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음, 사람의 소리
2023년 8월,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구름은 무심하게 하얗다.
더위가 한발 물러선 늦여름의 절정,
지난 석 달간 앓듯이 읽어내린 『토지』의
묵직한 감동을 안고 홀로 길을 나섰다.
거제 지인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선생의 본향 통영으로 향한다.
한국의 나폴리,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윤슬이 반짝이는 곳.
박경리기념관에 도착해 남해를
그윽하게 응시하는 선생의 동상 곁에 섰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그 문장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을 적신다.
생의 집착을 놓아버린 거장의
옆모습이 저 바다를 닮았다.
오십 년 먼 길을 돌아 바다 곁에 잠드네.
남강을 굽어보는 숙소를 나서 촉석루에 오른다.
바위 아래 논개의 붉은 마음과
『토지』 속 장면들이 남강 위에 겹쳐 흐른다.
파란 하늘을 이정표 삼아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오후의 볕이 내려앉은 하동,
화개장터 표지석을 지나 낡은 모텔에 짐을 푼다.
참게 정식, 가득 차려진 반찬들의 감칠맛 속에 하루의 허기를 달래고
영호남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물길 앞에서 깨닫는다
섬진강은 경계가 아니라 잇는 물줄기였음을.
숙소도 교통편도 즉흥에 맡긴 여정.
계획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우연이
스쳐 갈 뻔한 풍경들을 더 오래 붙잡는다.
우연은 뜻밖의 지도 틈이 만든 나침반.
최참판댁 사랑채 누마루에 걸터앉아
악양의 너른 들판을 굽어본다.
1945년 8월, 서희가 만세 소리 속에서
해방의 벅찬 순간을 맞이하던 그 자리.
역사의 소용돌이를 버텨낸 그녀의 기백이
초록 물결 위에 생생하다.
이어 길상의 자취를 좇아 쌍계사로 발길을 옮긴다.
지리산 깊은 도솔암에서 온 생을 바쳐
관음탱화를 완성하며 구원을 갈구했던 예술혼.
고즈넉한 산사에서 그 치열했던 기도의 시간을 마주한다.
화개장터로 향하는 십 리 벚꽃길을 천천히 걷는다.
산과 구름을 품은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에 여행의 여운을 녹인다.
천 겹의 토지의 숨결 내 안에서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