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간 - 첫번째 이야기
2005년 봄,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놀란 건 한자의 모양이었다.
'나라 국(國)'은 国,
'몸 체(體)'는 体,
'배울 학(學)'은 学.
익숙했던 글자들이 획수를 덜어내 모양이 낯설게 다가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 세 글자는
중국과 일본이 같은 글자체를 쓰고 있었다.
타이핑이 보급되기 전,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야 했던 시절에는
획 하나라도 줄여야 빨리 쓸 수 있었겠지.
중국은 1950년대부터 공산당이
강력히 추진한 간체자(简体字)를,
일본은 1949년부터 2,136자의 상용한자에 한해
신자체(新字体)를 도입했다.
반면 한국과 대만은 여전히 옛 형태의 정체자(正體字)를 고수한다.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문자의 형태는
한국·중국·일본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세 나라가 쓰는 한자의 모양이 다른 경우는 무수히 많다.
그중 '전할 전(傳)'은 세 나라의 글자체 뿐 아니라 발음의 차이가 흥미롭다.
한국은 傳,
중국은 传,
일본은 伝.
으로 쓴다.
전(傳)은 대표적인 형성자(形聲字) 중의 하나다.
형성자란 소리부와 뜻부가 결합해 발음과 의미를 함께 나타내는 구조로
한자 전체의 약 80%를 차지한다.
뜻은 왼쪽의 '사람 인(亻)변'이 소리는 오른쪽의 '오로지 전(專)'이 담당한다.
사람이 역참을 통해 소식을 전달하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할 전' 외에도 '오로지 전'에 다양한 부수가 더해져 여러 뜻을 나타낼 수 있다.
'수레 거(車)부'가 붙어 '구를 전(轉)',
'흙 토', '기와 와'가 붙어 '벽돌 전(塼, 甎)' 등등.
현대 한국어 발음으로는 모두 '전'인 반면 중국어과 일본어의 발음 변화가 눈에 띈다.
專, 傳, 轉, 세 자를 비교하면,
① 전공 (오로지 專)
한 : 專攻 [전공]
중 : 专业 [zhuānyè, 줸예], *문자 그대로 전업(專業)이지만, 대학교의 전공을 뜻함.
일 : 専攻 [せんこう, 센코-]
② 전달 (전할 傳)
한 : 傳達 [전달]
중 : 传达 [chuándá, 촨따]
일 : 伝達 [でんたつ, 덴타츠]
③ 전환 (구를 轉)
한 : 轉換 [전환]
중 : 转换 [zhuǎnhuàn, 줸환]
일 : 轉換 [てんかん, 텐칸]
한국과 중국은 '오로지 전'에 해당하는 專, 专을 일관성 있게 쓴 반면,
일본의 신자체는 뜬금없이 '이를 운(云)'을 붙였다.
총 획수는 6획으로 중국어와 같지만,
형성(形聲)의 원리를 저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더욱이 [センsen - デンden - テンten]으로
각기 다른 발음으로 불리는 것도 헷갈린다.
물론 한국인인 내가 뭐라 운운(云云)할 문제는 아니지만. (笑)
흥미로운 건 중국어의 발음이다.
같은 '전할 전(传)'의 발음이,
'전하다'라는 뜻일 땐 [chuán, 촨],
'이야기'를 뜻할 땐 [zhuàn, 줸]이 된다.
'전염(傳染)'과 '전기(傳記)'를 예로 들면,
각각 传染 [chuánrǎn, 촨롼], 传记 [zhuànjì, 줸지]가 된다.
처음 이 글을 구상할 때, '같은 한자가 다른 발음인 것엔
분명 심오한 무언가가 숨어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를 뒤져봐도 왜 같은 한자가 의미에 따라
두 가지로 발음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유래를 아시는 분들은 댓글을 달아 주시길.)
다만 '전할 전'이 품은 두 가지 의미—전하다와 이야기—가
나에게 남긴 울림을 나누고 싶다.
과학자로서 '전할 전(傳)'이 들어간 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유전자(遺傳子)'다.
굳이 나누자면 '유전(遺傳)'과 '자(子)'로 나뉜다.
이 중 '유전(遺傳)'은 후대에 '남기고' '전달하는' 것을,
후자의 '아들 자(子)'는 형질의 최소단위를 뜻한다.
유전자를 뜻하는 영어의 gene은
'탄생'을 뜻하는 라틴어 genus에서 비롯됐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1900년대 초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Wilhelm Johannsen, 1857-1927)이 처음 사용했다.
아직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관찰되기도 전에
더욱이 'ACGT'에 따라 형질이 유전된다는 개념도 알기 전이었다.
이와 같이 과학에서는 일단 먼저 개념이 만들어지고
나중에 관측되거나 증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 처음 당시 중국에서 유전인자(遺傳因子)로 번역했고
이후 일본어에선 '인'을 빼고 '유전자'로 부른 것이 한국에 전달되었다.
현재 중국은 '인자' 대신에 '기인(基因)'을 붙였다.
특히 遗传基因 [yíchuánjīyīn, 이촨지인] 발음의
마지막 음절이 영어 gene과 비슷하게 들린다.
중국인들은 외래어를 차음(借音)할 때,
소리뿐 아니라 뜻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코카콜라가 "입에 맞고, 즐겁다"라는 의미의
可口可乐(kěkǒukělè, 커코커러)로 불리는 것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역사 서술 방식의 하나인 기전체(紀傳體)로 쓰였다.
이는 또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표(表), 지(志)로 나뉘어 있다.
'전(傳)'은 '열전'의 줄임말로 인물의 생애와 행적, 개인적 전기 등을 상세히 기술한다.
이 전통은 조선 시대 인물 중심 한글 소설의 제목으로 이어졌다.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등이 그 예다.
한편 일본은 '전(傳)' 대신 일반적인 이야기를 뜻하는 '모노가타리(物語, ものがたり)'를 붙인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가 대표적이다.
한국과 중국의 유명한 '전(傳)' 두 편을 함께 살펴보자.
하나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이고,
다른 하나는 루쉰(魯迅)의 《아큐정전(阿Q 正傳, āQzhèngzhuàn)》이다.
두 작품은 모두 한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지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허생전》은 유교적 도덕과 경제 질서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인간상을 탐구했다.
허생은 끝까지 이름조차 드러나지 않아 실체가 모호하다.
'허(許)'는 단순한 성씨가 아니라 '빌 허(虛)'로 읽히며 허구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연암이 당대의 검열과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장치이자,
소위 '양반' 계층의 허위와 허세를 은근히 비꼰 이중적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아큐정전》은 '정신승리'를 하는 주인공을 통해
혁명기 중국 민중의 무지와 모순을 꼬집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꾸이(Quei)'라서 줄여서 'Q'로 표기했겠지만,
제목에 굳이 영어 대문자 'Q'를 쓴 루쉰의 숨은 의도는 많이 회자된다.
'변발(辮髮)'을 뜻하는 영어 단어 queue의 첫 글자이자,
'Q'자의 모양 자체가 변발을 늘어뜨린 청나라 남자의 뒷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풍자문학은 현실에 닿아 있다.
그래서 더 강한 힘을 지닌다.
나도 내 경험을 여러 각도에서 비틀어,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글을 쓰고 싶다.
16년의 현장 경험과 세 나라를 오간 삶 속에서,
우리 시대의 '허생'과 '아큐'를 찾아 써보려 한다.
'유전자'와 '이야기'는 공통점이 많다.
첫째, 세대를 뛰어넘는 전달성이다.
둘 다 그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정보를 전달한다면
이야기는 문화적 기억을 이어준다.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라, 복제 과정에서
발생한 변이를 통해 다양성이 추가된다.
둘째, '드러남'의 시간차 발생 가능성이다.
어떤 유전 형질은 잠복(潛伏)해 있다가 우연과 환경에 따라
다음 세대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이야기 또한 그렇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후대에 새롭게 재해석되고 재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생존 본능이다.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에는
생존 본능이 깊이 새겨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 기억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
또는 위대한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기억되길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름 흥미로운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글로 풀어내고 싶어 한다.
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그리고
더 올라가면 이야기꾼이셨던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유전학적으로 세포의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는
오직 모계로만 전해진다.
정자의 꼬리 부분에 집중된 미토콘드리아가
수정 과정에서 난자 속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성향 또한,
나의 외할머니를 거쳐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졌다.
지금 쓰고 있는 모든 글은 언젠가 꼭 쓰고 싶은
'자서전(自敍傳)'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나 자신에 대한(自)
펼쳐서 보여주는 이야기(敍)와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傳).
유전자처럼, 이 이야기들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시간에 발현되기를 바란다.
일본과 중국 모두 일반적으로 자서전을 자전(自傳)으로 부른다.
일본어는 自伝(じでん, 지덴)이다.
그럼 중국어의 올바른 발음은?
① 自传 [zìchuán, 쯔촨]
② 自传 [zìzhuàn, 쯔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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