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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헌 Apr 04. 2016

벤과의 5600일

프롤로그 - 이야기를 시작하며

춘분이 지난 3월 주문진 수산시장. 흰 개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얗다고 하기엔 때가 잔뜩 낀 잿빛 말티즈가 인도를 활보하고 있었다. 녀석은 몇 주 이상 거리를 쏘다닌 듯 했다.


눈이 성치 않은지 느릿느릿 차도를 건넜다. 그 때 승합차 한 대가 달려왔다. 내 손짓을 본 걸까. 차는 급히 섰고 녀석은 무사히 인도에 올랐다. 휴-


7개월 전 경기 광주 우리집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막내 '벤'이 사라졌다. 15년을 함께 했지만 집을 나간 건 처음이었다. 고층에 살 때처럼 현관문을 열어둔 게 화근이었다. 벤은 계단을 타고 1층 자동문을 지나 유유히 '탈출'했다.


녀석은 8월 말 뙤약볕 아래 장장 3시간을 헤맸다. 그날 온 가족의 혼을 쏙 빼놓고는 해 지기 전 돌아왔다. 그리곤 3개월 후 우리 곁을 떠났다.


주문진 유기견도 벤도 말티즈였다. 그날 내가 본 건 또 다른 벤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넉 달이 지난 지금 난 녀석을 잊고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벤이 주문진의 그 녀석을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벤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에 시작한 일종의 수기다. 부쩍 늙은 벤을 보고 기록했다. 제목은 '벤과의 5600일'. 처음 식구가 된 2000년 4월부터 말년의 2015년 11월까지 시간을 헤아려보니 5600여일이었다. 내 나름의 복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녀석과 함께 하는 동안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고 군복무를 마쳤다. 첫 회사에 들어갔고 이직도 했다. 강릉에서 용인으로, 그리고 광주로 이사도 네 차례나 했다. 어느 집에서든 녀석은 쉬 할 곳부터 찾곤 했다.


5600일의 기록은 말년의 벤 이야기가 다수일 것 같다. 몇 편이 되든 주 1회 이상 내놓을 계획이다. 사실 녀석이 있는 동안 잘 해주지 못했다. 아니 한 게 별로 없다. 미용은 누나 몫이었고, 목욕은 아빠, 먹이는 엄마가 주로 챙겼다. 나는 같이 산보 한 게 다였다. 미안한 마음에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의 부채를 덜 것 같다. 녀석은 우리집 다섯 번째 식구였다.


최인호의 에세이집 '가족'에는 박목월의 시 '가정'의 몇 구절이 나온다. '알전등이 켜진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들/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시인은 가정을 아홉 켤레의 신발에 비유했다. 최 작가는 이에 착안해 '일곱 켤레의 신발'이라는 짧은 글을 썼다. 본인과 아내의 신발 만이 놓여 있던 그의 집 현관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딸과 아들의 신발이 놓이고 사위와 며느리, 손녀의 신발도 등장했다.


우리집도 그랬다. 벤이 온 후 목줄, 배변 봉투, 똑딱이가 달린 강아지 외투가 신발장에 하나 둘씩 쌓였다. 식구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녀석은 그 많은 신발들을 헤집으며 '세레모니'를 펼치곤 했다. 앞발을 든 채 껑충 껑충 뛰던 그 재롱이 그립다.


나도 궁금하다. 벤과의 5600일, 어떤 이야기가 쏟아질까.


친구가 그려준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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