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포도,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다

4부 역설의도 - 네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솔직한 감정 대신 이모지나 우회적 화법 뒤에 숨어 수동 공격성으로 불만을 표출함.
· 이는 갈등을 피하려는 불안정 애착과 상처받은 자아를 지키려는 인지부조화의 결과임.
· 내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 해상도를 높이고, 작은 거절을 실천하며 인식을 바꿔야 함.
· 고통을 직시하고 나를 수용하는 역설의도의 자세로 잃어버린 날것의 감정을 되찾아야 함.



내가 나를 모르는데


1991년, 드라마 삽입곡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타타타〉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대목을 "내가 나를 모르는데"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을 모르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모를 때가 참 많다.

어떤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것이 쌓여 왜 표출하지 못할 화가 되는지,

몸을 뉘어도 왜 밤에 잠이 오지 않는지 말이다.

그나마 스트레스의 원인이 명확하다면 해결은 단순하다.

그저 피하면 된다.

하지만 원인도 모르게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때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창안한

'역설의도(paradoxical intention)'는 훌륭한 해법이 될 수 있다.

두려워하는 그 일을 일부러 끌어안아 강박과 불안의 고리를 끊어내는 기법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좀 못 자면 어때, 차라리 깨어 있는 김에 다른 걸 하자'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인데, 이런 역설의도에 내 마음이 순순히 속아 넘어갈까.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완벽히 기만할 수 있는가.

이솝 우화의 여우가 아무리 저건 '신 포도'라며 자신을 달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포도를 따 먹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다.

그래서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무 자르듯 쪼개어 분석하기가 어렵다.

반면 물질은 대조군을 두고 여러 변수를 동시에 바꿔가며 실험할 수 있다.

조건이 다른 실험을 병렬로 돌리면, 어떤 변수가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실험 대상이 사람의 마음일 때,

그것도 절박한 자기 자신일 때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는 30대부터 남성형 탈모를 겪어왔다.

몇 년 전부터 피나스테리드 계열의 약을 먹고 효과를 보았지만,

1년 전쯤 공황장애 증상이 심해지면서 스트레스 탓인지 다시 정수리가 휑해지기 시작했다.

절실해진 마음에 탈모에 좋다는 방법을 모두 한꺼번에 동원했다.

더 강력하다는 두타스테리드로 약을 바꾸고, 먹고 바르는 미녹시딜을 동시에 썼다.

큰돈을 들여 산 레이저 탈모 치료기까지 매일같이 머리에 뒤집어썼다.

다행히 석 달쯤 지나 머리 상태는 예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제는, 도대체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나조차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정석대로라면 시간을 두고 변수를 하나씩 통제해 가며

각 치료법의 효과를 분절화(分節化)하여 검증했어야 했다.

하지만 한 번 빠진 머리카락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비가역적인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단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물질인 모발은 그나마 매일 거울을 보며 결과라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형태조차 없는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내 마음속에서조차 무엇이 자극이고 무엇이 반응인지 명확히 가려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 혼자의 마음도 이토록 알기 어려운데,

타인의 마음까지 얽혀들면 우리는 그 복잡함에 쉽게 압도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이 복잡한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제 오지 그랬슈


보이지 않는 마음도 결국 말과 행동을 통해 밖으로 새어 나온다.

무의식적인 표정이나 툭 튀어나온 일상어는 내면을 비추는 투명한 창이 된다.

따라서 무심코 쓰는 말을 언어학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마음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하다.

언어학에서는 언어 체계를 분석하는 층위에 따라 크게 형태론(morphology),

의미론(semantics), 화용론(pragmatics)으로 나눈다.

형태론이 단어의 구조를 쪼개어 분석하고 의미론이 글자 그대로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라면,

화용론은 그 문장이 쓰인 '맥락(context)'을 살피는 일이다.

화자가 입 밖으로 낸 말과 실제로 의미한 바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간극의 공기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한국에서는 '눈치가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분위기(공기)를 읽지 못한다는 뜻에서 'KY(쿠키 요메나이, 空気が読めない)'라 부른다.


일본인이 한국인에 비해 우회적인 표현을 자주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천 년 동안 궁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교토의 화법(京都弁)은 유독 다층적이다.

"오차즈케라도 한 그릇 드시겠어요?(ぶぶ漬けでもどうどす?)"라며 식사를 권하는 것은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정중한 축객령(逐客令)이다.

손목을 보며 "좋은 시계를 차고 계시네요(ええ時計してはりますなぁ)"라고 칭찬하는 것 역시,

시계를 보고 돌아갈 시간을 가늠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도 화법이 이와 비슷하다.

좁은 시골길에서 바짝 따라붙어 경적을 울리는 뒤차에게

"아니,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라고 받아치는 식이다.

장터에서 값을 무리하게 깎는 손님에게

"냅둬유, 그냥 가져가서 돼지새끼나 믹이게"라고 툭 던지는 대사는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밈(meme)이 되었다.



우리는 왜 속내를 숨기고 에둘러 말하려 할까.

이러한 '고맥락 소통(high-context communication)'을 선호하는 까닭이

단지 상대에 대한 예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와 직접적인 갈등은 피하면서도

내면의 불만은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은 '수동 공격성(passive-aggressiveness)'이

함께 만들어 낸 자기 보호 본능일지도 모른다.


말의 얄팍한 겉면만 더듬어서는 타인의 진심은 물론,

스스로를 기만하는 내 속마음조차 온전히 읽어낼 수 없다.



칼국수 열 그릇


나는 감정 표현에 서툴다.

기쁠 때 마음껏 환호하는 것도 잘 못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거나 서운할 때

그 감정을 드러내는 데 지독히도 서툴다.

갈등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한 데다, 나의 숨은 의도는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 믿으며

에둘러 상대를 흔들려 할 때가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모습을 '수동 공격성(passive-aggressiveness)'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개념의 정신의학적 지위 변화다.

과거 정신질환 진단 편람 DSM-IV에서는 이를 '수동 공격성 성격장애'라 하여 부록에 두었으나,

최신판인 DSM-V에서는 독립된 질환에서 빠졌다.

특정한 정신 병리라기보다, 갈등 상황이나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려 흔히 쓰는 보편적인 방어 기제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대놓고 화를 낼 수 없는 자리에서 억눌린 분노가 비틀린 형태로 새어 나오는,

자연스럽지만 미성숙한 반응이라는 뜻이다.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수동 공격의 원형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난히 고기가 먹고 싶었던 날, 어머니는 고기 대신 칼국수를 끓여 주셨다.

어린 마음에 화가 나고 서운했다면 차라리 울거나 떼를 썼어야 했을 텐데,

나는 묵묵히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그릇만 더 달라고 고집을 피워 기어이 열 그릇을 채워 먹었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미련하게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내 몸을 학대하면서까지 내가 진짜 얻고 싶었던 것은,

나를 이렇게 만든 어머니의 당혹감과 "미안하다"는 한마디였다.

직접 부딪혀 싸우는 대신, 상대에게 죄책감을 심어 우위를 쥐려는 전형적인 수동 공격이었다.

여우가 높이 매달린 포도를 시다고 자신을 속였듯,

어린 나는 '나는 화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그 욕망을 칼국수 열 그릇이라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흘려보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의 이면에는 '불안정 애착'이 자리 잡고 있다.

선천적 기질 때문이든 성장 과정의 경험 때문이든,

내 안에는 "솔직한 부정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에게 거절당하거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이 두려움은 성인이 된 뒤의 인간관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연인과 헤어지고 싶을 때, 나는 먼저 이별을 고하는 악역을 감당하지 못했다.

대신 상대가 먼저 지쳐 떨어져 나가도록 은근히 속을 긁는 행동을 반복했다.

상대의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홀가분하게

'차인 피해자'이자 '착한 사람'의 가면을 쓸 수 있었다.

이제는 이런 내 모습을 인지하고 고치려 애를 쓰지만, 오랜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종종 아내에게 "말을 왜 그렇게 비꼬아서 해?", "은근히 사람 기분 나쁘게 하네"라는

핀잔을 여전히 듣는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억눌린 감정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침묵, 지각, 은근한 비아냥, 혹은 칼국수 열 그릇 같은 기형적인 형태로 삐져나온다.

스스로를 지키려 겹겹이 쳐 둔 방어벽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 되어버린 셈이다.



나에게 솔직해지기


역설의도가 우리 내면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몇 가지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내 감정에 '이름표'를 다는 일이다.

누군가 기분을 물으면 우리는 흔히 "좋다" 혹은 "나쁘다"라는 말로 뭉뚱그리곤 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표현으로는 마음의 다채로운 결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감정의 해상도, 즉 '감정 세분성(emotional granularity)'을 높여야 한다.

수동 공격성은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 회피할 때 비틀린 형태로 튀어나온다.

이를 막는 첫걸음은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아, 나 지금 무시당해서 서운하구나"라며 객관적인 이름표를 붙여보자.

감정을 쪼개어 이름을 붙이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내 마음을 가만히 바라볼 여백이 생긴다.

나아가 찌질하고 유치한 속마음을 빈 노트에 필터링 없이 적어보는 것도 좋다.

글로 쏟아낸 날것의 감정은 마음을 짓누르던 압력을 크게 낮춰준다.

그 후 차분해진 이성으로 진짜 전해야 할 핵심만 추려내면 된다.


둘째, 인식의 전환이다.

오랜 시간 굳어진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다.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인식부터 차근차근 바꿔야 한다.

"솔직해지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불안정 애착의 낡은 공식을 깨는 일이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처럼 안전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아니, 난 그거 말고 이거 먹고 싶은데"라고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선을 긋는 연습이다.

작은 거절을 거쳐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익히는 '마이크로 거절' 훈련이다.


그다음은 타인에 대한 인식을 바꿀 차례다.

무엇보다 비교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사회 비교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어도 '더 위'를 바라보는 순간 불행해진다.

끝없는 '상향 비교'의 스위치를 끄고 인식을 바꾸는 데는 감사하는 마음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는 삶의 척도를 '아이큐(IQ)나 이큐(EQ)보다 땡큐(Thank you)'로 삼아보려 한다.

타인을 부러워하기보다 내게 주어진 일상에 '땡큐'라며 감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고통을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설의도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고통인데,

그 고통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끔찍한 통증을 수반한다.

1988년, 석 달 간격으로 남편과 스물다섯 외아들을 잃는 참척(慘慽)을 겪었던

고(故) 박완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아픔은, 슬픔은 절대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견디며 사는 거죠."


그녀는 일기에서 자신을 위로하려는 딸에게 이렇게 처절하게 호소하기도 했다.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 게 수잖니?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설사 아기의 보드라운 뺨이라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만져볼 수 없다는 걸 알 테지.

못 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 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저토록 깊은 상실의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모두들 제 손톱 밑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다.

옛 어머니들은 아이의 젖을 떼기 위해 가슴에 쓴맛이 나는 '익모초(益母草)' 즙을 발랐다고 한다.

쓴맛에 놀란 아이가 스스로 젖을 거부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익모초는 이름 그대로 어미의 몸을 가장 이롭게 회복시키는 약초다.

우리는 언제까지 달콤한 당의정(糖衣錠)으로 상처를 덮어두고 회피하려 하는가.

상처를 치유하고 진짜 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쓴맛을 삼켜내며

스스로에게 모질어지는 '터프 러브(tough love)'가 필요하다.



신포도,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센 척'이 유행인 모양이다.

딸 하윤이의 말에 따르면, 급식으로 매운 반찬이 나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나 매워서 마시는 거 아니다"라며 맵부심을 부리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하윤이와 함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볼 때의 일이다.

아이가 가만히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길래 상영관을 나와 아까 울었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 거야"라며 시치미를 뚝 뗐다.


이 귀여운 '센 척'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이솝 우화 속 여우가 떠올랐다.

높이 매달린 포도를 따 먹으려다 번번이 실패한 여우는 돌아서며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저 포도는 아직 익지 않아서 엄청 실 거야."

앞서 언급한 페스팅거가 정립한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포도를 먹고 싶은 욕구가 그것을 딸 수 없는 현실의 무능력과 충돌하자,

대상의 가치를 깎아내려 상처받은 자아를 방어하는 무의식적인 '정신 승리'를 택한 것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역설의도'와 이 여우의 얄팍한 합리화는 어떻게 다를까.

가장 큰 차이는 '사후(事後)냐 사전(事前)이냐'에 있다.

누구나 행동을 하고 난 뒤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럴듯한 해석과 변명을 덧붙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의도는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겠다고

굳게 다지는 사전의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다른 각도로 이 우화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 여우가 그 포도를 따 먹었다면 어땠을까.

늑대와 함께 개과에 속하는 여우는 단맛을 느끼는 수용체가 있어,

본능적으로 신 포도보다 달콤한 포도를 좋아한다.

하지만 개과 동물에게 포도는 결코 좋은 식품이 아니다.

포도에 함유된 타르타르산(tartaric acid) 성분은 치명적인 급성 신부전을 일으킬 수 있다.

나 역시 집에서 포도를 먹을 때면 행여나 강아지들이 바닥에 떨어진 알을 주워 먹을까 봐 각별히 조심한다.


그러니 진짜 똑똑하고 성숙한 여우라면, 못 먹은 포도를 향해

'셔서 안 먹어'라고 합리화하기 전에 이렇게 판단해야 옳다.

"저 포도는 달콤하고 맛있겠지만, 내 건강에 해로우니 먹지 않아야지."

입에는 달아도 몸을 위해 기꺼이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이다.

즉, 똑똑한 여우에게 신 포도는 능력이 없어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선택으로 '안 먹는 것'이어야 한다.



역설의도가 우리 내면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나의 진짜 의도와 다양한 자극에 대한 내면의 반응을 찬찬히 살피는 일이다.

이는 상처받은 뒤에 숨는 비겁한 합리화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선제적이고 주도적인 대응이다.


다시 글의 문을 열었던 노래 〈타타타〉로 돌아간다.

가사를 쓴 양인자 선생은 인도 여행 중 알게 된 산스크리트어

'타타타(तथाता, tathātā)'를 이 노래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는 뜻이며, 한자로는 '진여(眞如)'로 번역된다.

나를 속이려 드는 얄팍한 방어벽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싶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