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지'하면 '든지'한다

1부 역인과 - 세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동아시아 시간관은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로 뒷걸음질 치는 형상.
· '던지'(반추)를 철저히 해야 '든지'(선택)를 제대로 할 수 있음.
· 과거 반추로 만든 기준점이 미래 외삽의 방향을 결정함.
· 우연들을 되짚으면 필연의 서사가 되고 미래완료형 행복 가능


앞과 뒤, 시간과 공간이 만날 때


"앞을 보니 아플 팔자, 뒤를 보니 뒤질 팔자,

관상을 보니 관 속에 들어갈 팔자로다."


예전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뻔한 말장난인데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앞과 뒤, 그리고 관 속’이라는 공간의 개념이

‘팔자(八字)’라는 시간과 합쳐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시간을 떠올릴 때 무의식적으로 공간을 끌어들인다.

“앞날이 창창하다”, “뒤늦게 후회한다”, “과거를 돌아본다”.

물리학도 정의하기 어려운 시간을 익숙한 공간의 언어로 빌려 표현하는 것,

인지언어학에서는 이를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라 부른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이미 과거를 앞에 두고 미래를 향해 아래로 조심조심 내려가는 형상, 서양은 미래를 마주보고 앞으로 걸어가는 형상.


흥미롭게도 한·중·일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비슷하게 인식한다.

지난 일은 ‘앞 전(前)’, 다가올 날은 ‘뒤 후(後)’다.

중국어의 그저께는 前天(qiántiān), 모레는 後天(hòutiān)이다.

일본어도 전날은 前日(젠지쓰), 훗날은 後日(고지쓰)라 한다.

더 재미있는 건 상하(上下) 개념이다.

중국어에서 지난주는 上週(shàng zhōu),

다음 주는 下週(xià zhōu)다.

‘위(上)’가 과거, ‘아래(下)’가 미래다.

한국어에도 “윗대 어른”, “아랫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듯

시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따라서 동아시아적 시간관 속 인간의 자세를 상상하면 이렇다.

우리는 과거를 마주 본 채,

미래라는 내리막길을 뒷걸음질 치며 내려간다.

눈앞에는 이미 일어난 일들이 펼쳐져 있고,

등 뒤에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미국에서 일할 때 이런 차이로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발표 중 누군가 “Could you go up?”이라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위쪽 슬라이드’, 즉 이전 장으로 돌아갔다.

내 인식 체계에서 위(上)는 곧 과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인 동료에게 ‘up’은 숫자가 올라가는 방향,

즉 다음 장(미래)을 뜻했다.

흥미롭게도 중국 출신 엔지니어들은 나와 비슷하게

‘up’을 이전 장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앞으로는 헷갈리니 ‘next’나 ‘previous’로 명확히 말하자”며 웃어넘겼다.

문화가 다르면 ‘위’와 ‘아래’조차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킨다.


슬라이드 발표할 때 up & down의 헷갈림, 구체적으로 next 또는 previous page라도 말하면 될 것을...


최근 역인과에 대한 글을 쓰며 새로운 인식 체계를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적 사고의 영향인지,

나에게 “앞을 보라”는 말은 곧 “과거를 보라”는 뜻이 되었다.

서양 심리학은 과거를 배경(background)으로 밀어내고

“Move on”하라며 현재를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를 전경(foreground)으로 끌어오려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역인과(逆因果)’다.

이 글은 과거를 보는 ‘던지’에 멈추지 않고,

이를 통해 올바른 선택인 ‘든지’로 나아가는 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던지' vs '...든지'


"왜 그런 선택을 했던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떠나든지 남든지, 이제는 네가 결정할 차례야."


우리는 이 두 어미(語尾)를 흔히 혼용하지만,

그 속에 담긴 시간의 방향은 명확히 다르다.

사전적으로 ‘-던지’는 과거의 회상이고,

‘-든지’는 미래의 선택이다.

이를 인생에 대입하면 ‘던지’는 지나온 길을 복기하는 일이고,

‘든지’는 나아갈 길을 고르는 결단이다.

우리 삶은 무엇을 먹든지, 누구를 사랑하든지 끊임없이 결정해야 하는 ‘든지’의 연속이다.

하지만 미래를 향한 그 수많은 ‘든지’의 해답은, 언제나 지나온 시간인 ‘던지’ 속에 숨어 있다.


선택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과거에 있다.

그러나 같은 과거를 겪고도 누군가는 실패를 반복하고,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간다.

직장을 옮겨도 비슷한 사람과 갈등을 빚고,

연인을 바꿔도 똑같은 이유로 이별하곤 한다.

이는 ‘던지’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채 성급히 ‘든지’ 앞에 섰기 때문이다.

과거를 치열하게 복기하지 않은 선택은 뿌리가 없다.

근거가 빈약하기에 쉽게 흔들리고,

시간이 지나면 왜 그 길을 택했는지조차 잊게 된다.


'던지'하면 '든지'할 수 있는데, '던지'는 그냥 '회상'이 아닌 적극적인 '반추'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회상(回想)’과 ‘반추(反芻)’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대부분은 “옛날 생각 좀 했다”며 감상에 젖는 회상에 그친다.

이는 과거를 잠시 꺼내어 얕은 감정만 덧입히고 다시 덮어두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한 ‘던지’는 소가 여물을 되새기듯 씹고 또 씹는 적극적인 ‘반추’여야 한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집요하게 묻는 분석의 과정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그 시절을 냉정히 해부할 때,

내 욕망과 두려움의 패턴이 비로소 드러난다.


충분한 ‘던지’가 선행될 때, ‘든지’는 고민의 대상이 아닌 필연의 결과가 된다.

과거를 통해 자신만의 기준점을 세운 사람은 선택 앞에서 확신을 갖는다.

치열한 반추로 과거가 정리되면, 수많은 선택지 중 내가 가야 할 길은 선명해진다.

미래는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축적된 과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는 정직한 발걸음이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한다.

과거를 묻는 ‘던지’를 철저히 파고든 사람만이,

미래를 택하는 ‘든지’ 앞에서 온전한 나로서 결정할 수 있다.


된장은 외삽


과학에서 데이터를 다룰 때는 두 가지 개념을 쓴다.

내삽(interpolation)은 이미 알고 있는 지점 사이를 추정하는 것이고,

외삽(extrapolation)은 알고 있는 범위 밖을 예측하는 것이다.

내삽은 비교적 안전하다.

측정값 A와 B가 있다면 그 사이를 추정하는 일은 크게 틀릴 위험이 없다.

대략 산술평균에 가까운 값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을 지배하는 질문들은 대부분 외삽의 영역이다.

주식, 수명, 기후, 부동산처럼 우리가 정말 궁금해하는 미래는

모두 경험해 본 적 없는 ‘범위 밖’에 있다.

과거의 패턴을 연장해 아직 오지 않은 지점을 그려보는 것, 이 모든 게 외삽이다.


내삽과 외삽의 개념을 일본과 한국의 대표 음식과 비교, 김밥 vs 된장.


이 개념을 한국과 일본의 음식 문화에 적용해보면 흥미롭다.

일본은 김밥(노리마키)의 나라다.

재료는 다양해도 김으로 단단히 말아내면 모양이 일정하다.

어디를 잘라도 단면의 패턴은 반복된다.

예측 가능한 구조와 통일된 형태, 김밥은 내삽의 음식이다.

두 점의 단면을 확인하면 그 중간의 모양은 누구나 맞힐 수 있다.


반면 한국은 된장과 탕(湯)의 나라다.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이거나 발효시킨다.

지금 갓 담근 장맛을 보며 한 달 뒤, 일 년 뒤의 맛을 짐작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며 맛은 깊어지고 변하고 숙성된다.

장독대의 된장이나 푹 고아낸 곰탕은 외삽의 음식이다.

현재의 상태와 변화의 속도를 감각적으로 읽어

아직 오지 않은 맛을 미리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AI라 부르는 기술의 본질도 결국 외삽이다.

과거의 데이터에서 패턴을 추출해 미지의 결과값을 내놓는다.

학습한 데이터의 울타리를 넘어 추론하는 힘이다.

우리 역시 매일 외삽을 하며 산다.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이 관계를 유지하면 5년 후 우리는 행복할까?”

이 질문들은 모두 현재와 과거라는 점을 이어,

미래라는 허공에 선을 긋는 행위다.


문제는 외삽의 성패가 ‘기준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기준점을 잘못 잡으면 그래프는 그럴싸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예측이 나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어설프게 회상하면 현재를 오독하고,

결국 미래를 엉뚱한 방향으로 외삽하게 된다.

“나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잘될 거야.”

이 말은 위험한 외삽이다.

그것은 예측이 아니라 막연한 기원일 뿐이다.

노력의 벡터가 어디를 향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같은 자리를 맴돌 수 있다.

‘열심히’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다.

잘못된 방향으로 속도를 높이면 목적지에서 더 빠르게 멀어질 뿐이다.


반대로 과거를 집요하게 반추해 기준점을 수정하면 인생의 예상도가 바뀐다.

“나는 늘 안전을 핑계로 회피를 선택했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음 선택 앞에서 우리는 멈칫하게 된다.

“이번에도 또 그렇게 도망칠 건가?”

바로 이 지점이다.

과거의 ‘던지’가 미래의 ‘든지’를 바꾸는 순간은.

기준점이 수정되면 외삽의 궤적이 달라진다.

지금까지와 같은 속도로 살아도, 10년 뒤 도착하는 곳은 완전히 달라진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 해도,

너는 그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내 삶의 숱한 갈림길들이 스쳐 지나간다.

혼란과 우연으로 가득한 과거를 한 발자국씩 역추적(tracing)해 보면,

놀랍게도 흩어진 퍼즐이 맞춰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혼란과 우연으로 가득한 과거를 한 발자국씩 tracing 해보면 퍼즐이 풀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으로 훌쩍 떠났던 선택,

일본 유학을 결심했던 순간.

안정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결정.

당시에는 그저 “한번 해보지 뭐” 정도의 가벼운 객기나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중 한 조각이라도 빠진다면,

지금의 나는 완성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6번의 악보에 적힌 문구가 등장한다.

“Muss e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걸어갈 때 불안에 떨며 묻는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늘 망설인다.

반면 뒤를 돌아볼 때는 어느 순간 문장이 바뀐다.

“그래야만 했구나.”


코로나 시절, 우리는 확진자의 동선 파악을 위해 ‘접촉자 추적(contact tracing)’을 했다.

여기서 추적(tracking)과 역추적(tracing)의 차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트래킹(tracking)은 사냥개처럼 실시간으로 대상을 뒤쫓는 행위다.

반면 트레이싱(tracing)은 이미 지나가 버린 발자국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희미해진 과거의 흔적을 하나씩 이어보는 작업이다.

인생을 이해하는 방식은 트래킹보다 트레이싱에 가깝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날 그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 무수한 가정의 점들을 선으로 잇다 보면

어느 순간 묵직한 깨달음이 온다.

“이 모든 우연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던 필연이었구나.”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긍정,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바로 이 순간 완성된다.

과거의 모든 ‘던지’들이 하나의 필연적인 서사로 엮이는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완료형의 행복을 상상할 자격을 얻는다.


미래완료형 행복


어느 날, 나는 책을 읽다 문장 하나가 마음 깊이 박혔다.

"행복의 실감은 대개 그것이 지나간 다음

'아, 그때 행복했었지'라는 과거완료형으로 주어진다."

— 장석주, 『조르바의 인생수업』


"행복의 실감은 대개 그것이 지나간 다음'아, 그때 행복했었지'라는 과거완료형으로 주어진다." —『조르바의 인생수업』, 장석주


행복은 얄궂게도 늘 뒷모습만 보여준다.

“그때가 참 좋았지.”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야,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문장을 접한 뒤,

나는 조금 다른 종류의 행복을 꿈꾸게 되었다.

바로 ‘미래완료형 행복’이다.


“먼 훗날, 나는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이렇게 말하게 되겠지.

‘아, 그때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했었구나.’”


이것은 일종의 사고 실험이다.

현재의 나, 곁을 지키는 사람들,

고군분투하는 일들을 앞에 두고 10년 뒤의 시점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미래의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며 묻는다.

“훗날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과거에 대한 깊은 반추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나간 시간을 트레이싱해 본 사람만이,

미래의 시선으로 현재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과거라는 지층으로 쌓인다.

그러나 과거 없이는 현재를 해석할 수 없고,

미래 없이는 방향을 잡을 수 없다.

과거를 끝까지 되새김질하는 사람은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된다.

치열하게 ‘던지’하면, 필연적으로 ‘든지’하게 된다.

과거를 섣부른 판단 없이 충실히 반추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단단한 기준점을 얻는다.

그 기준은 미래의 숱한 선택지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침반이 된다.


회상(던지) 없는 선택(든지)은 근거가 없어 공허하고,

선택 없는 회상은 그저 감상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시간관이 보여주듯,

우리는 뒤를 돌아본 채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눈앞에 펼쳐진 과거를 끝까지 응시하며,

그 위에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찬 발자국을 내딛는다.

‘던지’하고, 그래서 ‘든지’하는 것.

이 단순한 문장이 내가 믿는, 깨어 있는 삶의 태도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