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역인과 - 첫번째 이야기
· 과학자의 시선으로 복잡한 인과관계로 점철된 삶에 인식론적 접근 강조.
· 직선이나 순환도 아닌 '역류해 흐르는 시간'속에서 역인과에 천착하게 됨.
·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소설이 가장 강력한 방아쇠로 과거를 소환함을 깨달음.
· 딸 출생 후 "부모를 키운 건 첫째"라는 역설을 체득하며 미래가 현재를 추동.
나는 과학자다.
박사학위 논문은 반도체와 빛을 다루는 연구였다.
연구 방법론은 대체로 이렇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이나 모델을 세운다.
실험을 계획하고 데이터를 모은다.
마지막으로, 결과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 가설을 증명한다.
내 경험상 이 '관계 찾기'가 가장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었다.
관계에서 자주 혼동되는 개념이 있다.
상관관계(correlation)와 인과관계(causality)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두 사건 A와 B가 함께 변하는 패턴을 보인다면,
"A와 B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A가 B를 일으키는 원인임이 확인되어야만,
비로소 "A와 B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과관계는 상관관계보다 훨씬 강한 조건을 요구하며,
모든 인과관계는 상관관계를 포함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1) 비인과성 상관관계: A와 B가 함께 변하지만 서로의 원인은 아님.
2) 일방향 인과관계: A가 B를 일으키지만, B는 A를 일으키지 않음.
3) 양방향 인과관계: A가 B를 일으키고, B도 A를 일으킴.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예를 들면,
1) 비인과성 상관관계:
"부모의 에어컨 전기요금이 오르니 자녀의 아이스크림 섭취량도 늘었다."
→ 여름이라는 숨은 원인이 두 현상을 동시에 일으킴.
2) 일방향 인과관계:
"부모가 각각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 자녀는 이중언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자녀가 이중언어를 구사해도 부모의 언어 사용에는 영향을 주지 않음.
3) 양방향 인과관계:
"책을 많이 읽는 부모의 자녀는 학습능력이 올라간다."
→ 부모의 독서하는 모습을 보고 자녀의 학습욕구가 상승함.
→ 더 많은 질문을 하는 자녀 때문에 부모는 더 많은 책을 읽게 됨.
→ 결국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일어나 서로를 강화하며 동반 상승함.
물론 앞서 말한 3)번의 경우는 나의 희망을 담은 예시다.
실제 양육에서는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이 훨씬 많이 관찰된다.
나는 16년 동안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를 모아 관계를 찾는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로 실험을 해도 희미한 상관관계조차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운 좋게 상관관계를 발견해도, 진짜 원인을 찾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은 특성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불량이 해결될 때까지,
그리고 원하는 수율에 도달할 때까지 '실험의 지옥'에 빠진다.
그래서 업계에 "외계인을 고문한다"는 괴소문이 도는 것일까?
하지만 리더들은 다그치며 말한다.
"실리콘(반도체의 원재료)은 거짓말을 안 한다."
나는 속으로 '말은 쉽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들의 말이 옳다.
고민하며 실험을 지속하다보면 언젠가 문제는 풀려있다.
그러나 인생에서 마주하는 문제는 다르다.
인과관계를 찾기가 훨씬 어렵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더해지고, 양방향 인과관계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역인과성(reverse causality) 같은 역설적 현상까지 나타난다.
우선 존재론과 인식론을 분리해보자.
존재론이 지배하는 물리법칙 안에서 인과율은 언제나 참이다.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는 인과율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복잡한 현실을 아직 따라가지 못하는 것뿐이다.
결국 삶에서의 인과는 인식론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리학에서 유명한 '역인과의 역설' 하나를 소개한다.
빛은 서로 다른 매질의 경계면에서 꺾인다.
이를 빛의 '굴절'이라고 한다.
17세기 프랑스 물리학자 페르마(Pierre de Fermat)는
'최소 시간의 원리(principle of least time)'를 제안했다.
빛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 가장 짧은 '거리'가 아니라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택한다'는 표현이 묘하다.
마치 빛이 의도를 갖고 경계면에서 입사각을 조절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자.
나는 10km를 뛰는 데 50분이 걸린다.
수영장에서 50분 동안 2.2km 정도를 헤엄친다.
즉, 달리기가 수영보다 다섯 배 정도 빠르다.
만약 저 멀리 물에 빠진 조난자를 발견한다면, 나는 어떻게 움직일까?
촌각을 다투는 순간, '최단 거리'가 아니라 '최소 시간'을 본능적으로 계산해
해변을 달려 대각선으로 뛰어든 뒤 헤엄쳐 갈 것이다.
그러나 빛의 이동은 다르다.
나는 의도를 갖고 결정을 내리지만, 빛은 아무런 의식도 목적도 없다.
그럼에도 빛이 '최소 시간' 경로로 움직이는 것은
빛의 파동성으로 설명된다.
이런 '빛의 역설'은 과학을 넘어 창작에도 영감을 주었다.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컨택트(Arrival)>가 이 개념을 모티프로 삼았다.
인류는 언제부터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했을까.
맥박이 뛰는 리듬, 해가 뜨고 지는 주기, 달의 차고 이지러짐, 계절의 순환.
처음에는 자연의 리듬에서 시간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추상적인 '시간' 개념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을 바라보는 문화적 차이다.
기독교 전통의 서양은 시간을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으로 인식했다.
반면 동양은 달의 위상이나 계절의 순환처럼
시간 역시 되돌아오고 반복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의 시간관(觀)은 20대 어느 날 들은 한 설교로 크게 흔들렸다.
목사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11권을 인용하며 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래의 한 시점에서 새까맣게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가 지금의 나와 충돌합니다.
그리고 그 파도는 빠르게 과거로 흘러가 2000년 전 십자가 현장을 지나가고,
다윗과 여호수아, 모세와 아브라함을 거쳐 천지창조의 순간으로 수렴합니다."
직선도 순환도 아닌, '역류하는 시간'.
나의 '역인과'에 대한 천착은 그 설교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는 역인과는,
미래가 현재를 추동하고 현재가 과거를 다시 쓰는 과정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인지적 착각일 수 있다.
선후(先後)가 있는 양방향 인과관계의 특정 순간을 포착하면,
마치 과거가 현재를, 혹은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부모의 독서가 아이의 학습력을 높이지만,
아이의 학습이 부모로 하여금 책을 더 읽게도 한다.
마치 아이가 부모를 가르치는 듯한 착각.
하지만 이 착각조차 우리 삶의 관점과 태도, 에너지를 바꾸기에 충분하다.
몇 년 전 브레인 포그(brain fog)를 심하게 겪었다.
특히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최근 시작한 독서와 달리기로 이런 현상은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내 인생 최고의 '몸 상태', '마음 상태'에 이르렀다.
이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이렇다.
① 장기기억으로 전환된 과거 사건은 뇌 속 어딘가 저장되어 있다. 지금 당장 꺼내지 못할 뿐이다.
② 완전히 잊혔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특정한 맥락이나 '방아쇠(trigger)'를 만나면 되살아난다.
③ 나에게 가장 강력한 방아쇠는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었다.
나의 독서기(記)를 복기(復棋)하면 처음엔 자기계발서나 사회·자연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러다 개인적 경험과 생각이 담긴 에세이에 푹 빠졌다.
하지만 전체를 종합해 보면 고전을 포함한 소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내가 작품 수로 가장 많이 읽은 소설가는 단연 박완서 작가다.
그녀의 여러 소설-『도시의 흉년』, 『서 있는 여자』 등-에는
1970년대 서울의 풍경과 당시의 생활상이 녹아 있다.
그 소설의 여러 대목이 내가 살았던 80년대 경기도 송추의 이곳저곳,
나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70년대 창경궁 근처를 걷는 장면에서
당시 송추에서 흔하게 보던, 마름모 화강암을 조각보처럼 엮어놓은 담벼락이
40년이 지나 지금 떠올라지는 것.
그것이 실제 기억인지, 소설이 재창조해낸 기억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게 되살아난 '진실'이었다.
또 하나의 최근 경험은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의 『키친』을 읽을 때였다.
소설 속 트랜스젠더 인물 '에리코'의 묘사를 읽으며
일본 유학 시절 TV에서 보던 여장 남자 연예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인물이 소설을 통해 소환되었다.
조곤조곤한 말투와 눈부신 금발.
하지만 그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오랜 검색 끝에 그는 미와 아키히로(美輪明宏)였다.
'맞다. 그가 맞다.'
나는 인터넷에서 그의 사진과 다양한 영상을 탐닉했다.
'일본어를 배운 게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며 귀한 옛 영상을 그의 육성으로 이해하며 감상했다.
그러다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또 미시마의 1969년 5월,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도쿄대 점거 당시 사진도.
강의실 앞에서 학생들과 대치하며 강한 눈빛으로 청중을 노려보는 미시마.
이 사진이 찍히기 몇 달 전에는 도쿄대의 상징인 야스다(安田) 강당이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순간 또 유학 시절 매일 지나치던 야스다 강당의 풍경이 겹쳐지며,
현재의 사건과 내가 경험하지 못한 먼 과거,
그리고 내가 겪은 가까운 과거가 서로의 파문을 증폭시키듯 교차하기 시작했다.
이 두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됐다.
우리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독서 경험이 과거의 기억을 깨우고, 그 과거는 다시 현재를 풍요롭게 만든다.
미래가 현재를 기억하게 하고, 현재가 과거를 다시 쓰게 한다.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는
나에게 '그럴 수 있다'로 답해온다.
아이의 호기심이 부모를 똑똑하게 하고,
첫째가 부모를 키워내는 일.
이것이 내가 독서와 기억, 그리고 삶을 관통하며 얻은 메시지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역인과'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 동안 '부모를 키운 건 첫째'라는 말에 골몰했다.
첫째 아이는 분명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부모의 손길 속에서 자란다.
원인과 결과로 보면, 부모가 원인이고 아이는 결과다.
태어나자마자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어린아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춘기.
경쟁 속에서 자기 몫 하나 해내기 어려운 청년.
그들은 결코 부모를 길러낼 수 없다.
첫째를 키운 건 부모가 맞다.
그러나 2016년 10월 이후,
이 역설을 나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 딸 하윤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7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하며 지쳐갔다.
시험관 시술(IVF)을 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난임 클리닉을 찾았다.
나는 검사와 시편 채취만 하고 다시 미국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아내는 홀로 힘겨운 과정을 견뎌냈다.
두 번의 유산 끝에 마침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임산부 항공기 탑승 한계선인 32주 차에 아내는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동안 몸이 무거운 아내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나는 집안 여기저기를 직접 손봤다.
10월의 어느 날 하윤이는 큰 울음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그날 오후 교회 사모님이 미역국을 끓여 병원에 오셨다.
사모님을 마중하러 야외 주차장으로 나가는데,
선명하고 둥글게 말린 무지개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당시 살던 북가주 새너제이(San Jose)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우기(雨期)다.
지리한 장맛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고 하루에 몇 번 흩뿌리는 비다.
그렇다고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어폰으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들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사모님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기 전까지.
그날 이후 하윤이는 우리 부부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이에게 길러지고 있었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끔 어른이 되는 게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장면들—
하윤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습,
대학을 나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모습,
여드름을 고민하는 중·고등학생 시절
—이 현재의 나를 깨우고 다시 일어날 힘을 준다.
(딸아, 결혼하지 않아도 좋고, 자식 없어도 된다.
대학도 꼭 가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여드름은 절대 손으로 짜지 마라.)
이렇게 나의 현재를 추동하는 미래의 장면들은
지금의 나를 통과하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50년 전, 막 태어난 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방문 밖에서 첫째 아들 출생을 흐뭇해하시는 아버지.
그로부터 25년 전, 먼저 두 사내 자식이 태어나고
기다리던 큰딸이 태어나 살림밑천(?)이라며 좋아하시는 할머니.
이렇게 새로운 관계의 탄생은 프랙탈(fractal)처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시간의 파문들이 지금 여기에서 겹치고 메아리쳐 지금의 나를 움직인다.
빛은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간다.
그것이 '최소 시간의 원리'다.
우리가 보는 무지개도 이 법칙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리 조상들은 무지개를 다섯 가지 색으로 나누어 불렀고,
서양 사람들은 일곱 가지 색으로 나누어 불렀다.
하지만 사실 무지개는 태양빛의 스펙트럼, 셀 수 없이 많은 색의 연속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한된 눈으로
그리고 익숙한 언어로 무지개의 색을 가르고 이름 붙인다.
중요한 것은 현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다.
무지개는 우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딱 그만큼 물러서며 결코 잡히지 않는다.
닿을 수 없기에 그리고 곧 사라지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은 그 기억을 불러온다.
기억을 잡으면 역인과를 경험한다.
역인과는 지금 나에게 일어날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