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역발상 - 네번째 이야기
· 효율의 역설, 아끼려다 잃는 것들.
· 속단의 함정, 빠른 판단이 놓치는 복잡성.
· 결핍의 그림자, 움켜쥔 손에서 풍요는 자라지 않는다.
· 셀프 디스에서 헬프 아더스로, 나를 낮춰 타인을 세우는 삶.
첫인상은 영락없는 '진지충', 아니면 '엄근진'이다.
하지만 나는 의외로 사람들을 자주 웃긴다.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잔잔한 웃음을 제법 짓게 만든다.
그저 소소한 개그 욕심이 있는 아저씨, 딱 그 정도다.
웃음에 대한 나의 집착은 초등학교 6학년 가을소풍 장기자랑에서 시작됐다.
미간에 일자(一字) 눈썹을 칠하고 몽둥이를 든 채 "음매, 기 살어!"를 외치며
당시 유행하던 《쓰리랑 부부》의 '순악질 여사'를 흉내 냈다.
그전까지 얌전하기만 했던 내가 왜 갑자기 돌변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분명한 건, 그날 이후 대중 앞에 서는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질 때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스탠드업 코미디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는 지금이라도 당장 비벼볼 수 있을 것 같고,
중국어도 10년쯤 열심히 파면 4개 국어로 사람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나는 스탠드업 코미디에 그리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우선, 나는 욕을 못 한다.
스탠드업의 묘미는 관객의 속을 뻥 뚫어주는
거친 입담과 날 선 비속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에 있는데,
나는 평범한 욕설조차 입에 담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머 코드에 있다.
'유머(humor)'라는 단어는 본래 라틴어로 '체액(humorem)'을 뜻했다.
이 단어는 인간의 기질을 결정하는 요소로 쓰이다가, 오늘날의 '익살'이라는 의미로 변모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체액에 따라 인간의 기질을 네 가지로 나누었듯,
나 또한 나만의 기준으로 유머를 네 갈래로 분류해 보았다.
풍자(Sarcasm): 빈정거림과 비꼬기. 미국인들의 최애.
상황극(Situational comedy):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나 에피소드.
과장·성대모사(Exaggeration): 특징을 극대화한 흉내.
말장난(Pun): 언어 유희. 일명 아재 개그.
미국 코미디 무대에서는 대체로 위에서 아래 순서(풍자에서 말장난)로 인기가 높다.
불행히도 내가 가장 서툰 영역은 맨 위의 '풍자'이고,
그나마 애정을 품은 것은 맨 아래의 '말장난'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
내가 실제 무대에서 꺼내 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자기비하 유머(self-deprecating humor)'다.
나의 약점을 먼저 투명하게 드러내어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호감을 얻는 방식.
이는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웃음을 자아낼 수 있고, 문화적 장벽 또한 낮다.
무엇보다 소재가 마르지 않는다.
나의 결핍, 실수, 어색함….
평생을 길어 올려도 남을 만큼 내 안에는 그 재료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애란은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농담은 삶의 무게를 내색 없이 견디셨던 부모님의 '진담'과,
그 속에서 내가 경험한 '적절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에 빚지고 있다.
나는 그동안 부족함과 깨어짐이 어떻게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지,
이른바 '역발상의 논리'로 부지런히 설명해 왔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만약 나에게 제약과 무한, 결핍과 풍족 중 하나를 선택할 권한이 있었다면,
나는 기어이 전자인 '제약과 결핍'을 택했을까?
어쩌면 내가 자부했던 자기비하적 농담조차 결핍이 빚어낸 서글픈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핍을 억지로 유리하게 해석하며 '정신 승리'를 해온 것은 아닐까.
이제 나는 내가 그토록 신뢰했던 역발상의 도구들—결핍, 효율성, 어림짐작—이
지닌 명확한 한계를 직시하려 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색해보고자 한다.
그 긴 탐색에 앞서, 우선은 내 '셀프 디스'의 충실한 재료가 되어준
나의 결핍부터 하나씩 꺼내 놓으려 한다.
결핍을 이야기하겠다며 씩씩하게 운을 뗐지만,
막상 키보드 위에 손을 얹으니 두 가지 걱정이 앞선다.
첫째는 독자들이다.
브런치라는 공간에는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아픔과 결핍을 견뎌낸 분들의 글이 많다.
그 절절한 사연들 앞에서 나의 결핍이 자칫 '배부른 투정'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혹은 "이런 결핍을 딛고 이만큼 성공했다"는 식의 서사가
오만한 인정투쟁이나 기만적인 겸손으로 비칠까 두렵다.
둘째는 부모님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가난'이나 '결핍'이라는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자칫 부모님의 무능력이나 무신경으로 오해받을까 봐 노심초사하게 된다.
단언컨대 나의 부모님은 그 치열했던 시절,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다.
비록 물질적 풍요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분들은 내게 누구보다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셨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감사함과 몸에 새겨진 습관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 안에는 설명하기 힘든 가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가 일상의 틈새에서 어떤 모습으로 불쑥 튀어 나왔는지,
인텔 재직 시절의 '궁상맞은' 고백을 통해 털어놓으려 한다.
당시 인텔의 사원 복지는 훌륭했지만, 구내식당 밥값은 공짜가 아니었다.
샐러드바를 포함해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으려면
10달러 정도가 들었기에 나는 주로 도시락을 싸 다녔다.
다행히 커피와 과일은 무료였다.
사과와 오렌지는 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운이 좋으면 아내가 좋아하는 자두나 천도복숭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카페테리아에 갈 때마다 천연덕스럽게 과일을 두세 개씩 주머니에 슬쩍 찔러 넣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 듀프레인이 주머니 속에 숨겨온 흙을 운동장에 몰래 흘리듯,
나는 과일로 불룩해진 바지를 입고 어기적어기적 자리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길, 도시락 가방 속 과일이 묵직하게 실렸다.
과일 값이 저렴한 캘리포니아의 물가를 생각하면 고작 몇 푼 아끼자고 한 짓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가 하기엔 참으로 좀스럽고도 민망한 일탈이었다.
또 하나, 가욋돈을 벌어보겠다고 벌인 일이 있다.
캘리포니아주에는 빈 캔이나 병을 반납하면 개당 몇 센트씩
현금으로 돌려주는 'CRV(California Redemption Value)' 제도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산책이었으나,
길가 쓰레기통마다 가득 찬 재활용품들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집에서 커다란 장바구니를 챙겨 나오기 시작했고,
맨손으로 캔을 줍던 손에는 어느새 코팅된 목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건강을 위한 산책은 어느덧 재활용품 수집이라는 목적에 주객전도되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모은 캔과 병을 차곡차곡 차에 실어 주말마다 재활용 센터로 향했다.
손에 쥐는 돈은 고작 10달러 남짓.
구내식당 한 끼 식사비에 불과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 그랬을까.
궁핍했던 시절의 기억이 몸에 깊이 박혔던 탓일까.
주머니 사정이 나아진 뒤에도 그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돈을 부리는 주인이 아니라,
돈을 지키려 애쓰는 '수전노(守錢奴)'가 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절약을 나 혼자 감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에게까지 강요했다는 점이다.
"아껴야 잘 산다"는 나의 강박이 아내와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고 있는지,
나는 오랫동안 눈감고 있었다.
"돈을 벌려면 돈을 써라(You have to spend money to make money)."
이제 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불편함에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각종 OTT 서비스나 클라우드, AI 구독료 같은 곳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살 수 있는 편의는 돈으로 해결하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과 에너지는 '사람'을 향해 쓴다.
그 인색함을 거치고 나서야,
나를 채우는 것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핍이 돌아 돌아 내게 가르쳐준 유산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내가 아꼈던 것은 비단 돈만이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시간도, 생각도, 칭찬도 계산하며 살았다.
어릴 적 추수가 끝난 논길을 걸을 때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배우기 전인데도
논을 가로질러 가는 게 더 빠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요즘 같은 추운 겨울, 출근 버스를 탈 때도
차가 오는 시간에 딱 맞춰 문 닫히기 직전에 올라타야 기분이 좋다.
내가 산 주식이 다음 날 오르거나,
주차장에서 빙빙 돌다가 출구 바로 앞자리가 비면 괜히 뿌듯하다.
예전에 미국에서 대화하다 '기회비용'을 영어로 말하고 싶었다.
대학 교양과목에서 배운 "opportunity cost"라는 표현을 썼는데,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일본에도 '코스파(コスパ, 가성비)'나 '타이파(タイパ, 시간 대비 효율)'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일본보다 더 팍팍하게 느껴졌다.
같은 값이면 이걸 할 텐데,
그 돈이면 저랬을 텐데,
그 시간에 그렇게 하는 건 아니지.
스스로를 다그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온 나라가 가성비와 효율성 중독에 빠진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중독의 모범 환자였다.
나카노 노부코는 『정의 중독』에서 경고한다.
"비용 대비 효과가 좋다는 이유로 사람을 범주화하면,
전전두엽을 가동시킬 필요가 없어 뇌가 편해진다.
하지만 그 편안함의 대가는 공감 능력의 상실이다."
효율성은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라는 질문 없이는 공허하다.
돈을 아끼려다 시간을 잃고, 시간을 아끼려다 관계를 잃는다.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에 뛰어드는 것이 효율적일까,
다음 버스를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이 효율적일까.
내가 찾은 해결책은 '효율의 경계 설정'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돈으로 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시간, 관계, 건강—에는 효율의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효율을 숭배하던 내가 조금씩 변한 건, 몸을 쓰는 운동을 시작하면서다.
달리기를 하면 자동차보다 느리다.
하지만 바람을 맞을 수 있고, 길가에 핀 들꽃을 볼 수 있다.
수영을 해도, 근력운동을 해도 기회비용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좋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효율 높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가끔은 계산기를 내려놓고 몸을 움직여 보시길.
비효율의 틈에서 삶이 피어난다.
나는 순발력이 좋은 편이다.
특히 대화할 때 필요한 말과 반응이 빨라 분위기를 주도하고 웃음을 이끌어낸다.
화제는 끊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인터넷을 떠도는 얕은 지식을 내 것인 양, 뭘 좀 아는 척 떠들었다.
순발력은 처음 보는 것을 빨리 배울 수 있게도 하지만,
선입견을 갖고 사람을 유형화하는 실수를 저지르게도 한다.
나는 그런 휴리스틱(heuristic)의 신봉자였다.
모든 정보를 꼼꼼히 따지는 대신,
직관과 경험으로 빠르게 답을 내리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하지만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경고한다.
"어림짐작은 체계적 편향(systematic bias)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확증 편향'이다.
내 가설을 지지하는 정보만 보고, 반대 증거는 무시한다.
"A는 원래 그래"라고 범주화하는 순간, 그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나카노 노부코는 『정의 중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낙인을 찍어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면 뇌는 편해지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타인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나는 사람을 빠르게 파악한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빠른 파악'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았는지, 뒤늦게야 깨달았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수정하지 않는 게으름.
해결책은 '메타인지의 훈련'이다.
내가 지금 어림짐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카너먼은 『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시스템 1(빠른 직관)과
시스템 2(느린 숙고)를 구분한다.
어림짐작이 필요한 순간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한 순간을 구별하는 능력,
특히 사람에 대한 판단에서는 시스템 2를 의도적으로 가동해야 한다.
"잠깐, 내가 지금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한 문장의 자문이 편향의 늪에서 건져준다.
이렇게 어림짐작에 기대던 내가 조금씩 변했다.
4년 전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다.
다만 책에서 얻은 이미지, 아직 머릿속에 남은 잔상들이 합쳐지고 공명하며
새로운 생각으로 확장된다.
글을 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미래의 독자가 읽는 모습을 상상하며 글을 쓰고, 글감은 과거에서 끌어온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초고를 쓴 나를 부정하고, 창조적 파괴를 반복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어림짐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한 문장 한 문장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한다.
가끔은 빠른 판단을 멈추고 천천히 읽고 써보시길.
느림의 틈에서 깊이가 자란다.
나는 칭찬에 인색하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영향일까, 무언가를 말로 표현하는 데 약하다.
사랑받지 못한 건 아니지만, 작은 일에 일일이 칭찬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래서인지 나도 칭찬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옷 잘 어울린다", "오늘 발표 잘했다" 같은 일상적인 칭찬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건 따로 있다.
동기가 임원이 됐을 때, 친구가 서울 좋은 동네 아파트에 입주하게 됐을 때.
표면적으로는 "축하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속으로는 묘한 경쟁심이 고개를 든다.
'왜 나는 아직인데', '운이 좋았네',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축하의 말 뒤에 시기심이 슬쩍 고개를 내민다.
경상도 사투리로 '잘코사니', '꼬숩다'라는 표현이 있고,
독일어로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 한다.
나카노 노부코는 『샤덴프로이데』에서 이렇게 말한다.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우리 뇌가 도파민을
대량으로 방출해 만들어내는 쾌감은
섹스의 쾌락과 비슷하거나 더 크다.
그리고 이 쾌락을 얻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누군가를 익명으로 비난하여 많은 사람의 찬동을 얻는 것이다.
자신과는 아무 관계없는 대상에게 사회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기쁨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정의 중독'에 빠진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그토록 원초적이다.
남을 끌어내려야 내가 올라간 것 같고, 남의 실패를 봐야 안심이 된다.
그래서 타인의 성공 앞에서 진심으로 박수 치기가 어렵다.
이것이 나의 또 다른 결핍, '인정 결핍'이다.
결핍 속에서 자란 사람은 결핍을 '정상'으로 내면화한다.
돈뿐 아니라 칭찬, 인정, 축하까지도 '자원'으로 여기고 아끼게 된다.
마치 남에게 주면 내 몫이 줄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리학에서는 이를 '결핍 마인드셋(scarcity mindset)'이라 부른다.
결핍에 집중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당장의 비교에만 몰두하다 정말 소중한 관계를 잃게 된다.
이렇게 결핍에 갇혀 있던 내가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 중이다.
요즘 동료나 지인을 만나면 음료는 내가 산다.
예전 같으면 "각자 내자"고 했을 것이다.
입에 잘 안 붙더라도 칭찬을 한다.
동기가 승진하면 "진짜 대단하다, 축하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시기심이 조금씩 옅어지는 걸 느낀다.
칭찬은 상대에게 주는 선물이지만, 결국 나를 치유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가끔은 움켜쥔 손을 펴고 나눠 보시길.
풍요의 틈에서 관계가 피어난다.
다시 유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왜 자기비하적 유머를 택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냥 성향일 수도 있고, 나를 낮춰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 살 때 TV 예능 프로그램을 자주 봤다.
그중 특이하다고 느낀 게 만담(漫才, 만자이)이다.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하는 코미디인데, 역할이 나뉜다.
공격하는 쪽은 '츳코미(ツッコミ)', 당하는 쪽은 '보케(ボケ)'.
츳코미가 보케의 머리를 세게 때리는 장면이 유난히 많았다.
우리나라에도 80년대까지 구봉서와 곽규석의 콤비 개그가 있었다.
나는 확실히 츳코미는 아니다.
공격하는 것보다 당하는 게 편하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것보다 나를 깎아내리는 게 마음이 놓인다.
예전에는 부족한 게 창피했다.
축사가 딸린 집에 살 때는 주일학교 예배가 끝나고 봉고차로 태워주시면,
일부러 멀리 돌아가서 우리 집 아닌 척했다.
20대에는 사귀는 여자친구나 그 부모님에게
우리 부모님이 분식집을 하신다고 말하는 게 떳떳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귀하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의 경험은 나의 정서적 토양이 되었고,
그때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해외로 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결핍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글거리가 있었을까.
이제 나의 도구들은 방향을 바꾸었다.
나의 효율성은 타인의 시간을 아껴주는 데 쓴다.
복잡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 긴 글을 요약해주고, 누군가의 삽질을 줄여준다.
나의 어림짐작은 타인을 이해하는 첫 단추가 된다.
빠른 판단 뒤에 "하지만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붙인다.
나의 결핍 경험은 타인의 결핍을 알아보는 눈이 된다.
"저 사람도 나처럼 힘들었겠구나"라는 공감,
그리고 "나는 저 사람에게 풍요를 줄 수 있다"는 실천.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현재 정기적인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
아니, 지금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베푸는 것.
조금 느려도 좋다.
조금 없어도 좋다.
셀프 디스(self-deprecation)가 헬프 아더스(help others)로 이어지는 삶.
나를 낮추는 농담이 누군가를 일으키는 손이 되는 삶.
이제 그런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