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역인과 - 두번째 이야기
· 카자흐스탄에서 보낸 2년, 의미 해석은 뒤로하고 일단 '입력'에 충실.
· 그때 배운 러시아어 체계가 20년 뒤 문학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됨.
· 무심히 지나친 고려인 역사가 뒤늦게 1937년으로 역행하며 재구성됨.
· 잃어버린 사진보다 선명하게, 지금의 읽기와 쓰기가 기억을 새롭게 창조.
2002년 7월,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한여름 햇볕처럼 뜨거웠다.
나는 카자흐스탄 알마티행 비행기에 올랐다.
KOICA, 한국국제협력단 협력요원으로 복무를 시작하면서였다.
출국 3개월 전부터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합숙 훈련을 받았다.
러시아어 알파벳은 키릴 문자다.
키릴 문자에는 우리 종성 이응, 'ㅇ', 영어 '-ng'에 해당하는 소리가 없다.
대신 '은그' /нг/로 써야 한다.
따라서 내 이름은 '빡손그본그'(Пак Сонг Бонг)가 됐다.
발음이 뭔가 '송구'스럽고, '봉구'스럽다.
선생님은 모든 단원에게 현지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대신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주셨다.
내 이름은 세르게이(Сергей).
줄여 부르는 애칭은 세료쟈(Серёжа).
언젠가 들어봤던 이름이 입에 착 붙는 게 마음에 들었다.
러시아 문학 작품은 한국인에게 큰 도전이다.
방대한 서사에 등장인물도 많아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다.
게다가 같은 인물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니 헷갈린다.
남성 이름 드미트리(Дмитрий)는
디마(Дима)라고도 하고 미챠(Митя)라고도 한다.
영어 이름 William을 Will 또는 Bill로 부르듯이.
애칭만큼 어려운 게 부칭(父稱), 오체스트바(отчество)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형태다.
남자에게는 아버지 이름에 -ович(-오비치), 여자에게는 -овна(-오브나)가 붙는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첫째는
드미트리 카라마조프(Дмитрий Карамазов)다.
그는 '미챠'로도 불리고, 아버지 '표도르'의 부칭을 붙여 '드미트리 표도로비치'라고도 불린다.
내가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면 모두 나를 '성봉 도혀노비치'로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2년간 짧은 카자흐스탄에서의 경험이
20년도 더 지나 나의 문학 감상과 인식 확장의
마중물이 되어줄 거라고는 당시엔 상상도 못 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데드하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지도와 사랑에 빠지면 인생을 조지게 된다."
나는 어릴 적 부터 지도와 사랑에 빠졌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 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회과 부도는 나의 초등학교 때 최고의 교과서였고,
세계 나라의 수도 이름 알아맞히기는 최애 게임이었다.
당시의 지도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들, 분리 또는 확장된 신생 국가들,
심지어 지도 뒤 부록에 나온 기후와 식생도 많이 달라졌다.
소비에트 연방, 줄여서 소련이라는 국가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었다.
그중 내 이목을 끈 곳은 단연 카스피해였다.
한반도가 쏙 들어갈 만큼 큰 내해(內海).
'물 맛은 짤까?, 수평선이 보일까? 파도는 칠까?'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카스피해를 끼고 있는 카자흐스탄에 간다니.
배정받은 날부터 설렜다.
내가 부임한 알마티는 소련 시절부터 독립(1991) 후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였다.
지금은 북쪽 아스타나로 수도가 옮겨갔지만, 여전히 그 나라의 최대 도시다.
천산산맥의 품에 안긴 알마티는 사과를 뜻하는 카자흐어 알마(Алма)에서 나왔다.
한여름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은,
남쪽으로 3000m의 만년설이 올려다보이고,
높고 푸른 가로수가 낮은 벽돌 건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차분한 유럽 소도시 같았다.
알마티는 봄과 가을은 짧지만 4계절이 뚜렷하여 지내기 좋은 기후다.
여름은 30도를 넘지만 습도가 낮아 나름 쾌적하고,
겨울에는 영하 15도까지 내려가지만 삭풍(朔風)이 불지 않아 견딜 만했다.
분지 지형이라 바람이 세지 않아 눈이 내릴 때는
큰 눈송이가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게 낭만적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져온 옷으로 사계절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바람이 안 불 뿐이지 기온은 낮아, 추운 겨울에는 모자가 필수다.
현지인들은 멋진 샤프카(шапка, 털모자)를 쓰고 다녔다.
나도 하나 사고 싶었지만 디자인도 부담스러울 뿐더러 머리 눌리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높은 가격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냥 목도리를 머리에 둘둘 말고 다녔다.
외교부가 알면 곤란하겠지만 매달 지급되는 생활비는 매우 풍족했다.
거의 한두 끼는 꼭 현지 식당에서 먹었다.
러시아 하면 빨간 보르쉬(борщ) 수프가 유명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것은 솔랸카(солянка).
우리나라 부대찌개처럼 고기와 햄이 많이 들어있고 빨갛지만 맵지 않은 수프다.
걸쭉한 국물에 레몬 한 조각을 짜 넣으면
새콤함이 더해져 느끼함이 싹 가신다.
백미는 국물위에 올라간 사워크림인데,
이를 국물과 잘 섞으면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먹는 것만 놓고 보면 확실히 코스모폴리탄이다.
동료 한국 단원들이 좋아하지 않던 양고기 꼬치 샤슐릭(шашлык)에
고수보다 약간 난이도가 높은 우쿠롭(укроп, 딜) 허브를 듬뿍 얹어 먹었다.
내가 근무했던 대학교 교직원 사무실엔 나를 제외하고 모두 중년 여성분들이었다.
그분들과 오후가 되면 티타임을 가졌다.
우유, 설탕, 레몬 등 취향에 맞춰 따뜻한 여러 종류의 홍차를 즐겼다.
러시아어가 서툴러도 대화에 항상 끼워주시던 친절하신 분들.
내가 엉뚱한 농담을 하면
"Ты чё? (띠 쵸?, 너 뭐야)" 하며 '쯧' 혀 차는 소리를 냈다.
혀를 차는 것은 한국에서는 강한 불만을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그들에겐 귀엽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 사모바르(самовар, 러시아식 전통 끓임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당시엔 이름도 용도도 몰랐는데 나중에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아 그게 이거였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산 곳은 알마티 시내에서도 좋은 동네였지만
방 두 개 아파트 월세가 250불 정도로 적당했다.
모든 세간이 갖쳐줘 있어 몸만 들어갔다.
도시의 대부분은 70~80년대 지은 소련식 아파트(квартира, 크바르찌라)였다.
비슷한 외관에 회색 콘크리트 외벽이라 처음에는 삭막했지만 차차 익숙해져 갔다.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우쉬토베(Уштобе)에서 며칠 머문 적이 있는데,
그쪽은 단독주택이 많고 고려인들은 그것을 '땅집'이라고 불렀다.
정겨운 이름 속에는 '땅'을 찾아 간도와 연해주로 옮긴 백성들이
동토의 중앙아시아로 이주되고 또 그곳에서 '땅'을 일궈 낸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소련 시대부터 길 이름은 의미 있는 단어나 유명인에
아(-а) 또는 야(-я)를 붙여 부른다.
길(улица, 울리차)이 여성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니나(Ленина), 가가리나(Гагарина) 등등.
당시 알마티는 지금의 '우버'처럼 일반 승용차가 택시 서비스를 했다.
알마티는 1911년 대지진 이후 길이 격자형으로 정비되어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대개 길의 교차로가 되었다.
택시를 타면 "가가리나-레니나 500텐게(тенге, 화폐 단위)",
기사가 오케이하면 타고, 아니면 다음 차를 기다렸다.
술에 대해서도 여러 추억이 많다.
고위도라 여름엔 밤 11시까지 해가 지지 않았다.
현지 친구들과 노천 펍에서 늦게까지 맥주를 먹던 기억이 난다.
술안주로 많이 먹던 것이 우리의 팬케이크보다 얇은 블린(блины)이다.
블린을 굽다 하도 구멍을 많이 내서
'블린'이 우리말의 '제기랄' 정도의 욕이 된다는 것도 재밌었다.
맥주도 맥주지만 당연히 보드카와 코냑도 많이 마셨다.
겨울 보드카에 얽힌 표현들이 재밌다.
돈이 없어 샤프카(털모자)의 짭조름한 냄새를 안주 삼았다는 둥,
자작나무 흰 줄기를 여인의 살결로 오해하고 끌어안고 잠들다 동사한다는 둥.
현지인들과의 음주에서 과음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건배사(тост, 토스트) 때문이다.
한 명씩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 그때마다 술잔을 비워야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최근 달리기를 하기 전까지 20여 년 중등도 지방간을 달고 살았다.
이런 구소련의 의식주에 대해 궁금하다면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를 추천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방영되는 <나 홀로 집에>, <러브 액츄얼리>처럼
소련의 연말연시 단골 영화였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한 한 남자를 친구들이 오해해서
원래 목적지인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에 태운다.
술에 취한채 택시를 잡아 같은 주소로 가니 같은 구조의 아파트가 있다.
호수를 찾아가 아무 의심 없이 열쇠를 돌렸는데 그만 자물쇠가 열린다.
(스포 방지를 위해 여기까지)
우연과 우연(또는 운명)이 겹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이면서도
허술했던 전체주의 소련 체제를 비꼬는 로맨틱 블랙 코미디이다.
내 인생에도 우연과 우연이 겹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맞닿는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현재에 의해 재구성되는 역인과.
그리고 다시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메기고 받는' 인식의 상승작용을 이야기하려 한다.
러시아어 문법은 복잡하다.
6개의 격(格)이 남성·여성·중성·복수(4개)에 따라 24가지 어미 변화를 외워야 한다.
이러한 언어를 '굴절어'라고 한다.
참고로 한국어/일본어는 조사가 붙는 교착어, 중국어는 고립어다.
굴절어는 문법이 복잡한 반면 어순이 자유로워,
영어 어순이 어려운 한국 사람들에게는 도치법이 가능해 약간 더 편하다.
'나는 너를 사랑해'도 되고 '너를 나는 사랑해'도 말이 통한다.
특히 2인칭 대명사가 특이하다.
'너'를 뜻하는 'ты(띄)'와 '당신'을 뜻하는 'вы(븨)'.
문법적으로는 단수와 복수지만,
실제로는 친밀함과 존중의 거리를 나타낸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무조건 '븨'를 쓰지만,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띄'를 써도 된다.
재작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을 때,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클라브디아 쇼샤에게 du(너)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독일어에서 du(너)와 Sie(당신)의 전환은 관계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어 경험이 없었다면 호칭의 미묘한 차이를 어찌 알았을까?
알마티의 한 현지 교회에서 예배 중에 다같이
스크린을 보며 찬양을 부를 때의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예수를 높여 '당신'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도 '이에스사마(イエス様)'라고 불러 높인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예수를 '당신'이 아니라 '너'라고 불렀다.
그만큼 은밀한 것까지 모두 공유하는 친근한 사이이기 때문이란다.
새로운 외국어는 나를 표현하는 도구이기 전에,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틀로 작용한다.
지금 세계 여러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런 나의 경험 덕분이 아닐까?
우쉬토베는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 이주된 첫 장소다.
알마티에서 가까워 친한 동료를 만나러 몇 번 갔다.
그때는 고려인의 역사를 막연하게만 알았고,
'많은 고려인들이 사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며 뒤늦게 이해했다.
(소설 속 기차의 종착역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다.)
연해주 고려인들이 하루아침에 화물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던져졌다.
집도 없이, 땅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채.
그곳에서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살아남았다.
추운 첫 겨울을 움막에서 버티고 이듬해 봄이 되어 벼농사를 시작한 강한 생활력.
그곳이 역사의 현장이었지만, 당시 나의 역사 의식은 이를 인식하기에 너무 부족했다.
현재의 독서가 2002년의 경험을 거쳐 1937년 강제 이주로 역행하며 역사를 재구성한다.
또 한 번은 크즐오르다(Кызылорда)를 방문했다.
여름이라 덥고 모기가 많아 불만이었다.
그 와중에 허술하게 관리된 묘지를 방문했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였다.
역사책에 등장해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떠난 지 78년 만이었다.
하지만 이 뉴스도 나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난 정권에서 육사의 홍범도 장군 동상을 철거하는 이슈가 터지면서
그제야 '내가 카자흐스탄의 그 소도시에서 방문한 곳이 그분의 묘지였구나' 깨닫게 되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스쳐 지나간 골목, 무심코 앉았던 벤치 어딘가에.
하지만 스물여덟 살의 나는 그걸 읽어낼 능력이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늦었지만 안다.
그때는 몰랐어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이 구슬 꿰듯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는 것을.
영어 표현 "been there, done that"은 직역하면
"거기 가 봤고, 그거 해 봤다"는 뜻이다.
"뻔하다, 식상하다"는 뉘앙스로도 쓰이고,
"나도 다 겪어 봐서 너를 다 이해한다"고 위로할 때도 쓰인다.
우리는 얼마나 여기와 지금(here & now),
그리고 눈앞의 이것(this)에 집중하는가?
There, then, that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인생의 어느 순간 한 경험은
머리로 아는 것보다, 책으로 읽은 것보다 값지다.
불행히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찍었던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
200만 화소 똑딱이 카메라로 담았던
천산산맥의 설경, 알마티 거리의 풍경, 친구들의 얼굴.
하드 디스크에 저장했다가 CD로 구워 놨는데,
이 CD를 '잃어버리면서' 나의 모든 기억도 '잊힐 거라고' 절망했었다.
(방송인 '썬킴'의 표현을 빌리자면 CD를 '굽는다'는
표현을 아는 분은 올해 꼭 건강 검진을 받기 바란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묘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진보다 더 선명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아니, '되살아난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고 해야 맞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을 때,
라스콜리니코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좁은 골목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는 알마티의 구시가지를 본다.
소련식 아파트 사이로 난 골목길, 갈라진 아스팔트, 심지어 그때 맡았던 냄새까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농장 일을 하는 장면에선
우쉬토베의 광활한 대지가 떠오른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밀밭, 바람에 일렁이는 밀의 물결.
하버드 대학의 신경과학자 대니얼 샥터(Daniel Schacter)의 연구에 따르면,
과거를 기억할 때와 미래를 상상할 때 사용하는 뇌 부위가 거의 같다고 한다.
기억과 상상은 같은 인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나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하고, 재창조하고 있다.
2002년의 경험이 2025년의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고,
2025년의 독서가 2002년의 경험에 깊이를 더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거기 가 봤고(been there), 그거 해 봤기(done that) 때문이다.
그 경험은 사진이 없어도 내 안에 언어로, 감각으로, 정서로 남아 있다.
경험은 시간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음파와 같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공명하며,
그 울림은 매번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사진이 사라진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픽셀로 고정된 이미지는 단 하나의 해석만을 허락하지만,
기억은 매번 다르게 되살아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니까.
과거가 현재를 역인과하여, 오늘의 내가 어제의 의미를 다시 쓴다.
그렇게 삶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재해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