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II
Disclaimer (면책조항):
이 글은 <역한 나의 인생> 연재글을 읽는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썼습니다.
저의 지금까지의 삶을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하는 글입니다.
물론 아직 책이 출간되지도 베스트셀러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래 작가 인터뷰는 100% 허구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경기도 판교의 한 커피숍에서 박성봉 작가(이하 박)를 만나,
『역(逆)한 나의 인생』 출간 후 주간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브런치 출판사' 마케팅 담당자(이하 브)가 함께했습니다.
브: 지난 몇 주간 작가님의 『역(逆)한 나의 인생』이 대형 서점 에세이 분야와
자기계발 분야에서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예상하셨나요?
박: 전혀요.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인데,
자기계발서 분야로 샤라웃(shout out)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처음 이 책을 쓸 때는 어디까지나 저의 경험과 생각을 엮은 에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미래를 바라보며, '이렇게 해봐라' 또는 '저렇게 고쳐봐라' 하잖아요.
그런데 제 책에는 '뒤돌아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저의 많은 경험담들과 여러 책들과의 의미 짓기가 담겨 있어요.
독자들이 그 부분을 신선하게 느끼신 것 같습니다.
특히 '작가만의 스토리텔링이 좋다'는 댓글과 반응이 많았는데, 그게 가장 기뻤습니다.
브: 이 글을 쓰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 2년 전,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큰 상실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만큼이나,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죠.
'잊힘'이 '잃음'이 될 수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죠.
할머니도 햇수로 100년을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시기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고 있었어요.
그리고 때마침 어디서 들었던 말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부모를 키운 건 첫째'라는 말에 꽂혀 역인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죠.
어머니와 저, 그리고 할머니,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위로 연결된 인연들의 사슬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이런 후행시력(hindsight)을 가지고 제 인생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제 인생을 관통하는 '역(逆)'으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의 키워드가 떠올랐습니다.
역인과, 역발상, 역류, 역설의도, 역전.
그리고 무작정 소주제를 뽑아 제목부터 달고 '이렇게 연재하겠다' 던졌죠.
초보 글쟁이인 제게 매 꼭지 5,000자 분량의 긴 글을 매주 연재하는 것은 엄청 힘들었어요.
그럼에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모든 창작활동을 위협하는 AI 때문이었습니다.
AI 기술이 발전한 미래를 상상해 봤어요.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 가족과 친구들은
제 디지털 트윈을 보며 저를 추모할 수도 있겠죠.
그들이 나의 영상과 음성을 완벽 복원한다고 해도
과연 내 생각과 철학까지 복제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줄글로 최대한 나를 많이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AI를 위한 학습 데이터로 말이죠.
그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360p가 아닌 4K 해상도로 나를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브: 작가님은 쓰시면서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나요?
박: 이 책을 쓰며 저와 비슷한 중년들과, 미래가 불안한 청년들을 가장 많이 떠올렸어요.
중년들은 생계에 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고,
요즘 청년들은 자기 한 몸 추스르기에도 벅차죠.
그래서 말하고 싶었어요.
지나간 과거의 일이나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들을,
일단은 판단중지(에포케, epoché)해놓고
AI가 학습하듯이 '어텐션 메커니즘'처럼
기록이든 기억으로든지 꽉 붙잡아 두라고요.
그것이 AI라는 문명사적 전환기에서 자신(self)과 인간성(humanity)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브: 작가님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박: 지금 반도체 S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어요.
빠른 연결성이 중요한 AI 데이터센터에 꼭 필요한 광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하는 부서입니다.
16년의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2019년 10월에 입사했으니 딱 6년이 되었네요.
첫 몇 달은 이전 회사 분위기와 많이 달라 힘들었죠.
제품 개발 일정이 빡빡했고 회의 분위기도 경직되어 있었죠.
'끈'으로 대변되는 사내 정치도 눈에 보였고
'굴러온 돌'인 저를 경계하는 분위기도 느꼈어요.
그러다 정말 힘든 날은 사무실 구석에 혼자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지요.
그러다 기회가 생겨 제가 공부해서 부서원들에게 세미나의 형식으로 강의를 했어요.
'배워서 남주자'라는 역발상이 오히려 저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를 주더라고요.
그러니 친한 동료들도 생기고 점점 일도 적응되고 덜 힘들게 되더라고요.
미국 회사생활과 가장 다른 것 중 하나가 저녁 회식이에요.
가정 중심인 미국에서는 회식은 주로 점심을 간단히 먹었던 것 같아요.
처음 몇 년간은 과도한 음주와 기름진 음식을 즐겨 했어요.
게다가 운동까지 하지 않으니 2년여 만에 10kg 정도 체중이 불었어요.
나이 탓도 있겠지만 체력이 달려 주말에는 온종일 소파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 당시 자주 겪었던 증상이 브레인 포그(brain fog)였어요.
분명 얼마 전 일인데 등장인물들 얼굴은 블러(blur) 처리한 것 같고
이야기 맥락을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많았어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죠.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달리기였습니다.
그 이후 3년 반 동안 약 1,200권의 책을 읽고,
매년 1,000km 이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시기인 것 같습니다.
브: 한국으로 이직하시기 전에 해외 생활이 길었다고 들었어요.
박: 네. 세어보니 총 16년을 해외에 있었습니다.
처음 장기 체류를 시작한 것은
카자흐스탄 알마티(Алматы)라는 도시입니다.
2002년 여름,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일 때
KOICA(한국국제협력단) 단원으로 파견되어
2년간 현지 대학에서 컴퓨터 강의를 했어요.
그때 배운 러시아어와 구소련 도시의 분위기는
이후 러시아 문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당시엔 관심 없이 지나간 일들이
현재의 독서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더라고요.
이것이 현재가 과거를 돕는 '역인과'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유학을 준비했지만 미국 대학은 모두 불합격했는데,
우연히 지원한 도쿄대 장학금 프로그램에 합격했어요.
2005년 가을, 일본 유학이 시작됐죠.
하지만 깐깐한 지도교수와 엄격한 연구실 분위기에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처음으로 공황 발작을 겪었습니다.
많은 공황장애 환우들이 그렇듯 병명을 알기 전까지 외래와 응급실을 전전했죠.
그때부터 20년 가까운 지금까지 공황은 제 오래된 친구(?)입니다.
그 일련의 경험을 통해 공포를 역으로 마주하는 '역설의도'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NTT에 입사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어를 전혀 못하던 아내를 위해
미국으로 이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0년, 하와이의 작은 반도체 스타트업으로 옮기면서 미국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마침 세계금융위기로 취업비자인 H-1B 쿼터(quota)가 빨리 소진되지 않아서
7월에 비자 인터뷰하고 바로 그해 10월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지금 같은 상황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이후 몇 번의 이직을 거쳐 마지막으로 인텔(Intel)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9년간 하와이, 남가주와 북가주를 옮겨다녔어요.
친구들이 "좋은 데만 골라 다닌다"고 부러워했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보셔서 아시겠지만 책에 자세히 쓰여진 대로고요.
브: 여러 언어를 구사하시는데, 특별한 외국어 공부 비결이 있을까요?
박: 아뇨 다시 말하면 제대로 하는 언어가 없다고도 할 수 있죠.
문제없이 소통 가능한 언어는 영어, 일본어 정도입니다.
요즘은 중국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영·일·중 4개 국어 자유롭게 쓰면서
강연이나 스탠드업 코미디하는 게 제 버킷리스트입니다.
예전부터 성대모사를 좋아해서 그런지 말의 리듬을 익히는 감각이 있던 것 같아요.
러시아어 문법은 배울 때 상당히 어려웠는데, 영어와 달리 '자격지심' 안 들었어요.
틀려도 개의치 않고 편하게 얘기하니 금방 늘었어요.
2년 동안 현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일상 대화는 문제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유학 준비하며 일본어를 배우니 아깝게도 러시아어는 금세 잊혀지더라고요.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같고 워낙 한자에 관심이 많던 터라 금방 늘었습니다.
3년쯤 지나자 "맞다. 박상, 한국 사람이었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영어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많아요.
한국인들에게는 평생의 숙제이자 자자손손 물려주는 부채 같은 존재죠.
카자흐스탄에서 영어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나의 영어 설명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들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요.
너무 창피해서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듣고 말하는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말 질리도록 돌려봤던 게 미국 시트콤 '프렌즈(Friends)'였어요.
최근에도 OTT에서 가끔씩 돌려보고 있습니다.
지금껏 전체 시즌(236개 에피소드)을 백 번은 넘게 봤을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자막 없이 들리기 시작했고
들었던 표현들이 자연스레 입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다른 미드와 영화들로 확장해갔죠.
물론 완전 원어민 같게는 못 하지만,
그렇다고 영어를 써야 할 때 쭈뼛거리거나 하진 않아요.
일례로 인텔에 있을 때 연말 파티 때 MC를 보기도 했습니다.
클리셰지만 정말 외국어 공부는 왕도가 없는 것 같아요.
목표 설정, 단어 암기, 시간 투자, 외국 친구, 누적 복습 등등등.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자신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치다 다쓰루(內田樹) 선생은 그의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외국어는 애초에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략)
자기를 외부로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어요.
외국어 자체를 '발화(發話)의 도구'가 아니라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건 어떨까요?
브: KOICA 파견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네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셨나요?
박: 네 맞아요. 인생의 분수령(分水嶺), 영어로 'watershed moment'였죠.
하지만 매우 충동적인 결정이었어요.
석사 졸업 후 박사 입학과 함께 전문연구요원이라고 학위를 하며
병역을 해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죠.
하지만 때마침 1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고 '유학을 가야겠다' 생각했죠.
하지만 병역 문제는 해결해야 했기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원했습니다.
남들은 편하게 가는 길을 무모하게 역류한 셈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30대 이후에 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저를 완전 모범생으로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대학생 시절 얘기를 하면 다들 깜짝 놀랍니다.
중·고등학교 때 오지 않았던 사춘기가 대학 1학년 때 온 것 같아요.
단발 머리로 길러 탈색을 하질 않나, 여름에는 망사티를 입고 다니질 않나,
매일이 술이고 나이트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1학년 두 학기 모두 학점이 1점대였죠.
그러다 차츰 나아져 2학년 땐 2점대, 3, 4학년 땐 3점대로 겨우 졸업했습니다.
석사과정 입학시험에서는 - 물론 학점 좋은 친구들은 특채로 여름에 다 뽑혔지만 -
50여 명 중 2등의 성적을 거뒀어요.
제가 뭔가 나중에 역전하는 스타일인가 봅니다.
브: 작가님 어린 시절이 궁금해요.
박: 완전 어릴 적 얘기를 부모님께 들어보면,
말이 늦고 말수도 적은 아이였지만 관찰력이 좋고 눈치 빠른 아이였대요.
대체로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잠깐 한눈판 사이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있더래요.
3살쯤인가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와 보니,
온몸엔 참기름 범벅을 하고 엄마 피임약을 까서 다 먹었더래요.
그래도 딸 낳고 잘 지내고 있으니 별 탈은 없었던 걸로.
초등학교 시절은 서울 구파발에서 북쪽으로 달려
북한산이 올려다보이는 송추라는 곳에서 자랐어요.
자연을 벗 삼아 맘껏 놀았던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불행하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4학년 때부터 부모님이 젖소 몇 마리를 키우셨는데,
우유를 납품해야 하니까 목장 이름이 필요했대요.
아버지께서 그냥 '성봉목장'으로 정했고,
모든 스테인리스 우유통엔 페인트로 '성봉'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죠.
그때 비닐하우스에 보온덮개로 덮어 내부 문 하나를 가운데 두고
반은 축사, 반은 생활 공간이었죠.
항상 소똥 냄새가 가시지 않았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똥 냄새는 기억나지 않아요.
추억은 항상 미화되는 걸까요?
초등학교 때는 반장을 도맡았지만 그렇게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6학년 봄소풍 장기자랑 때 당시 유행하던 '쓰리랑 부부'를
같은 반 여학생과 남녀 역할을 바꿔 연기했지요.
두 눈썹 사이에 검댕을 칠하고 몽둥이를 흔들며
순악질 여사의 "음매 기살어" 대사를 치니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죠.
그때부터 성격이 외향적인 무대체질로 변한 것 같아요.
이후로 많은 이벤트의 전문 MC로 활약했죠.
제 MBTI가 ENFJ인데 'E'는 거의 한두 문항 빼고 'E'로 나올 만큼
사람들 앞에서 에너지를 얻는 성격이죠.
제 여동생도 비슷한 성향인데, 이게 다 아버지보단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질인 것 같아요.
브: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누군가의 얘기가 기억이 납니다.
"과학이 있어야 달릴 수 있고,
예술이 있어야 멈출 수 있으며,
종교가 있어야 머무를 수 있다."
저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요.
"글쓰기를 해야 뒤로 갈 수 있다."
저마다의 창조성과 스토리텔링은 뒤를 돌아볼 때 무한히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AI는 하늘의 별자리에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지만,
결코 거기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뒤돌아보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언젠가 지면이 아닌 대면으로,
책이 아닌 무대에서 만나 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