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겪은 것만이 비로소 '진짜'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뮤지컬 무경험자다. 뮤지컬은 화려함과 전문성이 돋보이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예술이지만 그저 내 취향이 아니었을 뿐. 말함과 동시에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는 게 낯설게 다가왔고 굉장히 밝은 ENFP인 분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참고로 난 INFJ인데 가장 좋은 궁합이 ENFP이다.)
따라서 뮤지컬 경험이 없는 인간으로 살아오다가 우연히 SNS에서 킹키부츠를 접했고 그 이후로 내 손가락은 하루가 멀다 하고 킹키부츠를 검색하고 있었다. 킹키부츠에선 단연 ‘Land of Lola’가 가장 유명하지만 내가 킹키부츠를 직접 두 눈으로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넘버는 바로 ‘Raise you up’이다. 이 곡을 영상으로 처음 봤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분명 귀로 듣는 노래인데 희망이란 단어가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선 희망들이 둥실둥실 떠다녔고 심지어 벅차서 눈물까지 차 올랐다. 이 공연을 내 두 눈으로 본다면 얼마나 멋질까? 처음으로 뮤지컬 예매화면에 접속하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생각보다 가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처음인데 굳이 좋은 자리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이왕 보는 거 좋은 자리에서 봐야지 싶은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공연 며칠 전까지 고민하는 나를 위해 하늘이 내린 선물인지 할인이라는 기적이 합세해 좋은 자리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볼 수 있었다.
가뜩이나 뮤지컬도 처음인데 혼자 보는 거라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챗GPT에 ‘뮤지컬 혼자 보러 가는 사람 많아?’라고 물으며 담백한 위로를 받기까지 했다. 혼술이나 혼밥엔 능하지만 혼뮤는 처음이라 적잖이 걱정했나 보다. 역시 처음은 늘 이런 맛을 선사한다.
드디어 뮤지컬 공연 당일, 나는 예쁘게 차려입고 경건히 킹키부츠를 맞이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홍석 배우의 공연을 보고 싶었기에 저녁 7시 공연을 선택했고 6시 30분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옆에 혼자 온 여학생이 함께해 줘서 외롭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려 여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킹키부츠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가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교훈성이 짙기 때문에 돌아오는 감동이 큰 편이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다른 부분에서 더 큰 영감을 받았다. 그건 바로 배우들이 관객에게 전하는 ‘열정’이다. 이렇게 위대하고 대가 없는 열정을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었나. 롤라와 찰리를 비롯해서 엔젤들, 그리고 신발공장 직원들까지. 그들은 그저 그들의 본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겠지만, 그리고 우리도 각자 우리만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 그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열정이 따로 존재했다. 가히 폭력적일 정도의 열정이었는데 그 열정을 못 잊고 이 글을 적으면서도 공연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Raise you up’의 전주가 흘러나올 때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영상으로만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 그대로 2D에서 3D, 아니 4D까지 발전한 양상이었다. 이래서 인간의 삶에서 직접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에펠탑을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두 눈에 담았던 몇 년 전 감격스러운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겪은 것만이 비로소 '진짜'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생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용기를 내서, 기회를 내서 직접 보고, 듣고, 즐겨야 할 필요가 있다.
곡의 가사도 감동에 한몫했는데 마치 배우들이 나를 쳐다보며 노래 속 가사처럼 정말 지칠 때 힘이 되어줄 것만 같았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떻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무심할 정도로 나의 불안과 걱정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고마웠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얼떨결에 난 그들의 긍정에 압도당했다. 곡이 꽤 긴 편인데 두 번 정도 눈물이 고였고 벅참은 수도 없이 느꼈다. 보고, 듣고 나면 뭐 나름 인생 잘 흘러가지 않겠나 싶은 근거 없는 희망에 휩싸이게 된다.
이번 나의 첫 뮤지컬 경험은 경이로웠고 꽤 성공적이었다. 혼자 봤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휴대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을 직접 겪은 것은 어떠한 경제적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다.
문화예술이란 그런 거 같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 감정에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지 않아 아직은 형용사로 쓰이지 못하는 그런 것을 느끼게 되는 경험. 그 감정을 통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하고 끈적이는 사색의 시간으로 이끌어준다는 것.
특히 뮤지컬은 그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미장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꼼꼼히 느껴야 하는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독백은 독백대로, 춤추며 노래할 땐 또 춤과 노래에 집중하며 쉴 새 없이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입 막고 감탄하며 ‘흥’이라는 파도에서 서핑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