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역발상 - 세번째 이야기
· 물건을 모시지 말고 부리며, 소유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 없음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와비사비의 마음.
· 상처는 숨기지 않고 금으로 메우는 킨츠기, 그리고 안티프래질의 지혜.
· 완벽함보다 여백을, 채움보다 덜어냄을 택하는 가벼운 삶.
내 방 책상에는 32인치 모니터 두 대가 있다.
듀얼 모니터암으로 하나는 세로로 세워두었다.
자료를 보며 글을 쓰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면 굳이 카페를 찾는다.
적당한 백색소음이 집중력을 높여주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카페를 둘러보면 사과 로고가 새겨진 랩탑이 눈에 띈다.
대부분 케이스를 바닥에 깔거나 화면에 보호 필름을 붙여두었다.
고가의 제품이니 보호하려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애지중지해야 하나 싶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위해 산 물건의 노예가 된다.
새 옷, 새 헤드폰, 새 차에 상처가 날까 전전긍긍한다.
독일 철학에서는 이를 '소외(Entfremdung)'라고 부른다.
인간이 만든 물건이 주인 행세를 하고,
정작 사람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상이다.
나는 3년 된 S사 랩탑을 쓴다.
한번 떨어뜨려 힌지 부분이 움푹 패였고,
표면에는 스크래치가 가득하다.
케이스도 없이 백팩에 툭 넣고 다닌다.
물건을 모시는 대신 도구로서 철저히 부린다.
소외시키면 시켰지, 내가 그 랩탑에게 소외당하는 일은 없다.
또 다른 유사한 예는 새 차에 관한 것이다.
새 차를 인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센터 콘솔, 도어 트림, 계기판까지 보호 비닐을 전부 뜯어내는 것이다.
반면 아내는 정반대다.
1년, 2년이 지나도 패널에 비닐을 붙인 채 다닌다.
너덜너덜해진 비닐을 보며 생각한다.
저 비닐이 지켜준 깨끗한 표면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지금 타는 내가 아니라,
언젠가 이 차를 넘겨받을 다음 주인을 위한 것은 아닐까.
오래 되었지만 자꾸 손이 가는 나의 물건 중에 하나는
영국 브랜드 멀버리(Mulberry)의 메신저백이다.
15년 전 결혼할 때 장모님이 선물해 주셨다.
내추럴 레더라 코팅 없이 가죽 그레인이 그대로 살아 있다.
부드럽지만, 물 한 방울만 튀어도 자국이 남는 예민한 녀석이다.
신혼 초에는 강수확률 0%인 날에만 메고 나갔다.
하지만 15년의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커피 자국, 소나기에 젖은 흔적이 겹겹이 쌓였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그 낡음이 오히려 멋스럽다.
뻣뻣하던 가죽은 내 몸의 굴곡에 맞춰 부드럽게 길들었다.
반짝이던 새것일 때보다,
내 삶의 흔적을 머금은 지금이 훨씬 편안하고 근사하다.
오해는 마시길.
나 역시 새것이 좋고, 신모델이 나오면 빨리 갖고 싶어진다.
하지만 약간의 상처와 낡음에는
완벽하게 관리된 새것에서 느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일본의 미학, '와비사비(侘寂)'다.
내 눈은 그야말로 '결함 투성이'다.
2년 전만 해도 양안 -5.75 디옵터의 고도 근시에 노안까지 겹쳐,
스마트폰을 볼 때면 안경을 이마 위로 치켜올려야 했다.
그러다 달리기에 빠져들었고, 멋진 스포츠 고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 저 고글을 쓰려면 안경을 벗어야 해."
백내장도 없는데 다초점 인공수정체 삽입술을 감행했다.
하지만 욕망의 대가는 혹독했다.
수술 3개월 뒤, 갑자기 망막 혈관이 터지며 한쪽 눈 시야가 암전됐다.
유리체 출혈과 망막 손상을 치료하기 위해 유리체 절제술을 받았다.
몇 개월이 지나도 시력이 돌아오지 않아 다른 안과에서 검사해 보니
인공수정체 도수가 맞지 않아 +1 디옵터 원시가 되어 있었다.
이를 교정하려 라식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반대쪽 눈마저 비문증이 심해져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동공마저 남들보다 커서 빛 번짐이 심했고, 결국 동공 성형술까지 받아야 했다.
더 잘 보려던 욕심이 내 눈을 문자 그대로 누더기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망막 안저 촬영 결과, 오른쪽 눈에 희미한 흰색 무늬가 보였다.
의사는 '유수 신경섬유'라고 했다.
보통 망막의 신경섬유는 투명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태어날 때 신경에 수초가 입혀진 채 남은 선천적 흔적이 있었다.
그 하얀 반점 부분에는 시각 세포가 없다.
보이지 않는 맹점이다.
하지만 나는 50년 동안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뇌가 주변 정보로 빈 곳을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 눈은 수술 자국과 노화의 흔적,
그리고 태생적 맹점까지 지닌 불완전한 기관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렇게 망가진 내 눈을 좋아하게 되었다.
일본의 미학 '와비사비(侘寂)'는 바로 이런 상태를 긍정한다.
와비(侘)가 가난하고 단순한 상태에서 느끼는 안분지족이라면,
사비(寂)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고 바래가는 것에서 느끼는 고요한 아름다움이다.
서양 미학이 흠집 없는 새 자동차의 광택을 추구한다면,
와비사비는 이가 빠지고 찻물 자국이 밴 낡은 찻잔을 곁에 둔다.
완벽함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상태지만,
불완전함은 무언가 들어올 여백이 있는 상태다.
내 눈의 맹점을 뇌가 채워주었듯,
부족함은 채움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와비사비는 삶의 불완전함을 단순히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덧없음과 연약함을 진심으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거울을 본다.
수술 자국이 겹겹이 쌓인 눈, 처진 눈꺼풀, 그리고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야.
예전처럼 선명하게 세상을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 흐릿함 속에 깃든 깊이를 본다.
50년이라는 세월이 남긴 흔적이다.
나는 더 이상 2.0의 시력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결함 투성이인 내 눈이 보여주는,
조금은 흐릿한 세상을 사랑하기로 했다.
이 빠진 찻잔처럼 불완전하기에,
나의 눈은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눈으로 배운 와비사비다.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에는 기억에 남는 문구가 나온다.
"Prima schola alba est. (첫 수업은 휴강이다.)"
직역하면 "첫 수업은 하얗다"는 뜻이다.
교수는 첫 시간에 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머리를 비우고 받아들일 준비를 할 여백을 준다.
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종종 행사의 사회를 보거나 강연할 기회가 있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길어지면 힘을 잃는다.
예전 교회 부흥회 시절,
강사들이 청중의 반응에 취해 한 시간 넘게 설교를 이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은혜 다 베렸다(망쳤다)"며 민망한 웃음을 짓곤 했다.
마크 트웨인의 말도 이와 맥락이 닿아 있다.
"설교가 20분을 넘어가면 죄인도 구원받기를 포기한다."
영어에는 '없음'을 뜻하는 단어가 많다.
No, None, Without.
그리고 라틴어에서 유래해 프랑스어에 남은 'Sans'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고딕체를 서양에서는 '산세리프(Sans-serif)'라고 부른다.
세리프는 글자 끝에 달린 장식을 뜻하니,
산세리프는 곧 장식을 걷어낸 글자다.
리드 칼리지를 중퇴하고 캠퍼스를 떠돌던 스티브 잡스는
우연히 서체(calligraphy) 수업을 청강했다.
그곳에서 자간과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산세리프의 대표 격인
헬베티카체가 주는 조형미는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10년 뒤, 그가 만든 매킨토시는 아름다운 서체를 갖춘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고,
이는 훗날 디지털 세상의 미적 표준이 되었다.
덜어냄의 미학은 비단 서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라는 말을 남겼다.
장식이 덕지덕지 붙은 과거의 양식에서 벗어나,
철과 유리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현대 건축은 비어 있음으로써 기능을 완성한다.
미술 또한 구상적 묘사를 지우고 점과 선, 면으로 본질만 남기는 추상으로 나아갔다.
생각해 보면 없음은 우주의 기본값이다.
빅뱅 이전의 우주는 무(無)였고, 우리 또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제목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는가.
가득 채우려 아등바등하는 삶보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삶이 더 가볍고 자유롭다.
와비사비는 이처럼 비어 있는 상태, 그 자체를 긍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앞서 이야기한 '없음'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와비사비의 첫 번째 단계라면,
그다음은 그 부족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새로운 가치로 승화시키는 단계다.
일본의 '킨츠기(金継ぎ)'가 대표적이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 틈을 옻으로 붙인 뒤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기법이다.
깨진 흉터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황금빛 선으로 도드라지게 만들어 그 깨짐을 도자기만의 역사로 기록한다.
빗물에 젖고 손때 묻은 가죽 가방이 오히려 멋스럽듯,
약점을 보강한 흔적이 스타일이 된 경우도 있다.
'새들 슈즈(saddle shoes)'가 그렇다.
발등 부분에 안장 모양의 가죽이 덧대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이나 갈색 가죽이 덧대어진 투톤 컬러가 특징인데,
유래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처음부터 멋을 위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 스포츠화는 끈을 묶는 발등 부분과 뒤축이 가장 빨리 닳았다.
그래서 그 취약한 부분에 튼튼한 가죽을 한 겹 덧대어 보강한 것이 시초다.
약점을 보강한 그 '덧댐'이 세월이 흘러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정호승 시인은 〈옹이〉에서 나무의 상처를 노래한다.
"나무도 고통을 겪어야
단단한 옹이가 생긴다."
나무가 자라다 가지가 꺾이거나 상처를 입으면,
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조직을 단단하게 뭉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옹이는 나무의 다른 어떤 부위보다 단단하다.
목수들은 안다.
가장 큰 상처가 있던 곳이,
훗날 가장 단단한 매듭이 되어 집을 지탱한다는 것을.
나심 탈레브는 이를 '안티프래질(antifragile)'이라 명명했다.
충격을 받으면 깨지는 유리가 아니라,
충격을 받을수록 더 단단해지는 성질이다.
킨츠기로 수선된 찻잔은 깨진 틈을 메운 금 덕분에 이전보다 더 가치 있어진다.
가죽을 덧댄 새들 슈즈는 더 오래 신을 수 있고,
옹이가 박힌 나무는 뒤틀리지 않는다.
내 눈은 수차례의 수술로 흉터투성이다.
내 노트북은 찌그러졌고, 가방은 얼룩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흔적들을 나의 '금'이자 '옹이'로 여긴다.
상처 없는 매끈한 삶보다,
깨지고 다시 이어 붙인 자국이 선명한 지금의 내가 더 단단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와비사비는 결국 상처를 훈장으로 바꾸는 삶의 연금술이다.
미국에서 살던 시절, 나는 풍요의 역설 속에 있었다.
주말이면 코스트코에 가서 물건을 벌크(bulk)로 실어 날랐다.
치약은 12개들이 한 박스를 샀다.
하지만 그 치약을 다 쓰기도 전에 새로운 브랜드가 눈에 들어오곤 했다.
결국 뜯지도 않은 치약들은 팬트리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썼다.
버리는 것도 쉬웠다.
미국 파티 문화에서는 설거지의 번거로움을 피하려 일회용 접시를 쓴다.
식사가 끝나면 남은 음식과 접시를 한데 뭉쳐 쓰레기통에 쓸어 넣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편리함이 그리웠다.
하지만 몸은 편했을지언정, 마음 한구석은 늘 불편했다.
세월이 갈수록 집에는 잡동사니가 늘어난다.
들어오는 물건은 많은데 나가는 물건은 없다.
집은 비대해지고, 그 속에서 나의 동작은 점점 느려진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무거움이 아니다.
일본에는 '단샤리(断捨離)'라는 정리 철학이 있다.
끊고(断), 버리고(捨),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離)는 뜻이다.
유목민처럼 떠돌지는 못할지라도,
언제든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삶을 꿈꾼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여덟 가지 고통 중 하나로 '구부득고(求不得苦)'를 꼽는다.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우리는 더 완벽한 물건, 더 좋은 차, 더 젊은 육체를 원하지만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내가 새 랩탑의 스크래치에 괴로워하지 않고,
물 얼룩진 가방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완벽한 상태'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무 의사 우종영 작가는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먼저 잎을 떨군다.
화려한 잎을 비워내야만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그래야만 다음 봄에 새순을 틔울 수 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자연의 이치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여전히 찌그러진 랩탑이 놓여 있고,
거울 속에는 수차례 수술로 점철된 내 눈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결핍들이 부끄럽지 않다.
와비사비는 낡고 초라한 것을 억지로 참아내는 인내가 아니다.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는 마음의 상태다.
상처는 옹이가 되어 나를 지탱하고,
비어 있는 여백은 새로운 사유로 채워진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나는 이제 조금 더 가벼워지려 한다.
부족해서 아름답고, 비어 있어서 충만한 삶.
이것이 내가 와비사비에게서 배운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