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저쨌거나 LOVE MYSELF !
나에게는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가족에게도 소개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 남자친구에게는 8년을 만난 애인이 있었다. 그녀와 결혼날짜도 잡고 식장도 잡았다고 한다. 웨딩촬영한 사진도 내 두 눈으로 봤다. 이 모든 건 그녀와의 통화를 통해 알게 됐다. 기막힌 사실은 나에게도 내년에 결혼하자고 틈날 때마다 조르고 있었다는 것.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더 걱정하고 있었고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서로를 미워하는 걸로도 모자랄듯한 관계지만 우린 서로를 걱정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2년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가족관계도 고향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도 꾸며냈다. 참으로 창의적으로 나쁜 인간이다. 그에게 존속했던 2년이라는 시간도 아깝고 함께하며 생긴 지울 수 없던 상처들이 가장 마음을 쓰리게 한다. 그가 나에게 결혼하자며 졸라댔던 그 눈빛은 과연 뭐였을까. 2년 사이 그가 혀 끝으로 내뱉은 말 중 진심은 있었을까.
나는 평소 남의 연애사에 큰 관심이 없고 도파민과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삶을 지양해서 연애프로그램을 단 하나도 시청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재밌다며 얘기해 주면 그 순간은 재밌으나 혼자 있을 때 결코 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의 에피소드가 가히 그런 프로그램에 나오는 정도의 일 아닌가? 소위 ‘주작’이라 불릴 정도의 에피소드 아니겠는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는 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다시 32살의 미혼여성이 되었다. ‘내년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으려나?’ 따위의 희망은 어느 거품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며 청첩장을 만드는 나의 모습도 꿈꿨는데 말이다. 나의 솔로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그것도 하필 크리스마스를 몇 달도 안 남긴 이 시점에서.
흔히들 조상신이 도왔다며 위로해주고 있고 나 또한 그 말이 가장 최선의 위로라 간주한다. 멍 때리며 울고불고 나라 잃은 태도로 살아가기엔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젠 다시 내 삶을 살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여럿 질문들이 물꼬를 틀기 시작한다.
서른두 살이면 슬슬 시집을 가야 할 나이인가? 왜 하필 누가 이렇게 빠르게 정해둔 거지? 학창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하고 겨우 대학 들어가고 열심히 일하며 아등바등 살아냈더니 이제는 또 시집갈 때라니. 그러기엔 시간의 흐름이 너무 촘촘하다. 숨 쉴 구간의 부재를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좋고 조명 하나 키고 글을 적는 이 취미도 좋고 딱 이 삶이 만족스러운데 이름 모를 압박감이 무섭게 쫓아온다. ‘결혼적령기’나 ‘노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느껴 본 이들만 알 것이다. 일도 이제 안정적이고 꽤 괜찮은 수입을 만들어내기까지 고생한 나를 위해 이제 살짝 여유라는 선물을 선사하고 싶을 뿐인데.
더군다나 결혼은 ‘아무나’랑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나랑 할 수 있었으면 나는 이미 결혼 5주년 파티를 열고 있었겠지. 어렸을 적부터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나는 수능보다 더 중요한 게 결혼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아무나랑 할 수 없었다. 외모나 키를 전혀 보지 않아서(실제로 나와 키가 같은 남자와 오래 연애했음) 말 그대로 성격만 좋으면 그만인데 착하고 순한 남성들은 다 SNS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다. 남자를 볼 때 성실성, 책임감, 진실성 이 세 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정말 찾기 힘들다. 3년 전쯤에는 미래에 남편이 나타나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냐고 엉엉 울며 마구 내리치겠다고 친구들에게 선포한 기억이 있다. 그만큼 ‘내 짝 찾기’라는 프로젝트는 멀고도 고된 것이다.
현재는 흘러가는 번뇌들 속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 가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준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힘든 일을 겪었다고 그 굴레안에서만 지내는 것보단, 굳이 짝을 찾겠다고 허둥지둥하는 것보단 내 삶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 믿는다. 그렇게 유익한 시간의 흐름에 나를 맡기면 알아서 좋은 일이 들어오지 않겠나 싶다. 억지로 해서 될 일이었다면 이미 모든 게 완성되어 있었을 것. 인생을 미완성인 채로 흐름에 맡겨보려 한다.
하물며 평생 결혼을 못하게 되더라도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꽉 채워 보낼 수 있는 나라면 언제든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으려다 보면 내 안은 어느덧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 그 빛은 내 안에서만 빛난다. 내 삶을 밝힐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오늘도 나 자신을 사랑해 보기로 한다.
LOVE MY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