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을 따라 올라보니 바다

3부 역류 - 첫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보이지 않는 방향을 쫓기보다 내면의 에너지를 응축해 스스로 길을 열었음.
· 무조건 쏟아내는 열심보다 내부에너지를 차곡차곡 채우는 밀도 있는 성실함.
· 역류는 억지 저항이 아닌 높아진 압력이 찾아낸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길임.
· 일상의 관성을 깨고 계곡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정말 푸른 바다가 있었음.



아빠가 한 '일'


"아빠는 회사에서 뭐 해?"


식탁에 마주 앉은 여섯 살 하윤이가 물었다.


"일하지."

"무슨 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했다.


"아빠는 매일 그림도 그리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들어.

또 가끔 쌓기 놀이도 하고."


물론 이건 어른의 직장생활을 아이에게 들려주기 위한 일종의 우화(寓話, fable)였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머리카락보다 수만 배 가는 반도체 회로의 설계도, 레이아웃이었고,

'옛날이야기'는 상사가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쏟아내는 지루한 훈화였다.

'쌓기 놀이'는 웨이퍼가 담긴 '포스비'라고 불리는 FOSB(Front Opening Shipping Box)를

손으로 들고 측정실로 옮겨 쌓는 작업이었다.


위 사진 세 장은 2022년 유치원 학부모 초청 행사에서 찍은 것.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국내 반도체 회사로 이직한 지 몇 년이 안 된 때였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센서를 개발하는 부서였다.

공정을 마친 지름 30cm의 웨이퍼는 한 장당 천만 원을 넘긴다.

대부분은 자동화 설비가 운반하지만, 특정 구간만큼은 엔지니어가 직접 손으로 옮겨야 했다.

웨이퍼 여러 장이 담긴 FOSB를 들고 걸을 때면

'혹시 떨어뜨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걸음이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졌다.


해외 경력까지 있는 수석급 엔지니어가 이런 수작업을 한다는 게 씁쓸했다.

그래도 주어진 일은 하는 성격이라 군말 없이 했다.

그런데 문득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운 개념 하나가 떠올랐다.

FOSB를 들고 걸은 나는 과연 물리적으로 '일'을 한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다.

나는 엄밀히 말해 일을 하지 않았다.


일(W), 즉 work는 이렇게 정의된다.

W = F · d · cosθ

힘(F)의 크기, 이동 거리(d), 그리고 방향(θ).

힘의 방향과 이동 방향이 같으면 일은 최대가 된다.

두 방향이 수직이면 cos90° = 0, 일도 0이 된다.

FOSB를 들어 올리는 힘은 위를 향했고, 나는 앞으로 걸었다.

힘과 이동이 수직. 내가 한 일은 0이다.

아무리 비싼 물건을 옮기느라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먼 거리를 걸었다 해도,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급여는 꼬박꼬박 들어왔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싶어 혼자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자주 '힘쓰는 것'과 '일하는 것'을 동일시하곤 한다.

바쁘게 움직이고 고군분투하는 모습만이 성실함의 증거라 믿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의 이면에는,

더 오래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은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철자가 닮은 두 단어—industrial은 '산업의', industrious는 '부지런한'—는

전혀 다른 뜻이다.



그 후로 200년 넘게 우리는 이 성실함의 함정에 빠져,

'무조건 열심히'라는 관성 속에 스스로를 가둬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특히 젊은 세대를 향한 조언으로 우리는 '방향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

내용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나는 물리학이 이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본다.


물리학에서 '힘(F)'은 방향성을 가진 벡터(vector)다.

힘에서는 방향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결과인 '일(W)'은 방향성이 없는 스칼라(scalar)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 '에너지(E)' 역시 스칼라다.

에너지는 방향이 없다.

다만 밀도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얻는다.


현대 사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방향성'은 에너지가 충분히 쌓인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미리 방향부터 고정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에너지가 먼저 응축되었을 때, 가야 할 방향은 저절로 드러난다.

남들이 모두 떠내려가는 흐름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만이 아니다.

쉽게 소진되지 않는, 밀도 높은 에너지 그 자체다.

이제 나는 물리학이 정의하는 에너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먼저 쌓아야 하는지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일과 에너지


물리학에서 일과 에너지의 단위는 둘 다 줄(J)이다.

1줄(J) = 1뉴턴(N) × 1미터(m) = 1kg·m²/s².

일이 과거완료형이라면

에너지는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진행형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포텐셜(potential)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아직 일로 전환되지 않은 위치에너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산꼭대기에 있는 큰 바위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상태일지라도

에너지는 변화를 일으킬 준비를 마친 채 내면에 응축되어 있다.


고립계(isolated system)에서 에너지는 형태를 바꿀 뿐 사라지지 않는다.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화학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변환되며 우주를 순환한다.

아인슈타인이 E=mc²을 통해 보여줬듯, 심지어 질량조차 에너지의 한 형태다.

우주 안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언제나 보존된다.

이 법칙이 나에게는 위로가 된다.

내가 쏟은 시간과 열정은 결코 허공으로 증발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성과라는 일로 나타났느냐,

아직 내면의 내공으로 쌓여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 전환되지 않은 것이다.

에너지는 보존된다.


대학 2학년 때 나는 고민이 많았다.

노느라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고,

인간관계에서도 자꾸 무언가가 어긋났다.

내 안의 에너지가 계속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열역학 수업에서 배운 내부에너지(internal energy)라는 개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ΔU = Q − W

열역학 제1법칙이다.

내부에 남는 에너지(ΔU)는 외부에서 받은 열량(Q)에서

내가 밖으로 한 일(W)을 뺀 값이다.

수식이 내 삶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받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많으면 내부는 비어간다.

그것은 물리학의 법칙이기도 했지만 당시 내 상태이기도 했다.



내부에너지, ΔU를 높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Q를 늘리거나, W를 줄이거나.

인생의 단계마다 Q와 W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독서와 달리기가 그 힌트를 줬다.


독서는 Q를 늘리는 일이다.

빠르게 읽고 덮어버리면 열량이 몸을 그냥 통과한다.

천천히 읽으며 밑줄을 긋고 여백에 생각을 적을 때

비로소 열량이 내부에 흡수된다.


달리기는 W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몸을 몰아붙이면 에너지는 바깥으로 과하게 소모된다.

팔의 흔들림, 어깨의 긴장, 보폭의 낭비를 걷어낼수록

같은 거리를 달리고도 내부에 더 많은 에너지가 남는다.


독서로 채우고 달리기로 다듬은 에너지가 내부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ΔU를 키우고 있다.


앞선 열역학 제1법칙이 에너지의 양에 대해 말했다면,

제2법칙은 그 방향을 말한다.


에너지가 전환될 때마다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entropy)는 항상 증가한다.

커피는 저절로 식고,

방은 가만두면 어질러지고,

지식은 쓰지 않으면 휘발된다.

자연은 언제나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른다.

산꼭대기에서 발원한 물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다 바다로 합류하듯,

낮은 곳으로, 넓은 곳으로, 무질서한 곳으로.

이것이 세상의 기본 방향이다.

순류(順流)다.


독서로 쌓고 달리기로 다듬은 내부 에너지도

가만히 두면 이 흐름을 따라 흩어진다.

읽은 것은 잊히고, 다듬은 몸은 다시 굳고, 쌓은 사유는 증발한다.

엔트로피 증가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흩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ΔU를 쌓아야 한다.

그것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가 자연의 흐름을 밀어낼 만큼 커진다.

역류(逆流)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렇다면 역류란 무엇인가.



역류의 재정의


'역류'라는 단어는 대개 불쾌한 이미지를 갖는다.

하수도의 역류, 역류성 식도염.

제 길을 가야 할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올라오는 고장 난 상태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서 역류는 차압(差壓)의 결과일 뿐이다.

밀도와 압력의 차이가 임계점을 넘으면

유체는 언제든 거꾸로 흐를 수 있다.

방향이 바뀌었을 뿐, 에너지는 여전히 제 법칙대로 움직인다.


나는 역행(逆行)과 역류(逆流)를 다르게 본다.


역행은 방향이 먼저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에너지를 밀어붙이는 힘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역행의 전형(典型)이다.

연어는 태어난 곳이라는 단 하나의 좌표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간다.

그 여정은 치열하고, 소모적이다.

산란을 마친 연어는 죽는다.

방향이 선명한 만큼 에너지는 그 방향으로만 쓰이고 결국 고갈된다.


역류는 다르다.

방향보다 상태가 먼저다.

내부에 에너지가 충분히 쌓였을 때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다.

압력이 높아지면 유체는 가장 자연스러운 틈을 찾아 흐른다.

내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쌓인 에너지가 스스로 방향을 만든다.

역행이 의지의 산물이라면 역류는 밀도의 결과다.


카뮈의 시지프는 역류하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린다.

그러나 시지프에게 정상은 종착점이 아니다.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오고, 그는 다시 아래로 걷는다.

그 반복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연어는 목적지에 도달하면 생이 끝난다.

시지프는 바위가 굴러 내려간 뒤 산을 걸어 내려오는 그 시간에

다시 에너지를 채운다.

카뮈는 그 시지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The struggle itself toward the heights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시지프는 왜 행복한가.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바위를 미는 그 행위 자체가 그의 내부 에너지를 높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오는 시간은 패배가 아니라 다시 에너지를 응축하는 시간이다.

소진되지 않는 사람, 그것이 카뮈가 그린 시지프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주 연어가 되라는 요구를 받는다.

선명한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달리라고,

에너지를 소모해서라도 방향을 증명하라고.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뒤 남는 것이 고갈뿐이라면

그 여정은 얼마나 허망한가.


역류는 억지로 물길을 거스르지 않는다.

내면에 에너지가 충분히 차오르면 흐름은 스스로 바뀐다.

그것이 역행과 역류의 차이다.



돌과 물


어린 시절 불렀던 동요를 다시 불러본다.

제목은 《돌과 물》이다.



바윗돌 깨뜨려 돌덩이.

돌덩이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


도랑물 모여 개울물.

개울물 모여 시냇물.

시냇물 모여 큰강물.

큰강물 모여 바닷물.


바윗돌이 모래알이 되는 것은 엔트로피의 증가다.

단단한 질서가 잘게 흩어지는 자연의 방향이다.

계곡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에너지의 변환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작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이것이 순류(順流)다.


그러나 나는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모래알을 다시 모아 보석 결정을 만드는 일.

흩어지는 엔트로피에 맞서 내부 에너지를 쌓는 일.

그것이 내가 말하는 역류다.


부모님이 계신 강원도 인제 하추리 계곡을 그려본다.

그 물줄기들이 모여 내린천이 되고,

내린천은 소양강을 지나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두물머리에서 한강을 만나 한강이 되어 서해로 빠져나간다.

나는 늘 아래로 내려가는 흐름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하추리 계곡을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어디에 도착할까?

설익산 울산바위 즈음에 닿고,

거기는 파랗게 펼쳐진 동해가 보이리라.


영어로 watershed moment라 한다.

한국어로는 분수령(分水嶺).

그 경계에서 한 방울의 물은 이미 방향이 정해진다.

동해로 짧고 급하게 갈지, 서해로 길고 느리게 갈지.

우리 삶의 선택도 그렇다.

오늘 책상 앞에 앉느냐 눕느냐,

운동화 끈을 묶느냐 그냥 두느냐.

그 미세한 차이가 10년 뒤의 물길을 가른다.



김금희의 《복자에게》에는 제주 속담 하나가 나온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


바다는 모든 물길을 받아내어 하나의 흐름으로 녹여낸다.

역류는 고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더 큰 흐름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하는 과정이다.


할 수 없는 일을 미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밀어 올려 낙차를 만들자.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반복해서 하는 것의 합이다.

계곡을 따라 끝까지 올라보니

정말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