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과학 - 두번째 이야기
내가 대학에 입학한 95년은 대학들에서
유사한 학과들이 통합되어 단일 학부를 형성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금속무기재료공학과군'으로 입학했고,
그 해 바로 공식 학과명이 '재료공학부'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름에 '무기'가 들어가니 '금속으로 된 무기武器 만드는 과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참고로 이는 무기(無機)물질을 뜻하는 inorganic으로,
고상한 말로 세라믹스(ceramics)라고 부르는 물질을 말한다.
통합된 우리 110명의 신입생늘 기존 두 학과의 선배들이
반반씩 나누어 직속선배로서 챙겨 주었다.
학번은 이름으로 가나다 순이고, 나는 '박' 씨라 A반이었다.
그리고 A반은 무기재료공학과 선배들이 담당이었다.
공대가 전체적으로 남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무기재료공학과는 여자 선배들이 몇 명 있었다.
자연히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부드러웠던 것 같다.
반면 금속공학과는 몇 년째 여학생이 없었다.
(사실 93학번에 한 명 있었다는데 학교에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B반 술자리에는 격한 가무와 각종 음담패설,
괴상하게 개사(改詞)한 과가(科歌)와 기발한 구호를 외쳐 댔다.
지금 공공장소에서 외쳤다가는 신고당할 수 있는 표현들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조금 유치하고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은 온통 스무 살의 뜨거운 피(熱血)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열정(熱情),
미래를 향한 간절한 열망(熱望)으로 가득했던,
다시 오지 않을 나의 스무 살이었다.
한자 공부에 깊이 빠져 지내는 요즘, 문득 재료공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도야(陶冶)'만한 단어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그릇 도(陶)는 흙을 구워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고,
쇠 불릴 야(冶)는 쇠를 녹여 단단하게 제련하는 일이다.
흙과 쇠라는 전혀 다른 재료를 다루지만,
이 두 글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은 바로 '열(熱)'이다.
흙이든 쇠든, 뜨거운 열을 만나면 단순히 모양만 바뀌는
물리적 변화를 넘어 본질적인 화학적 변화까지 겪게 된다.
그리고 이는 비단 물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다.
80년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는 '가마골'이라 불렸다.
이름 그대로 진짜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한기인 겨울이면 아버지는 그곳 도방(陶房)에서 장작을 패곤 하셨다.
인심 좋은 사장님 덕분에 어린 나는 가마 안을 구경하고
물레 돌아가는 모습에 넋을 잃기도 했다.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가마 위로 맹렬히 치솟던 불길과
며칠 밤낮 피어오르던 연기가 눈에 선하다.
그 뜨거웠던 불길을 떠올리며 도자기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자기(陶瓷器)는 사실 도기(陶器)와 자기(磁器)의 합성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도기와 자기는 흙의 종류부터
굽는 온도까지 완전히 다른 그릇이다.
같은 흙이라도 섭씨 800도 안팎의 불을 만나면,
흙 입자 사이에 미세한 구멍이 남아 물을 머금는 투박한 '도기'가 된다.
반면, 1,300도에 육박하는 극한의 고열을 견뎌내면 흙은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흙 입자들이 녹아 서로 엉겨 붙으면서(공학 용어로는 '소결(燒結, sintering)'이라 한다),
물 한 방울 통과시키지 않는 치밀한 유리질의 '자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두드렸을 때 '탁'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나면 도기고, '챙' 하고 맑은 쇳소리가 울리면 자기다.
이러한 불과 흙의 조화 속에서 한중일 삼국은 각기 다른 도자 문화를 꽃피웠다.
한국은 고려청자의 비색에서 조선백자의 순백으로 이어지는 담백함을 지향했고,
중국은 당삼채나 오채자기처럼 화려한 색채의 '타오츠(陶瓷)'를 만들어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비로소 자기 문화가 꽃피웠는데,
이를 '도지키(陶磁器)' 혹은 '야키모노(焼き物)'라 부른다.
서양에서는 투박한 도기를 'pottery'라 불렀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매끄러운 자기는 아예 'china'라고 칭했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의 '본차이나(bone china)'다.
중국 자기 특유의 단단함과 흰 빛깔을 흉내 내기 위해
흙에 동물의 뼈 가루(bone ash)를 섞은 것이다.
아름다운 그릇을 얻기 위해 뼈까지 갈아 넣었다는 사실에서
문득 끓는 쇳물에 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했다는 신라 에밀레종 설화가 떠오른다.
극한의 아름다움이나 완성을 위해서는 무언가를 태워 없애는 간절한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돌아오자면,
결국 도기와 자기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500도의 온도'다.
800도의 불은 흙을 그저 단단하게 굳히지만,
1,300도의 불은 흙의 본질을 송두리째 바꾸는 화학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 뜨거움의 임계점을 넘어서야 비로소 흙은 흙이기를 멈추고,
영롱하고 치밀한 유리질의 자기로 거듭나는 것이다.
쇠를 녹여 제련하는 일을 뜻하는 '불릴 야(冶)'는
그 생김새가 '다스릴 치(治)'와 닮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물 수(氵) 변 대신 '이수변(冫)'을 쓴다는 것이다.
이 부수는 보통 겨울 동(冬), 얼음 빙(冰),
찰 냉(冷)처럼 '얼음'이나 '차가움'을 뜻할 때 쓰인다.
펄펄 끓는 쇳물을 다루는 뜨거운 글자에
정작 가장 차가운 부수가 붙어 있는 역설이다.
이는 아마도 쇳물이 식어 굳는 과정이 물이 얼어
얼음이 되는 이치와 같다고 보았거나, 그토록 뜨거운 쇠를 다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차가운 냉정함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옷차림이 화려할 때 쓰는 "야하다"는 표현의 '야' 자도 이 글자다.
본래 뜻은 '꾸미다', '요염하다'이다.
서양에서 뜨거운 사랑을 'hot'이나 'heat'로 비유하듯,
동양에서도 뜨거운 풀무질을 남녀의 정욕과 연결한 지점이 묘하게 통한다.
이처럼 '야(冶)'는 뜨거움과 차가움, 강렬함과 냉정함을 동시에 품은 글자다.
실제 철을 다루는 공정도 이러한 조율의 연속이다.
철광석을 녹일 때 탄소를 첨가하면 녹는점이 낮아진다.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철을 '선철(pig iron)'이라 한다.
선철은 탄소 함량이 3.5% 이상으로 높아 단단하지만,
충격을 받으면 쉽게 부서진다.
이 선철에서 불순물과 과도한 탄소를 태워내 탄소 함량을
0.21% 수준으로 낮춰야 비로소 강인하면서도 끈기 있는 '강철(steel)'이 된다.
철광석에서 선철을 얻는 과정이 제선(ironmaking)이고,
선철을 강철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제강(steelmaking)이다.
한국의 제철 역사는 가야의 철갑옷에서 찬란하게 빛났으나 긴 침묵을 겪어야 했다.
그 불꽃이 다시 타오른 것은 1970년대 포항제철에서였다.
포항제철의 건설 자금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받은 돈이었다는
사실과 일제의 철광석 수탈 역사를 함께 떠올리면 실로 복잡한 심경이 든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탄생했든 아니든,
제선과 제강을 거친 쇳덩어리는 아직 미완성이다.
용도에 맞는 열처리를 거쳐야 비로소 쓸모 있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련(鍛鍊)'이라는 말에는 깊은 공학적 지혜가 숨어 있다.
그중 가장 극적인 것은 '담금질(quenching)'이다.
뜨겁게 달군 금속을 물이나 기름에 급랭시키면 강도(strength)는
비약적으로 높아지지만,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후속 공정이 '뜨임(tempering)'이다.
적당한 온도로 다시 데워 천천히 식히며 급랭으로 인한 쇠의 긴장을 풀어주는 과정이다.
이 시간을 거쳐야 충격을 버티는 질긴 인성(toughness)이 생긴다.
때로는 오랫동안 은근히 달궈 조직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풀림(annealing)'도 필요하다.
문득 한국 사회는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어버리는 '담금질 사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도는 높을지 몰라도 충격에 쉽게 깨지는 위태로움이 있다.
우리에게도 은근한 온기로 성질을 안정시키는 '뜨임'과 '풀림'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쇠는 우리에게 말한다.
뜨겁게 데우는 것만큼이나 잘 식히고 어루만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오늘날 재료공학의 영토는 금속과 무기재료를 넘어 고분자, 바이오 재료까지 아우른다.
바야흐로 개별 연구 분야가 경계를 허물고 통합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시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연필(鉛筆)을 보자.
이름에는 납 연(鉛) 자가 당당히 들어있지만, 정작 연필심에 납은 한 톨도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과 같다.
중세 사람들이 흑연(graphite)을 처음 접하고 '검은 납'이라 불렀던 것이 굳어진 탓이다.
그래서 영어로도 연필심은 납을 뜻하는 'lead[레드]'라 부른다.
이 오랜 오해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이름이나 껍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몇 해 전 유행했던 학제간 연구, 즉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를 넘어,
AI 시대는 학문의 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는
'트랜스디시플리너리(transdisciplinary, 초학제적 접근)'를 요구한다.
컴퓨터 공학이 인문학적 상상력을 만나고, 국악의 선율이 건축공학의 구조를 만날 때
이전엔 상상조차 못 했던 새로운 것이 튀어나온다.
재료공학 전공자인 내가 글쓰기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났듯이 말이다.
예전에 조소과 친구에게 들은 말이 기억난다.
조소(彫塑)는 깎아내는 '조각(彫刻)'과 살을 붙여가는 '소조(塑造)'를 합한 의미라고 했다.
조각이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하향식(top-down) 방식이라면,
소조는 뼈대 위에 흙을 붙여 없던 것을 짓는 상향식(bottom-up) 방식이다.
하지만 재료공학, 특히 내가 매료된 도야(陶冶)의 관점은 이와 다르다.
깎지도 않고 붙이지도 않는다.
대신 녹인다.
뜨거운 열을 가해 견고한 고체를 유연한 액체 상태로 되돌린다.
이 용융(鎔融)의 단계에 이르면 너와 나의 경계는 사라지고,
이질적인 재료들은 뜨거운 혼돈 속에서 하나로 뒤섞인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융합(融合)'이다.
1995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구호가 귓가에 맴돈다.
"석기에서 철기까지 우리가 책임진다, 재료공학부!"
인류는 돌과 쇠의 시대를 지나 이제 실리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마주한 데이터와 AI의 시대.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영역을 뜨겁게 녹여내어,
새로운 시대의 지혜(智)와 사유(惟)를 담아낼 그릇(器)을 빚어야 한다.
본문에서 '도야(陶冶)'는 재료공학의 핵심을 담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도야'가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의미로 쓰일 때,
다음 중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성어는 무엇일까요?
① 절차탁마(切磋琢磨)
② 각골난망(刻骨難忘)
③ 수구초심(首丘初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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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 : 톱으로 끊고, 줄로 갈고, 끌로 쪼고, 숫돌로 가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