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랑종>
영화 <곡성>을 보던 날이 떠오른다.
해맑게 퇴근 후 영화나 보지 않겠냐며 친한 언니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곡성>의 티켓을 쥐고 호기롭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던 나.
그 흔한 줄거리도 예고편도 보지 않고, 잠시 스친 포스터를 보며 '웬 시골에서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나나 보네?'정도만 유추하고 낄낄거리면 들어갔었던 나와 언니는 몇 시간 뒤 '아쿠마'의 잔상을 떠올리며 집에 가지도 못한 채, 새벽 2시 반까지 환한 카페에서 그 충격과 긴장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했었더랬다.
(곡성을 심야 영화로 봤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
그 이후 계속 머릿속에 남는 곡성의 스토리와 메타포를 따라가며 많은 이들의 해석을 찾아 읽으며 아 '나홍진'이라는 감독은 참 대단하게 미쳐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꽤 오래 기다려왔던 것 같다.
새로운 신작이 나오기만을!
그리고 개봉했다.
영화 <랑종>
코로나 시국 거리두기 4단계임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퇴근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간 오늘의 날씨는 '마치 태국'. 습도가 높으면서도 하늘은 주홍빛, 낮에 잠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려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정말 랑종을 보기 좋은 날씨였달까.
서두가 너무 길었다.
(직접적인 스포 따윈 하지 않는다. 궁금하면 영화로 직접 봐야 할 영화니까 그래도 읽다 보면 스포가 될 수도...)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을 설명하는 듯한 자막과 아름다운 태국의 전경, 나직이 시작되는 무당 '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랑종은 초반부터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되는 느낌이다.
무당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자 하는 우리가 흔히 보는 TV 속 다큐멘터리처럼.
무당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신의 선택으로 무당이 된 '님'은 강하고도 부드러운,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진 것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리고 올라가는 타이틀 <랑종/무당>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 낯선 시골 마을.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이곳의 사람들은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은 조카 ‘밍’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날이 갈수록 이상 증세가 점점 심각해지는 ‘밍’. 무당을 취재하기 위해 ‘님’과 동행했던 촬영팀은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리고 가족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 피에 관한 세 달간의 기록
공식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사실 실제로 영화를 접했을 때 느껴지는 느낌은 정말 보는 사람이 스토리를 대하는 방식, 삶의 취향, 멘털의 강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 같다.
시사회 후기를 남긴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호불호'가 극히 갈리는 영화라 평했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체 이야기를 따라가는 흔들리는 화면에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았다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때문에 나도 그런 후기들을 보며 이 영화를 지금 이때 극장에 가서 직접 확인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직접 극장에서 보고 온 내 개인적인 추천 점수는?!
5점 만점에 4.7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무섭고 두렵기만 한 공포 영화를 기대했다면 글쎄, 조금은 다른 장르의 영화이기에 김이 빠지거나 혹은 너무 잔인하고 징그럽다고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영화가 그리고 제작자가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너무나 명확해서, 그 너무나 확고한 세계관 때문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나는 한참을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권선징악, 무당의 삶, 핏줄에 얽힌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픈 집착... 그리고 소소하게 삐져나오는 인간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때로는 이용해야 하는 삐뚤어진 사랑, 이기심, 저주 등이 이 영화를 감싸고 있는 주된 요소들이지만 역시 나홍진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결론적으로 그것.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의심하지 마라'는 믿음에 관한 메시지.라고 나는 느껴졌다.
메시지가 주는 깨달음으로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는 <곡성>.
조카 '밍'의 이상한 행동들이 괴이하고 경악스럽기까지 한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밍'의 가족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무시하기도 하고, 노력하기도 하고, 극복해보려고도 한다. 그럼에도 그중에서 가장 '밍'을 걱정하고 직접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려고 나섰던 이 모이자 무당인 '님'.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동병상련이기도, 하나뿐인 조카를 도와주고 싶은 절박한 마음을 가진 그녀는 정말 믿음직한 극 중에 단 하나뿐인 '믿을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내가 찾은 '님'의 무당으로써의 가장 큰 힘은 영험함이나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신통력, 유명세 같은 것이 아닌, 그녀 자체가 지닌 정말 순수하고 맑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었을까.
그 힘을 통해 무당으로써의 자신을 지켜나가고 버텨왔던 '님'에게 의심을 품게 하는 누군가의 한 마디가 이 영화의 반전 포인트이자 판을 뒤집어놓는 뜨거운 핵임을...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 아프고, 분하기도 하고 슬펐던 것 같다.
우리 인생에서도 그런 사람들, 가끔 있지 않나?
실컷 열심히 달려오고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과 확신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그런 생각 없고 몰지각한 사람들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첫째, 내가 옳다고, 맞다고 믿는 것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것.
의심하지 말 것. 나 자신을 믿을 것.
둘째, 제발... 타인들에게 나쁜 짓은 하지 말자. (나쁜 짓은 돌고 돌고 돌아 어쨌든 후대에까지 내려오나니..)
그 두 가지...
시종일관 어두침침하니 이끼와 풀 냄새가 가득할 것만 같던 아르르한 장면들과 대비되는
환한 대낮의 마지막 장면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빙빙 돈다.
강하고 굳건해 보이던 '님'의 그 그 슬플 정도로 불안해 보이는 그 마지막 얼굴.
그리고 울음소리.
휴....
현혹되지 말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