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면
생각보다 자주 질문을 받는다.
어디까지 가는지,
혼자 타는 건지,
결혼은 했는지.
질문은 가볍고,
말투는 친절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게 된다.
하지만 몇 마디가 오가고 나면
그 질문이
그저 안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인상이 좋으신데요.”
“좋은 분 만나셔야죠.”
그 말들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이내 방향이 정해진다.
지금의 삶은 잠시 멈춘 상태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전제.
갈 길이 바빠
잠시 숨을 고르려고 탄 택시 안에서
나는 설명해야 할 사람이 된다.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묻지 않은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
기사님의 자식 이야기가 이어진다.
얼마나 애를 썼는지,
얼마나 대견한지.
그 이야기는
자랑이라기보다
확인처럼 들린다.
이 삶이 정상적인 경로를
잘 따라왔는지에 대한 확인.
혼자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가끔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은
대개 조건을 달고 온다.
지금은 괜찮다는 말,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말.
괜찮다는 말과
동의한다는 말이
다르다는 걸
나는 그때마다 다시 배운다.
부동산에 갔을 때도
비슷한 장면을 만난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하며
혼자 산다고 말하면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곧
안타깝다는 늬앙스의 말이 나온다.
여유를 주겠다는 말,
배려하겠다는 말.
그 말들에는 분명 호의가 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계약자가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 호의가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얇게 남는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으로.
모든 공간이 그런 건 아니다.
코리빙하우스에 들어가면
질문은 달라진다.
혼자인지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는다.
거기서는
혼자라는 상태가
결핍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느슨해진다.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명절이 다가오면
질문은 더 가까워진다.
직접 묻지 않아도
방향은 늘 같다.
결혼 안 한 고모 이야기,
그러다 보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
그 말은
농담처럼 오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말조차 꺼내기 싫다.
대답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미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흘려버린다.
웃고 넘기고,
다른 화제로 옮긴다.
그러다 보면
왜 명절이 다가오면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좋은 일로 모여도,
안 좋은 일로 모여도
결국 돌아오는 질문은 같다.
왜 아직 혼자인지,
언제쯤 결혼할 건지.
그 질문들은
내 삶을 궁금해하기보다는
내 삶을 점검하려는 말에 가깝다.
그래서 대답할수록
몸이 먼저 지친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조금 숨이 가빠진다.
이 질문들을 다시 꺼내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혼자 사는 삶은
항상 설명의 대상이 된다.
잘 살고 있는지,
외롭지는 않은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질문들이
내 하루를 정확히 묻고 있지 않아서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되묻고 싶어진다.
지금의 삶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하지만 그 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설명할 기운이 조금 부족하다.
질문은 늘
한쪽에서만 오가고,
나는 그 질문들을
조용히 받아내는 쪽에 서 있다.
많이 지친 날이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혼자 사는 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설명해야 할 선택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충분히 괜찮은 삶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답하지 않기로 한다.
지쳤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의 이 삶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