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工 : 공돌이의 공부

2부 과학 - 첫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이것도 공학이라고?


나는 공대 출신이다.

전공은 재료공학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친근하게 '공돌이'라 부른다.

아니 우리가 자조섞인 표현으로 스스로를 낮춰부른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투박한 체크무늬 셔츠와 뿔테 안경뒤에는

사실은 세상을 바꿀 거대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1995년 봄, E여대 학생들과 대학 첫 미팅을 했다.

자기소개 때 맞은편 학생의 학과 이름을 듣고 유머 본능이 발동했다.

"교육공학과요? 거긴 사범대인가요, 공대인가요?"

썰렁한 농담으로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애프터'를 받지 못했다.

(물론 농담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데 왜 눈가가 촉촉해지지?')

미팅이 끝날 때까지 그 전공이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 정말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육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계하는 학문이었다.

갓 입학한 공대생에게 '공학'이란

응당 물질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학문이었다.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교육'에 물질을 다루는 '공학'이 붙으니

낯설게 느껴졌다.



또 다른 예로 '생명과학'이 생명현상의 본질적인 원리를 탐구한다면

'생명공학'은 그 원리를 응용해 생명을 설계하고 조작한다.

마치 기계 부품을 갈아 끼우듯 유전자를 편집하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한다.

'정치공학'이라는 말은 더욱 기괴하다.

정치는 신념과 가치의 문제인데, 정치공학은 계산과 기술만 남는 느낌이다.

대의보다는 표 계산과 여론 조작, 세력 배분의 수싸움이 떠오른다.

사람은 설득하고 공감할 대상이 아니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치가 되어버린다.


과학과 공학은 다르다.

과학(science)은 “왜 그런가(why)?”를 물으며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다.

반면 공학(engineering)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how)?”를 고민한다.

우리 삶은 공학의 산물로 가득하다.

스마트폰, AI, 의료기기,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과학이 세상을 이해하게 했다면, 공학은 세상을 바꿔왔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공학(工學)’을 ‘공부(工夫)’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두 단어는 모두 ‘장인 공(工)’ 자로 시작한다.

이 글은 바로 그 ‘工’ 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을 향한 공학


공학(工學)의 '工'자는 3,000년 전 장인들의 도구에서 왔다.

집을 짓던 'L'자 직각자, 곡척(曲尺)이 그 모델이다.

공학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무질서한 세계에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고대 장인의 도구상자에는 원을 그리는 규(規),

네모를 그리는 구(矩),

수평을 재는 준(準),

틀을 잡는 범(範)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건축 도구들이 삶의 원칙이 되었다.

규칙(規則), 기준(基準), 모범(模範).

물질을 재던 자(ruler)가 사람이 지켜야 할 법(rule)이 된 것이다.



과학의 '과(科)'자는 본래 곡식을 쪼갠다는 뜻이다.

과학은 세상을 잘게 쪼개어 그 속의 법칙을 발견한다.

반면 공학은 흩어진 것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한중일 모두 같은 한자 科學, 工學을 쓴다.

중국어로는 커쉐(kēxué), 꽁쉐(gōngxué),

일본어로는 카가쿠(かがく), 코가쿠(こうがく)로 발음한다.


과학이 자연의 법칙을 탐구한다면,

공학은 그 법칙을 사람을 위해 적용한다.

공(工)자를 보라.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 곧 장인이 서 있다.

과학에는 없던 사람이 공학에는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깊이 개입하면 위험해진다.

과학이 세상에 아부하면 곡학아세(曲學阿世)가 되고,

공학이 사람을 위한다며 선을 넘으면 온정주의(paternalism)가 된다.

"너희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데이터에 따르면 이게 맞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넌 여기까지만 알아도 돼"—

이런 말들로 타인의 판단을 대신하고, 선택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工)의 대척점에 있는 글자는 '무당 무(巫)'자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工자에 사람 인(人)이 둘 붙어 있다.

하나는 굿을 하는 무당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굿을 받는 사람일 것이다.

무당은 보이지 않고 측정 불가능한 영혼의 세계를 다룬다.

반면 공학자는 자를 대고 측정하고 검증 가능한 이성(logos)의 세계를 다룬다.


과학에서 공학으로, 공학에서 무속으로 갈수록 사람의 개입은 깊어진다.

그리고 개입이 깊어질수록 권력의 위험도 커진다.

객관성을 잃은 과학은 도구로 전락하고,

경계를 잃은 공학은 억압이 되며,

무속은 맹신이 된다.


하지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꾸려면

적어도 앞의 두 가지,

또는 어떤 이들에게는 세 가지 모두 필요하다.

쪼개는 지성,

합치는 기술,

그리고 영혼과 영혼을 잇는 무교(巫敎)까지.

결국 인간은 측정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중·일, 서로 다른 공부(工夫)


이러한 공학적 태도를 내면화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바로 '공부(工夫)'다.

흥미롭게도 한중일은 배움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 서로 다른 단어를 쓴다.


중국에서는 공부를 '쉐시(学习, xuéxí)'라 하고, 학습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말한 "배우고(學) 때때로 익히면(習)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온 말이다.

새가 날갯짓을 익히듯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벤쿄(勉強)'라고 한다.

우리 한자음으로는 '면강'인데,

"힘써(强) 억지로(勉) 한다"는 뜻이다.

하기 싫고 힘들지만 꾹 참고 해내는 인내의 뉘앙스가 짙다.

실제로 중국어에서 勉强(miǎnqiǎng, 몐챵)은 '강요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쓰는 '공부(工夫)'는 다른 나라에서 어떤 뜻일까?

3국 모두 이 단어를 쓰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중국어에서 '꽁푸(工夫, gōngfu)'는 주로 '시간' 혹은 '짬'을 의미한다.

"워 메이요 꽁푸(我没有工夫)"는 "나 시간 없어"라는 뜻이다.

무술 '쿵푸(功夫)'와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고,

오랜 시간을 들여 쌓은 내공이라는 맥락에서 그 뜻이 통한다.

배움과 기술의 핵심은 재능보다 땀 흘려 투입한 '절대 시간'에 있다.


일본어에서 '쿠후(工夫, くふう)'는 '궁리'를 뜻한다.

주어진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요리조리 머리를 써서 더 나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 창의적 과정이다.


한국의 '공부(工夫)'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닦아 완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마음을 닦는 수양의 의미가 강하다.



정리하자면,

중국은 시간의 여유를 갖고,

일본은 궁리를 짜내며,

한국은 마음을 닦는다.


진정한 공학도가 되려면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끈질긴 시간을 투입해 데이터를 쌓고 검증하며(中),

더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궁리하고(日),

그 기술이 인류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윤리적 기준,

즉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韓).


앞서 말한 온정주의의 위험도 여기서 경계해야 한다.

"데이터에 따르면"이라는 말 뒤에 숨어 타인의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 것,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판단을 독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공학도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진짜 공부다.



다시, 세상의 기준을 세우는 '工'을 위하여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이 '工'의 본질이 희미해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중·일 3국 모두 반도체, AI, 배터리 등 기술 패권 전쟁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그 속사정은 너무나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엘리트들은 여전히 공과대학을 선망하여 기술강국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칭화대 공대 출신들이 중국의 빅테크를 이끌고,

도쿄공대 출신들이 노벨상을 받으며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을 지킨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최상위권 인재들이 공대 대신 의치대로, 연구실 대신 개원가로 몰려간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회적 존경보다는 경제적 보상이, 도전보다는 안정이 우선시되는 탓이다.

"수학 잘하면 의대 가고, 성적 모자라면 공대 간다."

이런 공식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제2의 반도체 신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병을 치료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만,

공학자는 기술로 수만 명, 수천만 명의 삶을 구하고 변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공학은 본질적으로 가장 이타적인 학문이다.



비단 전문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 역시 공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광우병 파동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태 때 보았듯,

과학적 팩트보다 자극적인 괴담이 판칠 때 사회는 길을 잃는다.

시민적 과학운동이 과학적 온정주의주의를 분별할 힘을 줄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마음속의 '곡척(曲尺)'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측정하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차가운 이성의 힘.

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그 이성이 "너희들이 잘 몰라서 그래"라는 오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측정하되 군림하지 않고,

검증하되 선택을 빼앗지 않는 것.

이것이 공학과 무속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나는 바란다.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工'의 가치를 되새기기를.

안정된 길을 쫓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기술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工夫)'하는 이들이 박수받는 세상이 오기를.

흙(실리콘)으로 빛(반도체)을 빚어내는 엔지니어.

나는 이 직업이 무당(巫)의 굿판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의사의 메스만큼이나 숭고하다고 믿는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그 사이에서 묵묵히 자(尺)를 대고 문명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

담백하게, 하지만 치열하게.

이것이 내가 평생을 바쳐온 공부의 기록이자, 나의 자랑스러운 '공학'이다.




[독자 참여 코너]


중국 사람이 "워 메이요 꽁푸(我没有工夫)"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① 나 공부 안 해

② 나 시간 없어

③ 나 궁리 중이야


정답은 댓글로!




재료공학 중에 금속재료를 다루는 학문을 야금(冶金)이라고 한다.

이 때 야(冶)는 '풀무 야'.

그런데 '야하다'고 할 때도 같은 한자를 쓴다고?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