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가 주류가 되지 않게

3부 역류 - 네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주류에 순응하다 공황장애를 겪고 판단중지(에포케)의 중요성을 깨달음.
· 힙합·골목·기업에서 역류가 주류로 변질되는 공통 패턴을 보임.
· 제품의 품질이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계획적 진부화'를 삶에 적용해 역류를 지속.
· 거스르되 거슬리지 않는 정제된 역류가 최종 지향점.



판단중지 (Epoché)


나는 주류를 좋아했었다.

술 이야기가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가려는 방향(主流)에 맞춰 나의 삶의 궤도를 수정해갔다.

술로 비유하자면 미즈와리(水割り) 같은 삶이었다.

위스키에 물을 타 도수를 낮추듯,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살아왔다.

정 맞을까 두려워 스스로를 깎아내린 평범한 돌덩어리로 살았다.


하지만 거대한 흐름의 실체는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이었다.

남을 의식하며 연기하고, 내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며 살았다.

정작 내가 먼저 타인에게 지옥을 선사하고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바구니 속 게들이 서로를 끌어내리듯,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나날이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던져진 30대의 삶은 생각보다 거칠었다.

애써 잡으려 할수록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의 통제권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당시에는 내 몸과 마음에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독서와 글쓰기로 과거와 현재를 재해석했다.
달리기도 도움이 되었다.
호흡과 몸동작에 집중하는 순간이 명상이었다.
그렇게 마음챙김(mindfulness)을 배웠다.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다.
명상의 첫 단계는 에포케(Epoché, 판단중지)였다.
몸의 증상과 인간관계의 문제를 잠시 괄호 안에 넣는 일이다.


이런 내가 대견했다.

건강한 몸에 책으로 지혜까지 더하니 '갓생'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역류의 시간이 몇 년 지속되자 조용한 오만이 고개를 들었다.

나처럼 살지 못하는 이들을 은근히 깔봤다.

내 마음대로 판단했다.

나의 역류가 또 다른 주류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다니던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떠오른다.

규모나 명성에 비해 늘 온화하고 겸손한 분이었다.

어느 날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끔 일부러 늦잠을 자고 새벽 예배에 나가지 않습니다."

매일 빠짐없이 출석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게으르다 판단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고 한다.

우월감이 자라나기 전에 스스로 자리를 비우는 것.

경건함이 권력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이 말씀이 오래 남는다.


내 방식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순간, 건강했던 저항은 독선이 된다.
역류가 고착된 주류로 변하는 사례는 흔하다.
서브컬처가 거대한 상업적 밈이 되어 타자를 배척한다.
골목의 예술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난다.
혁신을 외치던 스타트업은 어느새 포식자가 된다.
나의 오만을 다잡기 위해, 역류가 주류로 변질되는 현장들을 들여다보려 한다.



'Hip함'의 유통기한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한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된 노래의 가사다.
힙합을 부르면서 스스로 힙합을 부정하는 가사.
이런 역설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날것의 에너지는 젊은 세대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힙합은 주류를 거부하는 음악을 넘어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그런데 그 저항 정신을 잃는다면 팬들도 실망하지 않을까.
1960년대 유럽의 상황주의자들은 이를 포섭(recuperation)이라 불렀다.
저항하던 상징이 자본에 의해 상품화되어 도리어 체제를 공고히 하는 현상이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티셔츠 위의 소비재가 된 것처럼.
힙합이 처음의 저항 정신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은어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젊은 세대의 또래 문화는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단절 자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런데 TV 자막에 등장하고 광고 카피로 쓰이는 순간, 은어는 생명력을 잃는다.
'신세대'라는 말은 곧 '구세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동어반복이다.
90년대의 파격이었던 오렌지족이 지금의 꼰대가 되었듯, 세상을 거스르던 밀레니얼도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역동은 관성으로 굳는다.



우리 어머니는 TV 트로트 프로그램에 열광하신다.
지극정성으로 응원하는 가수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궁금해진다.
트로트가 젊은 시절의 향수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애달픈 곡조에 끌리는 것인가.
후자라면 나도 그 나이쯤 트로트의 팬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향수 쪽에 무게를 둔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배경음악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을 들으면 그때의 공기와 감정이 함께 돌아온다.
나에게는 90년대 대중가요가 그렇다.
그런데 그 향수에 집착해 내 취향만을 강요하면 꽉 막힌 구세대가 된다.
지금 내가 멋이라 믿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이미 낡은 트로트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겸손은 시작된다.


끝까지 역류이고 싶다면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믿는 '힙함'에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해야한다.

새로운 세대의 낯선 문화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소음조차 하나의 생명력으로 인정해야 한다.

어제의 멋에 머물러 고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비워낼 때,

비로소 주류라는 관성에서 벗어난 역류로 남을 수 있다.



쫓겨나는 원주민


도시의 골목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가난하지만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낡고 버려진 골목에 숨을 불어넣는다.
뉴욕의 소호가 그랬고, 서울의 성수동이나 익선동이 그랬다.
공장의 기름때와 낡은 한옥의 고즈넉함 위에 덧입힌 분위기는 대중을 매혹한다.
그 매혹을 소비하려고 거대 자본이 밀려드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공간을 빛내던 예술가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난다.
그 자리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들어온다.
개성은 죽고 상업적 껍데기만 남는다.
또 한 번의 포섭이다.


이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 한다.

이야기에 끌린 사람이 몰려오고, 사람이 몰리니 돈이 따라온다.

돈이 들어오면 땅값이 뛰고, 땅값이 뛰면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가장 먼저 쫓겨난다.

창조자가 가장 먼저 퇴장하는 아이러니.

이것이 전 세계 도시에서 반복되는 공식이다.

자본은 역류의 에너지를 빨아먹고, 껍데기만 남긴 채 다음 골목으로 이동한다.

유목민처럼 떠도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자본이다.

그런데 우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너도 나도 '나만 알고 싶은 곳'을 SNS에 올리는 순간,

그 골목은 이미 고속도로가 되어버린다.



이 반복을 끊으려는 시도도 있다.

서울 성동구는 2015년 전국 최초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를 만들었다.

지속가능발전구역을 지정해 프랜차이즈 입점을 제한하고,

임대료를 물가상승률 수준으로 묶는 건물주에게 용적률 인센티브를 줬다.

파리에서는 시 정부가 직접 상가를 매입해 소규모 상점에

저렴하게 임대하는 비탈 카르티에(Vital'Quartier) 프로그램을 2004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선을 긋는 행위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보존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성수동마저 연무장길 일대에서는

팝업스토어와 대기업 매입이 몰리며 임대료가 다시 급등하고 있다.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돌아오는 질문은 하나다.

골목의 개성과 자본의 편리함은 공존할 수 있는가.

섞이되 녹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인물 주의보


코닥은 필름 시장의 90%를 지배하던 절대 강자였다.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도 코닥이었다.
문제는 필름의 수익이 너무 컸다는 점이다.
자기가 만든 기술을 묻어두었다.
그 기술로 다른 회사가 코닥을 이겼다.
위협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왔다.


IT 업계에서는 이 순환이 더 빠르다.
파이어폭스는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독점을 깨려고 등장했다.
크롬도 가볍고 빠른 웹을 내세우며 도전했다.
전 세계 브라우저 시장의 70%를 넘긴 지금, 크롬은 한때 자기가 무너뜨린 것과 닮아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며 이 패턴을 숱하게 봐왔다.
처음에는 작은 팀이 미친 듯이 달려서 신공정을 개발한다.
그 기술이 양산 궤도에 오르면 조직이 커진다.
회의는 늘고 결재 라인은 길어진다.
에너지가 식는다.
제국은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무너진다.



이 관성을 경계한 사례도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매년 주주 서한에서 'Day 1(첫날)' 정신을 강조했다.

규모가 아무리 커져도 여전히 시작하는 단계라는 선언이다.

Day 2가 되는 순간 정체와 사멸이 시작된다는 경고였다.

넷플릭스 역시 '규칙 없음(No Rules Rules)'이라는 문화를 내세우며,

주류 조직이 빠지기 쉬운 절차의 늪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구호만으로 역류의 심장이 뛰지는 않는다.

Day 1을 외치는 아마존조차 물류 노동자의 근무 환경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혁신을 표방하는 기업이 내부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위계를 유지하는 장면을 너무 자주 본다.

조직이 역류의 체질을 지키려면 구호가 아니라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의사결정의 층위를 줄이고, 실패를 허용하는 문화를 제도로 만들고,

무엇보다 스스로 내려올 줄 아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혁신 기업도 자기가 무너뜨린 공룡의 뼈 위에 같은 모양으로 굳어간다.



계획적 진부화


신기하게도 휴대폰을 2년쯤 쓰면 이곳저곳이 말썽을 부린다.

또한 많은 사용자들이 갑자기 느려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음모론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느낌만은 아닐 수도 있다.


1924년, 전 세계 전구 회사들이 스위스에 모여 회의를 했다.

2,500시간이던 전구 수명을 1,000시간으로 줄이자는 합의였다.

제너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슬론은 엔진은 그대로 두고 외관만 바꿔 매년 신차를 출시했다.

멀쩡한 제품을 낡은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 새것을 사게 하는 전략.

이것을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부른다.

스마트폰 배터리부터 운영체제 업데이트까지, 이 전략은 지금도 도처에 숨어 있다.



이 개념을 개인의 삶에 뒤집어 적용하면 어떨까.

기업의 계획적 진부화가 제품을 일부러 낡게 만드는 것이라면,

개인의 계획적 진부화는 어제의 나를 일부러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다.

기업은 소비자를 착취하기 위해 진부화를 설계하지만,

개인은 자기 오만을 해체하기 위해 스스로 진부화를 선택한다.


앞서 살펴본 세 장면을 떠올려보자.

힙합은 저항의 에너지가 상품이 되는 순간 멋을 잃었다.

골목은 예술가의 독창성이 자본에 포섭되는 순간 박제가 되었다.

기업은 혁신의 절박함이 관료주의로 굳는 순간 공룡이 되었다.

공통점은 하나다.

자신이 이룬 것에 안주한 순간, 역류는 주류로 변질되었다.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운동을 시작해 몸이 바뀌면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 여긴다.

독서 습관이 자리 잡으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무식하다 단정짓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쓰지 않는 사람의 표현력을 무시한다.

어제까지 나를 살린 역류가 오늘의 잣대가 되어 타인을 재단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역류가 주류가 되는 경로다.


그래서 나에게는 계획적 자기 진부화가 필요하다.

어제의 성취를 의도적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것으로 선언하는 일이다.

운동을 꾸준히 했다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처음 운동화를 신던 그 두려움으로 돌아가는 것.

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숫자가 아니라, 지금 펼친 한 쪽에서 다시 초보자가 되는 것.

아마존의 'Day 1'이 조직을 위한 구호라면,

나의 'Day 1'은 매일 아침 어제의 나를 폐기하겠다는 서약이다.


계획적 진부화의 핵심은 낡음을 설계하는 것이다.

기업은 제품을 낡게 만들지만, 나는 오만을 낡게 만든다.

성취를 폐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취 위에 올라앉아 타인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폐기하라는 뜻이다.

새벽 기도를 일부러 거르던 그 목사님처럼,

성실함이 남을 심판하는 칼이 되기 전에 스스로 칼집에 꽂아두는 것.

그것이 역류가 주류가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기술이다.



거스르되 거슬리지 않는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고 했고, 노자는 이를 도(道)라 불렀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힙합의 멋도, 골목의 개성도, 기업의 혁신도 고착되는 순간 생명력을 잃었다.

역류가 주류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 자리에 앉는 순간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아류(亞流)는 주류를 흉내 내고,

시류(時流)는 주류를 좇으며,

표류(漂流)는 방향을 잃고 떠돈다.

일류(一流)는 비주류로 살면서도 스스로 삶의 주인임을 안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리에 오르려 애쓸 필요가 없다.

이미 자기 삶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되 타인의 삶에는 거슬리지 않는 역류가 되고자 한다.

내 방식이 옳다고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독선을 버리고,

나만의 물길을 묵묵히 내는 저항을 택한다.

새벽 기도를 일부러 거르던 그 목사님처럼,

어제의 성취를 스스로 진부화하며 칼집에 꽂아두는 것.

그것이 역류가 주류가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기술이다.


글의 시작에서 말했던 미즈와리의 삶을 뒤집는다.

위스키에 물을 타 도수를 낮추는 혼탁한 안전함이 아니라,

물과 위스키를 따로 마주하는 정제의 과정을 걷겠다.

매 순간 어제의 나를 진부화하며, 주류라는 취기에 취하지 않겠다.


거스르되 거슬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주류가 되지 않는 역류의 삶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