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역류 - 두번째 이야기
·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임.
·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로 생각하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일임.
· 경험은 기록될 때만 지식이 되고, 쓰는 자만이 경험의 주인이 됨.
· 상상력이란 눈앞에 없는 것을 그려내는 힘이며, 모든 떠남은 거기서 시작됨.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두고 떠나라는 말을 들은 사람.
가야 할 곳도, 돌아올 날도 알지 못한 채 길을 나선 사람.
창세기의 아브라함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장 1절 개역한글)
이 명령은 단순한 떠남이 아니다.
본토는 경제적 토대를,
친척은 위기 때의 안전망을,
아비 집은 심리적 마지막 보루를 상징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컴포트 존(comfort zone),
안전지대를 완전히 버리라는 것이다.
그 세 가지를 내려놓는 순간 인간은 무방비 상태의 이방인이 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낯설게 만드는 과정,
철학에서는 이를 낯설게 하기(verfremdung/defamiliarization)라 부른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떠남은 강요된 낯섦이 아니라 자발적 낯설게 하기였다.
나 역시 그런 선택을 네 번 했다.
첫 번째는 2002년 여름이었다.
전 여자친구와의 이별이 발단이었다.
박사 과정의 전문연구요원 자격을 포기하고 학교도 자퇴했다.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 셈이었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처음 배운 러시아어,
낯선 음식,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았다.
두 번째는 2005년 가을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었다.
카자흐스탄에서 토플(TOEFL)과 GRE(대학원 입학 자격시험) 점수를 받아놨고,
서류를 갖춰 다섯 군데 대학원에 지원했다.
전부 불합격.
관심도 없고 언어도 몰랐던 도쿄대에서 합격 통보가 왔다.
또다시 혼자 짐을 쌌다.
일본어는 처음부터 새로 공부해야 했고,
기한 안에 학위를 마쳐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더해졌다.
원하던 문이 닫히고, 열린 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세 번째는 2010년 가을이었다.
박사를 마치고 졸업생들이 선망하는 NTT에 취직했다.
그사이 결혼도 했다.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아내도 일본 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어를 못하는 아내의 불편함,
커리어의 성장 가능성,
훗날 아이의 교육과 정체성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미국 이직을 결심했다.
혼자가 아닌 결정이라 무게가 달랐다.
이름도 낯선 작은 스타트업에 지원했는데
덜컥 오퍼를 받고 H1B 비자도 바로 나왔다.
그렇게 하와이 호놀룰루로 가게 됐다.
마지막 네 번째는 2019년 가을이었다.
미국에서 두 번의 이직 끝에 반도체업계의 리더인 인텔에 입사했다.
짧은 시간에 실력도 인정받고 승진도 했다.
그 사이 오랜 기다림 끝에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딸 하윤이도 생겼다.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
한국 문화와 점점 멀어질 딸,
집 한 채 없이 해마다 오르는 월세.
셈을 해보니 돌아가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이번엔 식구가 셋이었다.
아니, 강아지 보리까지 넷이었다.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오래 비워둔 자리는 이미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역이민이라 불렀지만,
나에게는 귀환이 또 다른 떠남이었다.
컴포트 존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익숙한 환경은 뇌를 게으르게 만들고,
지금 이대로가 옳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안한 순류(順流)를 택할 때,
나는 번번이 역류(逆流)를 선택했다.
해외 생활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정착지가 아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몸과,
낯선 환경을 견디는 근육이었다.
이 글은 그 근육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 속 표류자들의 기록에서,
낯선 땅을 걸었던 선인(先人)들의 눈에서,
그리고 나 자신의 네 번의 떠남에서 건진 것들이다.
인간은 언제나 떠난 자들로부터 배워왔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의 아웃사이더였다.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과거 시험장에서 스스로 백지를 제출하며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았다.
이후 홍대용, 박제가 등과 백탑파(白塔派)를 이루며
벼슬보다 백성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문을 논했다.
그런 그에게 1780년,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찾아왔다.
8촌 형 박명원이 건륭제(乾隆帝)의 칠순 사절단장으로 임명되면서
연암은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 사대부에게 오랑캐의 나라였다.
그런데 국경을 넘자마자 연암은 충격을 받았다.
벽돌로 반듯하게 쌓은 담장,
먹줄을 튕긴 듯 곧은 도로,
수레가 오가는 거리.
그것은 그가 상상했던 오랑캐의 풍경이 아니었다.
연암이 주목한 것은 황제의 궁전이 아니었다.
깨진 기와 조각을 담 쌓는 데 쓰는 방식,
수레바퀴의 규격을 통일해 물류를 혁신한 시스템이었다.
그는 《열하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국에 물자가 풍부한데 그것이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수레를 이용한 결과이다.
(중략)
영남(嶺南) 아이들이 백하(白蝦)젓을 모르고,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산사나무의 열매)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柿)과 감자(柑子, 귤의 일종)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을 하니 이렇게 귀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도로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도로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혁신은 수레 한 대,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연암이 청나라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을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 있는 땅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멀리 가도 구경꾼이다.
내가 연암에게 배우고 싶은 것은 그의 유쾌함이다.
유머는 단순히 웃기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힘이다.
요동 벌판을 처음 마주하고 "참으로 좋은 울음터"라 외쳤고,
수레가 강에 빠지자 "천하의 기구한 구경거리"라며 박수를 쳤다.
편견이란 결국 언어의 감옥임을 그는 웃음으로 드러냈다.
불편함을 관찰의 재료로, 불운을 생동감으로 바꾸는 사람.
그의 유쾌함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었다.
연암은 눈앞의 현실이 지도와 다를 때, 지도를 버렸다.
그것이 그를 조선에서 가장 날카로운 눈을 가진 여행자로 만들었다.
집을 떠나면 효자가 되고, 나라를 떠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카자흐스탄, 일본, 미국을 살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한국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국경 밖에서는 선명하게 보였다.
거리가 생겨야 윤곽이 드러난다.
떠남은 새로운 땅을 얻는 일이 아니었다.
더 넓은 시각과, 그 시각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통찰을 얻는 일이었다.
《열하일기》 속 「허생전」에 나오는
변씨 부자의 실제 모델은 역관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이다.
숙종 시대의 실존 인물로, 주전공 언어는 일본어(倭語)였다.
당시 역관은 중인 신분이었지만 엄청난 부를 쌓았다.
역관은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국경 너머의 정보를 쥐고 경제적·외교적 흐름을 주도하던 지식인이었다.
언어가 곧 권력이었다.
반면 외국어를 못하는 조선 양반들은 이웃나라 사람을 만나면 필담(筆談)에 의존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AI 프롬프트도 필담이다.
붓이 자판으로, 상대가 AI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역관의 진짜 힘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글을 모르는 사람과도, 정보가 식기 전에, 말로 즉각 통할 수 있는 현장성.
그것이 역관을 단순한 번역가와 구별 짓는 힘이었다.
조선 초기의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그 시대 최고의 언어 천재였다.
중국어·일본어·여진어·몽골어를 두루 구사했고,
동아시아 8개 국어에 조예가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문을 아무리 읽었다 해도 말로 통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처럼 일본어와 중국어를 모두 배워본 사람이라면 안다.
독해가 된다고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순이 다른 언어는 생각하는 순서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훗날 세조의 편에 선 탓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으로 변절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으로서의 업적은 누구도 지울 수 없다.
신숙주와 변승업이 외국어를 바깥으로 펼쳤다면,
그 언어를 안으로 가져들어온 사람도 있다.
이극로(李克魯, 1893~1978)다.
상해에서 중국어를, 베를린에서 독일어와 언어학을, 파리에서 음성학을 배웠다.
여러 언어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조선어의 정교함이 보였다.
귀국 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했고,
1942년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만 사전 편찬을 포기하지 않았다.
외국어를 배웠기에 모국어의 가치를 누구보다 선명하게 보았다.
괴테는 말했다.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자신의 모국어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소통 도구를 하나 더 얻는 게 아니다.
그 집에 들어가 그 언어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나는 일본어와 영어를 꽤 능통하게 구사하고,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있으며,
최근 2년간 중국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지금은 AI가 언어 장벽을 실시간으로 허문다.
웬만한 번역은 AI가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해낸다.
그렇다면 외국어 공부는 이제 쓸모없어진 것일까.
오히려 반대다.
AI는 문장을 옮기지만, 그 언어로 생각하지는 못한다.
협상의 뉘앙스, 침묵의 무게, 웃음의 맥락은
그 언어를 몸으로 익힌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다.
변승업이 역관으로서 가졌던 현장성은 AI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만 바뀔 뿐이다.
신숙주는 외교 협상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고,
이극로는 조선어를 지키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번역기를 얻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의 논리와 감정과 세계관을 체감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언어의 영토를 넓히는 것은 내가 살 수 있는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었다.
여행기, 소설, 철학 논설, 필담이 뒤섞인 전례 없는 복합서였다.
귀국 후 필사본이 앞다투어 나돌았고, 정조는 반성문을 명했다.
연암이 제출한 반성문이 너무도 뛰어난 명문이어서 정조가 웃고 말았다.
탄압조차 그의 기록을 막지 못했다.
기록의 힘은 연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801년 12월, 홍어 장수 문순득(文淳得)은 흑산도에서 돌아오던 길에 풍랑을 만났다.
류큐(琉球)를 거쳐 여송(呂宋, 필리핀), 마카오를 지나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3년 2개월이 걸렸다.
유배 중이던 정약전(丁若銓)이 그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와 구술을 받아 적었다.
글을 모르는 홍어 장수의 기억이 《표해시말(漂海始末)》이 되었다.
오늘날 류큐 전통 장례식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 평가받는다.
정약전이 붓을 들지 않았다면,
문순득의 3년은 한 사내의 기구한 팔자로 끝났을 것이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난파해 13년을 억류당했다.
탈출 후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제출한 보고서가 《하멜 표류기》다.
임금 청구서로 시작한 기록이 프랑스·독일·영국에서 앞다투어 번역 출간됐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인이 조선을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지침서가 되었다.
일부 내용은 부정확하고 편향되었지만,
기록이 없었다면 조선은 유럽에 더 오래 미지의 땅으로 남았을 것이다.
요즘 여행기는 대부분 사진과 영상으로 대체된다.
카메라는 보이는 것을 담고, 문장은 보는 사람을 담는다.
나는 카자흐스탄에서의 사진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기억을 잊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면,
그 기억은 내가 쓰지 않으면 영영 사라진다.
나를 통과한 세계만이 나의 기록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써나갈 것이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자손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축복이었을까.
어차피 그 모든 자손을 자신의 대에서는 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증손자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려면,
먼저 그곳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상상(想像)할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상상'이라는 단어다.
한국과 일본은 想像을 쓴다.
像는 '형상', 또는 '닮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형상을 그린다.
그런데 중국은 想象을 쓴다.
象는 코끼리다.
중국인들에게 상상이란, 코끼리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왜 코끼리였을까.
《한비자(韓非子)》 해로편(解老篇)에 이런 말이 있다.
"人希見生象也, 而得死象之骨, 案其圖以想其生也."
살아있는 코끼리를 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코끼리의 뼈를 보며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
눈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것.
그것이 想象이었다.
그런데 같은 코끼리를 전혀 다르게 접근한 책이 있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에서 말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는 순간, 누구나 코끼리를 떠올린다.
우리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런데 한비자의 고대 중국인들은 정반대의 말을 했다.
코끼리를 생각하라.
레이코프가 기존 프레임을 깨라고 했다면,
《한비자》의 想象은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라고 한다.
없는 것을 있게 그려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필리핀 루방(Lubang) 섬 정글에서 혼자 29년을 버틴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小野田寛郎, 1922~2014)의 이야기가 그 극단을 보여준다.
일본 패전 후 뿌려진 전단도, 가족의 목소리도, 라디오 뉴스도 모두 미군의 기만술이라 믿었다.
1974년 직속상관이 직접 루방섬으로 날아와 투항 명령서를 내밀고서야 총을 내려놓았다.
그는 30년 가까이 이미 끝난 전쟁을 치렀다.
컴포트 존이 꼭 편안한 곳은 아니다.
정글도, 극도의 긴장도, 익숙해진 것이라면 컴포트 존이 된다.
새로운 현실을 상상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불편해도 익숙한 프레임 속에 머문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래 비워둔 자리는 이미 낯선 곳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것을 처음 보듯 바라보는 시선,
뷰자데(Vuja De)다.
데자뷰(Déjà vu)의 뒤집기다.
프루스트의 말로 전해지는 문장이 있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역류(逆流)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자흐스탄, 일본, 미국, 그리고 다시 한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류(順流)를 택할 때, 나는 번번이 거슬러 올랐다.
사진을 잃어도 기억은 남는다.
기억을 문장으로 남기면 경험은 지식이 된다.
지식이 쌓이면 절망은 전략으로 변한다.
아브라함도, 문순득도, 연암도 결국 같은 일을 했다.
눈앞에 없는 코끼리를 그려내며,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다.
나도 그렇게, 계속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