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이 상당히 떨어졌다.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죽지 않고 출근은 해야 하니까 두유로 간신히 배를 채웠다.
신기하게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니 꼭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출근길, 인대가 심하게 다치고 나서 오래 걸을 수 없어 외출도 힘들었고, 코로나도 심했지만..
결정적으로 매일을 밤 12시가 돼서야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데 나에게 떨어진 업무들이 해도 해도 끝나질 않았다.
팀원과 함께 진행하던 업무의 몇 개는 아예 손을 놔버리고 팀원에게 맡기기도 했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주말이 되면 우울했고, 가족들의 가벼운 안부 인사에도 울음이 터졌다.
회사 내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절규하고 싶었고, 절규하고 싶은 만큼 입을 다물었다.
죽을 것 같은 고민의 시간들이 지났다. 회사 안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일에 치여 바보가 되는 느낌. 성장은 없이 곪아가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
코로나 걸려서 죽기 전에 이러다가 큰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 퇴사를 결심하고 경영지원 이사님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하겠다고 통보했다.
부재중이었던 대표는 며칠 뒤 돌아와 나를 붙잡았다. 힘든 부분을 이해해주기보다는 내가 나약하다, 예민하다며 조금만 더 견디면 내가 성장할 거라며 일주일만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대표와 대화하며... 정말 내가 예민한 걸까... 정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견뎌볼까 하며 생각을 바꿔볼 참이었다.
그 날, 나는 대표가 집착하던 프로젝트를 1차를 넘어 2차적으로 진행하며 마무리를 앞두고 있던 참이었다.
한 고비를 넘으면 또 한 고비가 물결치듯 넘어오는 식이라,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료를 미리 수정하고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휴식이 절실했다. 꽤 큰 라이브 행사를 앞두고 있었고, 팀원의 퇴사로 수많은 사람의 이력서를 가려내며 면접관으로써의 준비도 하고 있었던 차였으며, 막 촬영을 끝내고 그다음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한 거야. 쉬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1시간 반의 임원 미팅을 끝낸 나는 무작정 금요일 연차를 썼다.
(임원도 아닌 내가 매번 왜 그 미팅에 참석해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보고, 지쳐야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빨리 프로젝트 자료를 넘기고 푹 쉬면서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풀어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예고편도 없이 그가... 또 나타났다.
그나마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하며 오후 회의를 끝내고 나가려는 찰나, 신임 이사가 또 나를 불러 앉혔다.
"내가 꼬투리 잡으려고 잡는 건 아니지만.."
"?! (그 말은 본인도 이건 꼬투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닌가)"
" 이 수정한 자료 말이야. 내가 봤을 땐 폰트도 이거랑 이거랑 다르고, 줄이 맞지가 않잖아.
좀 똑바로 보고 할 수 없어요?"
"?!!!"
다시 보고 다시 봤다. 어디가 줄이 맞지 않다는 건지.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오타가 있을 수 있고 며칠을 이 자료만 봤으니, 내 눈에 띄지 않는 실수들이 타인의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은 당연했지만... 아무리 봐도 줄이 맞지 않는다는 문제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아무리 봐도 확인이 안 되는데,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 아... 아니.. 이걸 좀 봐"
그는 갑자기 당황하며 자를 꺼내 들었다.
프린트된 PPT 자료에 자를 대가며 그는 이게 줄이 맞지 않은 게 아니냐며 스스로 자를 대가며 나를 몰아붙이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꽤나 당당하려고 노력하며 나에게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이사님, 이 부분은 디자인적인 부분이라 일부러 이렇게 기획을 했고요.
이 타이틀들은 영문과 한글이 혼재되어 있다 보니 PPT 파일에서도 그 영역은 수정이 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 아니 나도 PPT 많이 해봤지 않겠어? 내가 한번 해볼까? 해볼까요?"
아.. 진짜 그때 그냥 네가 하세요라고 깔끔하게 손을 털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답도 없이 몰아붙이는 그에게 치가 떨렸다.
수정은 해보겠지만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며 일단 수정을 해보긴 해보겠지만, 현재 제 상황이나 업무들이 살인적인 스케줄인 거 아시면서 이러시면 진짜 너무 힘이 든다고 처음으로 목소리 톤을 높여 따졌다.
'아.. 아니 나도 그거 알고, 그럼 그 이야기는 됐고-'
당황과 화가 섞인 그의 회피에 기가 막혔다.
그 이후에도 뭔가 다른 업무를 이야기하며 딴지를 걸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삐-------------- 하고 맥이 끊어졌으니까.
PPT 파일을 인쇄해서 자를 대고 체크하는 법은... 어디서 온 방법일까. 옛사람들은 그렇게들 하나.
에너지가 바닥나버려 그냥 퇴근한 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걸 다시 수정해야하나.
이걸 다 끝내야만 연차를 오롯히 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결국 나는 집에서 그 자료를 열어 수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 안되는 꼬투리에 되지 않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결국 최후에는 꼬투리 잡을만한 디자인 요소를 다 삭제해버렸다. 밋밋해 지던 말던,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정은 새벽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고, 금요일 휴가날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오후 2시. 손을 놓고 끝을 맺었다.
한계를 넘어서 있는 나에 대한 멈춤과 꼬투리에 갈기갈기 난도질당한 ppt수정에 대한 끝맺음이었다.
꼬투리 잡던 그 사람은 여기서 더 하면 뭔가 터질 것 같았는지, 원본 파일을 달라며 요구했고 우리팀 다른 친구에게 수정을 요청했지만..훗.
어디가 잘못되고 수정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똑같은 대답만 듣고 거기서 끝냈었다고...
결정했다.
나는 여기서 영원히 멈추지 않고 한계에 한계를 넘을 거다.
업무의 융통성도 실무에 대한 지식도 없는 저 사람과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나를 둘러싼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더 얼마나 나아갈 수 있을까.
이미 여러모로 잘 활용할 수 있는 All around player가 된 나라는 사람에게 이들은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멈추지 않을 거다.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
나는 퇴사 의지를 명확히 하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