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일류의 조건』

3부 역류 - 다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이반 일리치는 사회가 정해준 순류를 따르다 내부에너지 바닥인 채 죽음을 맞았음.
· 사이토의 일류는 훔치고 깎아내고 밀어붙이며 자기만의 물줄기를 만들었음.
· 순류에 맡긴 삶은 도착하면 텅 비고, 자기 흐름을 만든 삶은 흐르는 동안 차오름.
· 인생 후반부를 회문처럼 대칭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우아한 역류.



회문형 인생


거꾸로 흐르는 것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어쩌면 우리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낮 시간대 집에서 글을 쓰다 보면 아파트 안내방송을 자주 듣는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도↗미↗솔↗도,

음계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 우리의 주의를 환기한다.

방송이 끝나면

도↘솔↘미↘도,

같은 음이 거꾸로 내려온다.

올라간 음이 내려오고, 시작이 끝을 닮는다.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꾸로 원점으로 돌아오는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된다.


시간적 대칭을 내 삶의 궤적에 대입해 보고싶다.

10세 이전,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뛰어놀았다.

10대, 제도의 틀 안에서 공부했다.

20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들을 찾아서 열중했다.

30대, 커리어를 쌓으며 성장했다.

40대, 쌓은 것을 증명하며 달렸다.


50대인 지금, 커리어의 정점은 이미 지났다.

인생을 한 장의 종이접기에 비유한다면,

접힌 자리를 지나 펼쳐지는 쪽에 서 있다.

여기서부터는 회문의 뒷절반이다.

앞절반의 데칼코마니이되, 똑같은 반복은 아니다.


50대에는 30, 40대에 쌓아올린 것을 조금씩 나눠주며,

풍선에서 천천히 바람을 빼듯 내려온다.

60대에는 20대처럼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다시 배움터로 나간다.

이번에는 스펙이 아니라 앎 자체를 즐기며.

70대에는 깔깔대며 10대의 싱그러운 에너지는 아니지만 신나게 놀고 싶다.

80대가 되면 활동력이 떨어져 어린아이처럼 하루가 길게 느껴질 것이다.

어린 나의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반응해주던 어른들이 있었듯,

나도 그런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삶의 형태를 '회문형 인생'이라 부르기로 했다.

회문(回文, palindrome).

앞에서 읽으나 뒤에서 읽으나 같은 말이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별똥별.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이 자기소개할 때 쓰던 말들이다.

이름 자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회문이다.


회문은 단순한 언어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떠남의 서사가 정확히 뒤집혀

귀환의 서사가 되는 회문형 구조를 품고 있다.

타지마할은 중앙의 돔을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이 완벽하게 포개진다.

네 개의 첨탑, 좌우의 모스크와 영빈관까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대칭이다.

생명의 설계도인 DNA에도 회문이 숨어 있다.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는 DNA 서열의 대칭 구간을 뼈대 삼아 작동한다.

대칭이 없으면 가위는 조립되지도 않는다.



나의 공부도 회문처럼 되돌아갈 작정이다.

나의 첫 번째 스무 살은 12년간의 공교육이 대입이라는 결실로 맺어지던 때였다.

나의 두 번째 스무 살에는 딸 하윤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다가올 나의 세 번째 스무 살.

그때쯤이면 하윤이도 어느덧 35학번 새내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들이 문턱을 낮추고 인프라를 대중에게 개방할 즈음,

나도 캠퍼스로 돌아가면 좋겠다.

적어도 많은 장서를 품고 있는 도서관을 드나들고 싶고,

대학원이나 평생교육원의 문을 두드릴 수도 있고,

운이 좋아 그간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인정받는다면 교단에도 서볼 수 있을 것이다.


전반부가 나와 주변의 기대에 맞춰 흘러간 순류(順流)였다면,

후반부는 오롯이 내가 선택한 역류(逆流)로 살고 싶다.

이 역류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친다.

사회가 정해준 방향으로만 떠밀려 가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 남자의 이야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자기만의 고유한 물줄기를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주는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

나의 회문형 인생을 완성할 지혜를 이 두 권에서 구하려 한다.




흐름과 대칭


시간은 흐른다.

물리학의 거의 모든 법칙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성립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열역학 제2법칙이다.

깨진 컵은 저절로 붙지 않고, 식은 커피는 다시 뜨거워지지 않는다.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물리학자 에딩턴은 이를 '시간의 화살'이라 불렀다.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을 감각하는 것이다.

흩어지는 에너지가 시간의 방향을 정한다.


흐름은 일방향이다.

강물은 낮은 곳으로만 향하고, 증가한 엔트로피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고요히 서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풍수지탄(風樹之歎).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동서양 모두 알고 있었다.


동양에서 흐를 류(流)는 단순히 물의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유세), 정처 없이 떠도는 것(유랑), 풍조가 번져나가는 것(유행).

시간과 공간과 인간사를 아우르는 불가역적 방향성이 이 글자 안에 들어 있다.

흐름 앞에서 모든 것은 앞으로, 아래로, 흩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일방향의 흐름 속에 대칭이 더해지면 어떤가.



1918년, 독일의 수학자 에미 뇌터(Amalie Emmy Noether)는 하나의 정리를 증명했다.

"물리 시스템에 연속적인 대칭이 존재하면,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이 반드시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생긴다.


오늘 공을 던져도 내일 던져도 포물선은 같다.

물리 법칙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 이것이 시간의 대칭이다.

그 대가로 에너지는 공짜로 생기지도, 허공으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에너지 보존이다.


서울에서 당구를 치든 부산에서 치든, 같은 힘으로 같은 각도를 주면 공은 같은 방향으로 굴러간다.

물리 법칙이 여기와 저기 사이에서 달라지지 않는 공간의 대칭은 운동량 보존을 낳는다.

피겨 선수가 팔을 몸에 붙이면 회전이 빨라지고 벌리면 느려지듯,

어떤 방향으로 돌리든 법칙이 같은 회전의 대칭은 각운동량 보존으로 이어진다.


뇌터의 정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연은 시간, 장소, 방향에 관계없이 같은 규칙으로 움직인다.

그 대가로 에너지, 운동량, 각운동량은 절대 허공에서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대칭이 있으니 보존되고, 보존되니 대칭이 있다.


이것을 삶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대칭 없이 흐르기만 하는 삶은 엔트로피를 따라 흩어진다.

그러나 삶에 대칭이 들어오는 순간, 보존되는 무언가가 생긴다.

회문형 인생이란 흐름 위에 대칭이라는 중심축을 세우는 행위다.

대칭이 있으면 삶의 에너지는 흩어지지 않고 보존된다.


그렇다면 대칭 없이 흐름에만 몸을 맡긴 삶은 어떻게 되는가.

한 남자의 생을 들여다본다.



순류에 휩쓸린 자의 비극


레프 톨스토이는 러시아 문학의 거인이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문학의 정상에 섰지만,

그의 인생관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가장 날카롭게 응축한 작품은

말년에 발표한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이다.


이 소설 자체가 회문형 구조를 띤다.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되, 그 사이에 탄생부터 임종까지의 생애가 끼워져 있다.

끝을 먼저 보여준 뒤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끝으로 수렴하는 구조다.

이야기는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에서 시작한다.

조문 온 동료들의 머릿속은 고인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빈자리가 가져다줄 인사이동과 승진 계산으로 가득하다.

죽음이라는 끝을 먼저 비춘 뒤,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의 생애를 되짚는다.

앞에서 읽으면 찬란한 성공이었던 45년이, 끝에서부터 뒤집어 읽으면 철저한 소진으로 전락한다.


톨스토이는 장례식을 닫은 뒤, 2장 첫 문장에서 그의 인생을 정의한다.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좋은 학교, 판사 임용, 순조로운 승진, 넓은 집, 체면 있는 결혼.

그는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순서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오직 더 좋은 자리와 돈을 좇으며 고통을 회피하는 데 급급했다.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한 적이 없다.

거대한 강물에 떠내려가는 순류 그 자체였다.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허영(vanity)이었다.

톨스토이는 그가 새집을 꾸미며 집착하던 모습을 이렇게 썼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큰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공유하는 것이 있었다.

비단, 흑단, 꽃나무와 양탄자, 청동 조각품 등...(중략)...

그의 집도 그런 집 안의 풍경과 너무 비슷했으므로 딱히 주의를 끌 만한 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뭔가 특별해 보였다.


바니타스 바니타툼(Vanitas vanitatum), 헛되고 헛되도다.

구약성경 전도서의 이 구절이 그의 삶을 요약한다.

껍데기만 채운 45년이었다.



뇌터의 정리로 말하면, 이반 일리치의 삶에는 대칭이 없었다.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쉬지 않았다.

쌓기만 하고 나누지 않았다.

대칭이 없으니 보존되는 것도 없었다.

에너지는 체면과 승진이라는 바깥으로 흩어지기만 했고,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순류에 균열을 낸 것은 사소한 낙상이었다.

새집에 커튼을 달려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옆구리를 부딪힌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깊어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자,

이반 일리치는 병상에 누워 자신의 생을 처음으로 되감기 시작한다.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간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던 어린 시절이었다.

출세의 사다리를 높이 오를수록 삶의 폭은 오히려 좁아졌다.


죽음을 앞둔 병상에 두 인간군이 대조된다.

가족과 의사와 동료들은 죽음을 외면한다.

곧 나을 것이라는 거짓 위로로 현실을 덮는다.

반면 젊은 농부 출신의 하인 게라심만이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곁을 지킨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인간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이반 일리치는 허울뿐인 삶에 대한 미련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모두 내려놓는다.

아들의 손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아내를 바라보며 안됐다고 중얼거린다.

모든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것은 더 이상 없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쭉 뻗은 채 죽었다.


들숨에서 멈춘 죽음.

평생 바깥의 것을 들이마시기만 했던 사람의 마지막이 들숨(吸)이었다.

내쉬지 못한 숨.

돌려주지 못한 삶.

대칭 없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 순류의 끝이었다.



자기 흐름을 만드는 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 수 있는가.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는 수만 권의 장서 중 자기계발서 단 한 권을 꼽으라면 이 책이라고 했다.

시대를 읽는 책이 아니라 시대를 유도하는 책이라는 평가였다.


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 즉 일류는 무엇이 다른가.

사이토는 그 차이를 세 가지 힘으로 압축한다.


첫째, 훔치는 힘이다.

타인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모방이 아니다.

뛰어난 사람의 기술 이면에 숨은 작동 원리를 간파한 뒤 자신의 능력과 결합해 완전히 체화하는 것이다.

사이토는 시드니 올림픽 일본 수영 선수단의 사례를 든다.

선수의 몸을 와이어로 묶어 세계기록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체험시킨다.

그 속도를 한 번 몸으로 느끼고 나면 막연한 불안이 사라진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도달해야 할 감각이 선명한 것은 전혀 다른 상태다.

일류의 감각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훔치는 것이 숙달의 첫 단계다.


둘째, 요약하는 힘이다.

핵심과 비핵심을 가르는 능력이다.

사이토는 『쓰레즈레구사』의 활쏘기 일화를 인용한다.

화살 두 개를 손에 쥔 제자에게 스승이 말한다.

초보자는 화살 두 개를 동시에 쥐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화살을 믿고 첫 번째를 소홀히 쏘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에게는 화살 한 개밖에 없다고 생각하라.

요약이란 결국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다.

믿는 구석을 하나씩 버릴 때 남는 화살 한 대에 온 힘이 실린다.


셋째, 추진하는 힘이다.

훔치고 깎아낸 것을 현실로 밀어붙여 결과를 내는 동력이다.

확신을 가지고 임하느냐 아니냐가 숙달의 분기점이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분명히 이 교실에서 잃어버렸다는 확신으로 찾을 때와,

확신 없이 여기저기를 뒤질 때는 행동의 밀도부터 다르다.



괴테, 무라카미 하루키, 이치로, 안도 다다오.

책에 등장하는 일류들은 분야가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남의 것을 훔쳐 자기 것으로 바꾸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깎아내고,

깎아낸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 사람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사이토가 말하는 세 가지 힘은 이반 일리치에게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훔치지 않았다. 사회가 건네준 공식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깎아내지 않았다. 체면, 승진, 넓은 집,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했다.

밀고 나가지 않았다. 자기 방향이 없으니 밀어붙일 것도 없었다.

세 가지 힘을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훔치는 힘은 폴리(Poly)다.

낯선 곳에서 재료를 가져오되, 자기 안에서 변환한다.

요약하는 힘은 메타(Meta)다.

가져온 것 중 진짜와 허상을 가르고 깎아낸다.

추진하는 힘은 파라(Para)다.

깎아낸 것을 현실로 밀어붙이되, 혼자가 아니라 곁의 누군가와 함께 간다.

이반 일리치에게는 파라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하인 게라심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너무 늦었다.


일류(一流).

이 단어 안에 이미 흐를 류(流)가 들어 있다.

사이토가 그리는 일류란 남이 매겨준 등급의 꼭대기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만의 리듬과 밀도로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일류는 도달하는 명사가 아니라 흘러가는 동사다.


가장 우아한 역류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는다.


이반 일리치는 세상이 정해준 물줄기를 따라갔다.

방향을 의심하지 않았고, 내면을 채우지 않았다.

도달한 곳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텅 빈 침대였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생을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회문의 후반부를 쓸 시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이토가 분석한 일류들은 달랐다.

남이 파놓은 흐름에 합류하지 않았다.

훔치고, 깎아내고, 밀어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기만의 물줄기를 팠다.

그 흐름 안에서 에너지는 소진되지 않고 응축되었다.

순류에 몸을 맡긴 사람은 도착한 순간 텅 비고,

자기 흐름을 만든 사람은 흘러가는 동안 차오른다.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숨을 다시 떠올린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한중간에 그대로 멈춘 들숨.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첫 울음은 날숨(呼)이다.

자기 존재를 세상에 내보내는 행위다.

그리고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 마지막 숨은 본래 날숨이어야 한다.


호흡(呼吸).

내쉴 호(呼)가 먼저 오고, 들이쉴 흡(吸)이 나중에 온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순서가 글자 안에 들어 있다.


회문형 인생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전반부는 흡(吸)의 시간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우고, 쌓고, 들이마시는 시간.

후반부는 호(呼)의 시간이다.

쌓아온 것을 내쉬고, 나누고, 돌려주는 시간.



나는 지금 회문의 꼭짓점을 지나고 있다.

앞쪽 절반은 들이마시며 살았다.

이제 남은 절반은 내쉬며 살 차례다.


이반 일리치처럼 들숨에서 멈추는 삶이 아니라, 충분히 내쉬고 나서 고요히 눈을 감는 삶.

할 수 없는 일을 미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모아 낙차를 만들자.

물은 스스로 만들어낸 높낮이의 차이에서 흐르기 시작한다.


삶을 뒤에서 읽으면 끝이 시작이 된다.

회문형 인생이란 세상의 순류에 맞서 나만의 물결을 일으키는 가장 우아한 역류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