자를 공유하면서도 각기 다르게 발전시킨
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내가 한자 공부를 계속하는 이유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내려놓고 조금 느슨하게 생각하니 말이 잘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언어의 뿌리를 찾고,
그 안에 담긴 문화를 비교하며 나의 영점을 조정하려 한다.
나는 철저한 문화 상대주의자다.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이 '국수주의'와 '패배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됐고,
비교문화 연구는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사가 되었다.
한자 문화권에서 한국어만 안다면 0차원 '점'이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안다면 1차원 '선'이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 2차원 '면'으로 인식의 틀이 넓어지고 있다.
이 연재의 목적은 한자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한자를 통해 문화를 비교하며 '우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
그 '면' 안에서 피어날 이야기들을 기대해 주시길.
내가 고3 때 일이었다.
95학년도 대입에는 수능 말고도 본고사가 추가되었다.
그중 한 꼭지가 논술이었다.
논술 모의고사에서 내가 '역할'(役割)을 '역활'로 잘못 썼다.
아니, 당시 나는 그게 맞는 줄 알았다.
"니가 많이 안 써봐서 그래" 하며 친절하게 미소 지어주신
국어 선생님이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한자 공부 열심히 해서 이런 실수 줄여갈게요."
'한자(漢字)' [한짜]를 한 자 한 자 모아서 '크고 으뜸가는' 한 글을 써보겠다.
이것이 <한자 모아 한글>의 시작이자
내가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