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역설의도 - 세번째 이야기
· 불완전한 임시방편의 덧댐으로 어떻게든 작동해 온 생명과 문명의 클루지적 본질.
· 국소 최적화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바닥까지 가라앉는 역설적 돌파의 필요성.
· 상향·하향 반사실적 사고로 단 하나의 경로가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깨닫는 시뮬레이션.
· 서투르게 묻고 기꺼이 잊어버리는 다람쥐의 망각적 분주함이 만들어내는 울창한 숲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만 해도,
시골에서는 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이웃이 함께 모여 김장을 했다.
담근 김장김치며 동치미를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었다.
혹여 김장독이 얼세라 뚜껑 주변을 볏짚으로 두툼하게 덮어두었다.
"김치 한 포기만 가져와"라는 엄마의 심부름에 저녁상을 떠올리면 입안에 신침이 고였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장독 속으로 뻗는 내 팔도 점점 더 깊어졌다.
김치냉장고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낯선 풍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삶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세월의 지층이 쌓인 연속체다.
과거의 김장독이 현대 기술을 만나 김치냉장고로 재해석되었을 뿐이다.
나에게는 문학 작품이 이러한 삶의 원형을 들여다보는 통로다.
경험하지 못한 시공간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주는 소설은 내게 늘 특별하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그중에서도 보석 같은 작품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정이월의 추위 속에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빨래터 풍경으로 시작된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중략)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렵지 않은 모양이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속담은 양력으로 2~3월쯤,
방심한 틈을 타 찾아온 꽃샘추위에 단단한 항아리마저 깨진다는 뜻이다.
어릴 적 실제로 김장독이 터진 광경을 보았는지는 선명하지 않지만,
이는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을 겨우내 견딘 옹기에는 봄이 올 무렵 미세한 균열이 누적된다.
꽃샘추위로 급격한 일교차가 벌어지면 재료공학에서 말하는
'피로 파괴(fatigue fracture)'가 일어난다.
무생물인 대독은 갈라지며 파국을 맞았지만, 생명인 우리는 달랐다.
땔감과 식량이 바닥나는 보릿고개를 기어이 버텨낸 이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더 긴 시간의 척도로 보면, 생명은 환경의 격변을 오히려 진화의 동력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적응의 흔적은 우리 몸뿐만 아니라 도시 공간에도 숨어 있다.
소설 제목의 '천변'은 바로 청계천을 가리킨다.
당시만 해도 그곳에는 빨래를 할 수 있을 만큼 맑은 물(清溪)이 흘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청계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변했다.
그 위로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었고, 30여 년간 서울의 동맥 역할을 하다 철거되었다.
2005년이 되어서야 청계천은 다시 물길을 열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청계광장의 다슬기 모양 조형물 《스프링》에서는 한강에서 끌어온 물이 폭포처럼 흘러나온다.
하지만 본래 청계천은 인왕산에서 발원한 자연 물줄기였다.
지금도 광화문 일대 지도를 보면 반듯한 격자 도로 사이로 사선으로 뻗은 길들이 눈에 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난 길들은 인왕산에서 흐르던 백운동천을 덮어 만든 것이다.
이 백운동천이 바로 청계천의 원류다.
백운동천뿐만 아니라 옥류동천, 삼청동천 등 과거의 물길은 이제 사람과 차가 다니는 일상의 통로가 되었다.
이전의 모습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켜켜이 쌓인 과거의 흔적은 도시의 역설적인 매력이 된다.
나는 소설만큼이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논픽션도 즐겨 읽는다.
그중 인지과학자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는 내게 세상을 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클루지(kludge)'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덧대어 작동하게 만든 해결책을 뜻한다.
'영리하다'는 뜻의 독일어 '클루크(klug)'에서 유래해 1960년대 컴퓨터 공학자들 사이에서 은어로 쓰였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반도체 설계를 위해 파이썬 코드를 짜고 있었다.
지금처럼 인공지능이 눈 깜짝할 새 코드를 짜주는 시절이 아니었다.
검색과 커뮤니티 예제를 짜깁기하여 일단 동작만 하는 코드를 만들었다.
쓰다 보면 늘 새로운 필요성이 생겼고, 그때마다 전체 구조를 일관성 있게 수정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작동하도록 임시방편의 코드를 끊임없이 욱여넣었다.
혼자 쓰는 코드였기에 결과만 제때 나오면 그만이었다.
구조적인 아름다움과 일관성을 중시하는 내게 이런 누더기 같은 코드는 내심 불편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자 나름의 순발력과 효율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코드가 바로 전형적인 클루지였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클루지 중에서도 인간의 몸에 관한 내용은 무척 신선했다.
나는 은연중에 우리 신체가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로 창조된 완벽한 존재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나의 엉성한 코드에서 에러가 나듯, 내 몸에도 불면증과 공황장애라는 오류가 찾아왔다.
완벽한 설계의 실패가 아니라 클루지 덩어리인 몸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깨닫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인간을 포함한 육상 척추동물은 음식물이 지나는 식도와 공기가 드나드는 기도가 목 근처에서 교차한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후두개(喉頭蓋)라는 덮개가 기도를 반사적으로 막아준다.
사레들렸을 때 영어로 "잘못된 파이프를 탔다(went down the wrong pipe)"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교차점 때문이다.
물속에서 아가미로 숨 쉬던 생물이 뭍으로 올라오며 생긴 진화의 흔적이다.
물속에서는 먹는 통로와 숨 쉬는 통로가 같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육상 환경에 맞춰 공기를 폐로 보내는 별도의 경로가 필요해졌다.
효율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기존 구조를 허물지 않고 덧대어 진화한 결과다.
눈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초기 생물의 눈은 빛의 유무만 감지하는 단순한 감각 세포의 집합이었다.
이 세포들이 빛의 방향을 구별하기 위해 점차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 앞에 수정체(lens)가 생기며 망막(網膜)에 상을 맺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빛을 감지하는 시세포가 뒤쪽에, 신경 다발이 그 앞쪽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결국 시신경 다발이 망막 앞을 가로질러 안구 바깥으로 빠져나가야 하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신경 다발이 빠져나가는 구멍에는 시세포가 없어 필연적으로 맹점(盲點)이 생긴다.
뇌가 양쪽 눈의 정보를 합성해 빈자리를 감쪽같이 메워주기에 평소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우리 사고의 원천인 뇌 역시 한 번에 매끄럽게 설계된 것이 아니다.
1960년대 신경과학자 폴 매클린은 인간의 뇌가 세 겹으로 쌓여 있다는 '삼중뇌(triune brain)' 모델을 제안했다.
가장 안쪽에는 호흡과 심박 등 생명 유지를 담당하는 파충류의 뇌(뇌간, 기저핵)가 있다.
그 위를 공포나 분노 같은 감정을 처리하는 포유류의 뇌(변연계)가 덮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와 추상적 사고를 담당하는 인간의 뇌(대뇌피질)가 가장 바깥쪽을 감싼다.
현대 신경과학에서는 이 세 영역이 칼같이 나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서 작동한다고 본다.
나의 공황장애 역시 생존을 향한 원초적 경보 시스템과 이성적 판단이 충돌하며 발생한 엉성한 배선의 산물이다.
안전한 물속을 떠나 뭍으로 올라온 선택도, 더 뚜렷한 시각을 얻으려던 노력도 모두 치열한 생존의 흔적이다.
우리의 몸은 변덕스러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생명력의 증거이자 트로피다.
당장 살아남는 것이 시급했기에 완벽하고 최적화된 설계를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도시와 기술, 그리고 생명의 진화는 모두 과거의 유산 위에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다.
비록 서투르고 투박하지만, 결국엔 작동해냈다.
어떻게든 작동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불완전함(imperfect)을 온전함(I'm perfect)으로 바꾸며 살아온 존재.
결국 우리는 모두 클루지투성이의 서투른 걸작이다.
물속은 생명체들에게 완벽한 안전지대였을 것이다.
중력의 지배를 덜 받고 온도는 안정적이었으며, 먹이는 물결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왔다.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지만, 얕은 물과 뭍이 만나는 경계로 밀려난 개체들이 있었다.
조수가 드나드는 웅덩이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던 이들의 첫 시도는 아마도 처참한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마른 공기에 아가미는 타들어 갔고, 처음 겪는 온전한 중력은 몸을 무참히 짓눌렀을 것이다.
뭍으로의 도전은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년의 낭만적인 외유가 아니었다.
포식자를 피하거나 마르는 웅덩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 즉 강력한 '진화압'의 결과였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 부레는 점차 폐의 기능을 모방해 갔고, 지느러미는 땅을 짚을 수 있는 사지의 형태로 변모했다.
매일 헤엄치던 익숙한 물길을 벗어나 뭍으로 기어오른 소수가 있었기에 생명의 영토는 극적으로 넓어졌다.
이 치열한 도전의식은 오늘날 우리의 DNA에도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끊임없이 '국소 최적화'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국소 최적화(local minima)'란 눈앞의 작은 봉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믿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현상이다.
더 높은 정상에 오르려면 일단 지금의 봉우리에서 비탈을 따라 내려가야 하지만,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주저앉고 만다.
이러한 정체가 시간의 축에서 나타나면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 된다.
공간의 축에서 나타나면 '획일성(uniformity)', 즉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결국 이 함정에 빠진 존재는 정이월에 대독 터지듯, 예상치 못한 환경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기술의 최전선인 반도체 개발 현장 역시 이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부단한 생존 싸움을 벌인다.
2000년대까지 인텔의 CPU 개발을 이끌었던 '틱톡(tick-tock)' 전략이 대표적이다.
한 세대(tick)에는 반도체 공정을 미세화하고,
다음 세대(tock)에는 칩의 설계 구조 자체를 바꾸며 혁신을 교차시켰다.
공정과 설계라는 양축을 번갈아 디디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애쓴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혁신의 주기가 지연되며 인텔도 국소 최적화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PC 산업이라는 과거의 성공에 갇힌 경로 의존성 때문에 새롭게 열린 모바일 시대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거대한 제국은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현업에서 개발에 참여했던 스마트폰용 CMOS 이미지 센서의 생태계도 비슷하다.
거의 일 년 단위로 업그레이드되는 스마트폰 주기에 맞춰 센서를 향한 소비자의 눈높이도 가파르게 올라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소 수를 늘리기 위해 단위 픽셀의 크기를 극한으로 줄이는 경쟁이 이어졌다.
그 결과 현재 최첨단 모바일 센서는 2억 화소의 벽을 넘었다.
문제는 가로세로가 머리카락 굵기의 100분의 1 남짓한 0.5마이크로미터(μm) 수준의 비좁은 공간이라는 점이다.
이 극한의 공간 안에 이전 세대보다 동등하거나 더 나은 성능을 기어이 우겨넣어야만 한다.
과거의 성공 방식에 머물지 않고, 국소 최적점을 훌쩍 뛰어넘는 공정과 설계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변수를 두고 실험을 반복하게 된다.
값비싼 웨이퍼와 포토마스크가 더 소모되더라도,
독립변수의 범위를 넓혀 과감하게 테스트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에서는 좁은 공정 윈도우 안에서 소극적으로 맴돌지 말고,
한계점까지 밀어붙여 보는 '절벽 테스트(cliff test)'를 주문한다.
그래야만 애써 찾은 최적화가 그저 눈앞의 얕은 봉우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제대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소 최적화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역설적인 실천을 제안하고 싶다.
낡은 경로를 부수는 첫 번째 방법은 위기와 실패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 역이용하는 것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칠 때 노련한 서퍼들은 물살과 맞서 싸우지 않는다.
대신 보드의 코를 누르고 수면 아래로 깊숙이 파고드는
'덕 다이브(duck dive)'로 거대한 에너지를 스치듯 통과한다.
미 해군 네이비실(Navy SEAL)의 극한 생존 훈련인
'바빙(bobbing)' 역시 이와 비슷한 생존의 역설을 보여준다.
손발이 묶인 채 깊은 물에 빠졌을 때, 본능에 따라 수면 위에 떠 있으려
발버둥 치면 체력이 고갈되어 가라앉고 만다.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숨을 참고 축 늘어져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곳을 힘차게 박차는 반작용으로 솟구쳐 올라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익숙한 경로 안에서 아등바등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 삶의 '바닥'이 어디인지 냉정하게 직시하고,
최악의 상황을 먼저 명확히 정의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막연히 두려워하던 바닥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공포는 사라지고, 역설적으로 다시 치고 올라올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된다.
여기에 더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이라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훈련은 경로를 이탈하는 훌륭한 시뮬레이션이다.
"그때 다르게 했더라면"이라는 상향적 반사실은 과거의 맹점을 냉철하게 분석해
미래를 재구성하는 날카로운 잣대가 되어 준다.
반대로 "자칫하면 훨씬 더 나쁠 수도 있었다"는 하향적 반사실은
감정적 후회를 털어내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준다.
다만 실제 경험보다 모의실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시뮬레이션 과잉'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생각은 행동의 예비이지, 행동의 대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삶에 적용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 새로운 목표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완전히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그 원인을 거꾸로 짚어보는 것을 제안한다.
미래의 결과에서 현재의 원인을 추적해 내려오는 일종의 '역인과(逆因果)'적 시뮬레이션이다.
풀코스 마라톤 출발선에 서기 전,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체력이 고갈되어
주저앉은 최악의 상황을 미리 그려보고 페이스 조절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것과 같다.
일어나지 않은 실패를 머릿속으로 집요하게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자신이 맹신하며 걸어온 단 하나의 경로가 결코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촉발한 문명사적 대전환기, 유례없이 빠른 변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일수록 완벽한 길을 정의하고 무섭게 집중하는 추진력이 정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부터 천천히 변화에 적응해 온
클루지투성이의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이럴 때일수록 역설적으로, 무엇이 정답일지 모르니
기꺼이 빈틈을 허용하며 일단 부딪혀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를 다람쥐에게서 배운 '망각적 분주함'이라 부르고 싶다.
늦가을의 숲속, 다람쥐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낙엽 아래 땅속 깊이 도토리를 부지런히 묻어둔다.
만약 다람쥐가 자신이 묻어둔 도토리의 위치를 모두 기억해 내는 완벽한 능력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개체의 생존이라는 효율은 100% 달성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거대하고 울창한 참나무 숲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건망증이 가져다준 풍요는
래리 슈그(Larry Schug)의 시 「도토리(Acorns)」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시 속의 도토리는 자신을 묻은 다람쥐의 망각 덕분에,
정이월 눈 녹은 물을 머금고 단단한 껍질을 깨부순 뒤 흙바닥에 새로운 발을 내린다.
그리고 "마치 온 하늘을 다 가진 듯 깡마른 초록빛 팔을 기쁨에 겨워 흔들며"
자신이 완전히 변화했음을 세상에 알린다.
어쩌면 우리는 꽃샘추위에 대독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내 삶이 무너지는 재앙으로 착각하며 지나치게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토리가 껍질을 부수고 나와 푸른 팔을 뻗듯, 낡은 장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버린 것은 나를 가두던 한계가 부서진 것이지 내 삶의 본질이 파괴된 것이 아니다.
상담학자 이호선 교수의 통찰처럼, 날아온 돌에 거울이 깨졌을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깨진 것은 나를 비추던 거울이지 나 자신이 아니다"라는 명확한 분리다.
그러니 백지에서 시작하지 못한 누더기 같은 기원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관성처럼 굳어진 낡은 경로에 미련을 둘 이유도 없다.
정이월 봄바람에 금 간 대독이 쩍 하고 터져버려도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기꺼이 그 도편(陶片)을 쥐고 새로운 세상의 경계를 그어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완벽주의자의 길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다.
치열하게 땀 흘리면서도 기꺼이 잊어버리고 실패하는 '망각적 분주함'을 안고 살아가자.
서투르게 묻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당신의 수많은 헛수고들을 믿어보자.
어느 봄날, 그 망각의 씨앗들이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울창한 참나무 숲으로 안내할지 모를 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