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역설의도 - 두번째 이야기
· 척하기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수억 년간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문법.
· 똥고집을 일관성으로, 가식을 체면으로 포장했던 척하기는 버릴 것.
· 직장은 힘 빼고 부캐인 척, 월급 받으며 나를 계발하는 역할놀이의 무대.
· 나다운 척하기를 무기 삼아 때가 되면 피고 지는 꽃처럼 유연하게 살 것.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던가.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여러번 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꽂힌다.
수십 번을 돌려 본 시트콤 《프렌즈》에서 그렇게 꽂혀 외워진 '풀꽃' 같은 단어 두 개가 있다.
'Flora'와 'fauna'이다.
시즌 5에서 로스와 피비가 연상 게임을 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피비가 로스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데, 정작 그 이유를 본인도 기억하지 못한다.
답답했던 로스가 빠르게 묻고 피비가 곧바로 답하는 게임으로 무의식 속 원인을 캐낸다.
"Ross: What do you like better, flora or fauna?" (어떤 게 더 좋아, 식물 아니면 동물?)
"Phoebe: Fauna." (동물)
결국 피비가 화났던 것은 자신의 꿈속 기억 때문이었다.
꿈에서 로스가 자기를 지루한 사람이라 비난했던 것이다.
피비 본인도 그게 현실이 아닌 꿈이었음을 깨닫고, 오해는 실없이 풀린다.
Flora와 fauna.
미국에서 10년을 살면서도 일상에서는 쓸 일이 없던 단어다.
식물이 좋으냐 동물이 좋으냐를 물을 때는 'plant'나 'animal'이면 충분하니까.
두 단어 모두 로마 신화의 여신 이름에서 왔다.
Flora는 꽃과 봄의 여신으로 식물을 뜻하고,
Fauna는 대지와 풍요의 여신으로 동물을 뜻한다.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도 피비처럼 fauna라고 답했을 것이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식물보다 동물이 좋다.
강아지 두 마리,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사는 까닭도 있지만,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과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 사랑스럽다.
반면 식물은 나에게 늘 배경화면 같다.
이름과 생김새가 함께 떠오르는 꽃은 손에 꼽는다.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관상식물(觀賞植物)의 이름을 검색해 외워도 며칠이면 잊는다.
어쩌면 나에게는 식물에 대한 안면인식장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야마모토 코우시의 소설 《수상한 이발소》를 읽다가 세 가지 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팔꽃(朝顔)은 아침에 피는 꽃이고, 낮에 피는 건 메꽃(昼顔), 저녁에는 박꽃(夕顔)."
나팔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메꽃과 박꽃은 이름은 익숙한데 생김새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찾아보니 셋 다 나팔 모양의 깔때기꽃이었다.
서로 닮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들인데, 각자 꽃봉오리를 여는 시간대가 다르다.
옛날 일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따라 아침얼굴(朝顔), 낮얼굴(昼顔), 저녁얼굴(夕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직관적이고 귀여운 작명이다.
피는 시간만 다른 것이 아니다.
예전 시골의 한여름, 아침 풀밭 사이에는 이슬을 머금은 나팔꽃이 지천이었다.
연분홍 꽃잎 뒤로 주변 식물을 감아 올라간 덩굴손이 보였다.
나팔꽃 덩굴은 늘 반시계 방향으로 감긴다.
지지대에 닿으면 접촉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굴촉성(屈觸性, thigmotropism)이 작동한다.
줄기는 빛을 향해 자라는 굴광성(屈光性, phototropism)도 지닌다.
이 밖에도 식물은 중력, 수분, 화학 물질 같은 주변 신호에 반응하는 굴성(屈性)을 지닌다.
빛이든 물이든 중력이든, 식물은 환경의 신호에 따라 방향을 바꾼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도 때와 상황에 따라 꺼내놓는 얼굴이 다르다.
어쩌면 그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의 무늬인지 모른다.
여러 페르소나를 지닌 자신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변절도 아니고 위선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해 온, 오래된 생존 전략이다.
식물보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동물의 전략은 한층 노골적이다.
진화생물학에서는 다른 생물이나 환경의 모습을 흉내 내는 현상을 의태(擬態, mimicry)라고 부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이다.
독이 없고 무해한 종이 유독하고 위험한 종의 외양을 빌려 포식자를 속이는 방식이다.
산누에나방은 날개에 올빼미의 매서운 눈을 꼭 닮은 커다란 무늬를 달고 있다.
천적인 새가 다가오면 그 즉시 날개를 활짝 편다.
작은 새의 눈에는 거대한 맹금류가 자기를 노려보는 것처럼 비친다.
인도네시아 해역에 사는 흉내문어(mimic octopus)의 '척하기'는 한층 다채롭다.
상황에 따라 넙치, 바다뱀, 해파리 등 다른 종의 모양과 유영 방식으로 순식간에 변신한다.
하나의 몸뚱이에 열 개가 넘는 페르소나를 지닌 셈이다.
⠀
이 모든 기만술은 수억 년간 누적된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의 결과물이다.
자연이 가르친 것은 정직하라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남으라가 아니었을까.
인간은 몸 대신 성격과 태도를 교묘히 바꾸는 쪽으로 진화했다.
초연결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의 '성격적 의태'는 더 큰 선택압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의 '척하기'를 하면서 살까.
지금 신(臣)에게 있는 열두 '척'보단 많지 않을까.
그 열두 척도 크게 나누면 두 종류이다.
'있는데 없는 척'과 '없는데 있는 척'이다.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화법인 에이로네이아(eironeia)가 전자에 해당한다.
아이러니(irony)의 어원이기도 한 이 말은, 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지는 화법을 뜻한다.
소피스트들과 논쟁할 때도 이 방법으로 그들 스스로 자기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아무리 진리를 향한 선한 의도였다 한들, 당하는 소피스트들은 얼마나 아니꼬웠을까.
후자인 '없는데 있는 척'은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가득하다.
아는 척, 잘난 척, 고상한 척, 소설 속 어른들은 저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하며 산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그런 어른들을 경멸하며 포니(phony), 즉 가식적인 가짜라 불렀다.
소피스트이든 콜필드이든, 척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늘 있어 왔다.
그런데 왜 인간의 척하기는 사라지지 않을까.
척하기가 생존에 꼭 필요해서 주변의 반응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부류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신의 척하기가 절대 들키지 않았다고 믿으며 '역시 나는 사회생활 천재야' 하고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하는 쪽도 관계를 생각해 상대의 가식을 짐짓 모르는 '척'하고 넘어간다.
누군가의 척하기 위에 타인의 모른 척이 쌓이고, 그 위에 또 다른 척하기가 얹힌다.
긴 시간에 걸쳐 유전자에 새겨진 특성이니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바꿀 필요도 없다.
척하기를 잘 이용해 우리 삶에 보탬이 되게 하면 된다.
다만 내 경험에서 배운 한 가지가 있다.
다른 사람도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똑똑해서 나의 얄팍한 척하기를 간파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척하기는 결국 우리를 비호감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속내를 들킨 줄도 모르고 혼자 고단수인 양 뿌듯해하는 것처럼 창피한 일은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되는 척하기가 두 가지 있다.
일관성이라는 '척'과 체면이라는 '척'이다.
나의 일관성에 대한 집착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그저께 했던 말이, 어제 했던 행동이 오늘의 나를 올가맸다.
아닌 줄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이를 줏대니 일관성이니 하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해 왔다.
일관성을 지키면 사람들이 나를 높이 봐줄 거라 여겼지만, 착각이었다.
그것은 일관성이 아니라 똥고집이었다.
생각이 바뀌어 이전의 내가 틀렸음을 알았다면 그냥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 불편함을 피하려 이미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을 꾸역꾸역 껴입고 버텼던 것이다.
나팔꽃 덩굴손이 곧게만 자랐다면 주변 구조물을 타고 올라 더 많은 햇볕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일관성(一貫性) 대신 굴성(屈性)의 중요함을 좀 더 젊은 날에 깨달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다음은 '없는데 있는 척'하며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체면(體面)이다.
어쩌면 체면은 동아시아 문화권이 강박적으로 공유해 온 일종의 집단적 의태이다.
중국에는 타인 앞에서 수치를 당해 '얼굴을 잃는다'는 뜻의 디우리앤(丟臉)이라는 말이 있다.
체면을 뜻하는 중국어 미엔쯔(面子)는 일본으로 건너가 발음 그대로 멘츠(メンツ)가 되었다.
'체면이 구겨졌다'를 일본어로는 "メンツが潰れる(멘츠가 쯔부레루)"라 한다.
꽃에서 얼굴에 해당하는 것이 꽃송이이듯, 세 나라 모두 본질보다 겉에 드러나는 얼굴에 목을 맸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다.
중년에 이른 지금, 체면의 무게에서 오는 피로가 너무 깊다.
이제는 훌훌 벗고 진짜 '나'로 살고 싶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실험할 곳이 있는데,
하루 중 가장 오래, 가장 많은 사람과 부대끼는 곳, 직장이다.
⠀
직장인에게 직장은 거의 모든 것이다.
보수, 인간관계, 평가, 자기실현까지 직장과 엮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직장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빳빳하게 굳는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에서 실직한 주인공 부부를 상담하는 치료사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자리와 동일시합니다.
직장을 잃으면 그들은 마치 스스로를 상실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우리가 긴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과 자신을 동일시(identify)하기 때문이다.
일은 내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 나는 15년이 넘는 직장생활이 필요했다.
깨달음의 핵심은 직장이 우리의 직감에 반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성과를 내려고, 연봉을 올리려고, 관계를 잘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일이 꼬였다.
무거운 직장생활에 가벼운 척하기가 필요한 역설의 공간이다.
나는 그저 척하기라는 역할놀이(role play)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해는 마시라.
의욕 없이 동료들과 담을 쌓고 시간이나 때우라는 말이 아니다.
직장은 직장일 뿐이라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곳은 우리를 태워 재로 만들면서까지 목숨 걸 곳이 아니다.
⠀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접고 늦은 나이에 한국으로 옮겨온 경우다.
달라진 회사 분위기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가한 압박이 더 컸다.
그러다 독서와 달리기를 시작하며 마음챙김에 집중했다.
직장과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두었다.
업무에 100%를 무리하게 갈아 넣지 않고, 욕먹지 않을 선을 영리하게 지켰다.
남는 에너지로 나를 가꿀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작아도 좋으니 내가 아는 것을 세미나로 주변 사람들과 나눴다.
가르치며 배우는 순환이 시작되었다.
자신감이 차오르고, 도움을 청하는 동료들이 생겨났다.
자연스레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과제를 맡게 되었지만, 힘을 빼니 오히려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이동수 작가는 《언젠간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에서 이렇게 썼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회사를 위해서 일했다기보다 내 삶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비록 회사는 내 것이 아니지만, 회사에서의 일은 내 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 관점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꿨다.
⠀
생각의 방향을 트니 회사는 꽤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다.
철저히 나를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다.
학교에 가면 '학비'를 내야 하고 놀이동산에 가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 이곳은 되려 나에게 '월급'까지 챙겨준다.
영리한 척하기로 마다할 게 하나도 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몇 년 전, 회사에서 동료들과 MBTI가 대화의 단골 주제이던 시기가 있었다.
"어, 정말 I예요? E인 줄 알았는데...."
"역시 T구나."
나의 MBTI는 ENFP이고, 특히 E는 다른 질문지로 해봐도 해당률이 90퍼센트가 넘는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맞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을 좋아하기에 책도 읽고, 혼자 달리고, 이렇게 글도 쓰는 것이다.
예전의 나를 떠올려 봐도 어느 무리에 가든 인간관계를 넓게 맺지만,
깊고 끈적하게 맺는 데는 서툴러 어딘가 겉도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 곳을 살다 떠나오면 연락도 꾸준히 잇지 못한다.
너무 많은 관계에 대한 피로가 큰 듯하다.
이런 내가 진짜 외향인일까.
수줍음 많기로 유명한 핀란드인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다고 한다.
핀란드 내향인은 대화할 때 자기 신발을 보고, 외향인은 남의 신발을 본다.
어느 쪽이든 상대의 눈은 보지 않는다는 뜻인데,
나도 어쩌면 신발만 바꿔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던 중 뉴욕의 정신과 전문의 라미 카민스키(Rami Kaminski)가 내세운 개념을 알게 되었다.
이향인(異向人), 영어로 오트로버트(otrovert)이다.
스페인어로 '다른'을 뜻하는 otro에서 따온 이 말은,
내향도 외향도 아닌 '다른 방향'을 향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교적이고 공감 능력도 높지만, 집단에 속하는 것 자체를 본능적으로 원하지 않는 성격 유형이다.
나의 성격이 어딘가에 이름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더는 E인 척 나를 평균에 끼워 맞출 필요가 없었다.
나의 고독을 한층 생산적으로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힘을 빼는 또 하나의 방법은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을 본캐가 아닌 '부캐'인 척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직업으로 한 사람을 정의하기 어려운 N잡러의 시대이다.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갖는 것을 영어로는 문라이팅(moonlighting)이라 부른다.
나는 낮에는 최대한 역할놀이에 충실하며 부캐인 반도체 엔지니어로 산다.
그러나 달빛이 내리는 밤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며 본캐로 돌아간다.
사실 나의 최종 본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글을 쓰는 내가 본캐이다.
흔들리지 않는 본캐가 단단히 버티고 있으니,
직장이라는 부캐의 역할극은 오히려 힘이 덜 든다.
그렇게 나는 고독한 N잡러가 되려 한다.
⠀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여럿으로 태어나 하나로 죽는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안에 나팔꽃, 메꽃, 박꽃을 품고 있다.
이 다채로운 모습들 사이를 큰 피로 없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생존을 돕는다.
⠀
이동진 평론가의 책에서 읽은 박찬욱 감독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하루는 딸이 학교에서 가훈을 붓글씨로 큼지막하게 적어 오라는 숙제를 받아 왔다.
우리 집 가훈이 대체 뭐냐고 묻는 딸에게 박찬욱 감독은 덤덤히 답했다.
'아님 말고.'
이는 양희은 선생의 유행어 '그럴 수 있어'와 방송인 사유리의 '어쩌라고'라고와 맞닿아있다.
그리고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멜 로빈스(Mel Robbins)의 'Let them' 이론과도 일맥상통하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행동하든 그저 내버려 둬라(Let them).
남에게 쏠려 있던 예민한 시선을 거두고, 오직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내 삶에만 집중하라(Let me).
남들이 함부로 들이대는 잣대에 얽매이지 않고, 나다운 척하기를 무기 삼아 세상을 유연하게 건너고 싶다.
다만 기억하자.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서 깨달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작가 글배우의 글이 그래서 오히려 힘이 된다.
"내가 바뀌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면 진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왜냐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내가 바뀐다는 건."
⠀
그래도 괜찮다.
나팔꽃은 아침에, 메꽃은 낮에, 박꽃은 저녁에 핀다.
세 꽃이 한꺼번에 피지 않는다.
때가 되면 피고, 때가 지나면 진다.
힘을 빼고 유연하게 흔들리며 하루를 충실히 피워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온전한 하나의 뿌리로 편안히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가장 자연스러운 생존의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