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eloswski on Kieslowski>
"음- 냄새 참 좋아."
어느 날 아침, 아이가 <Charlotte's Web>을 펼쳐 코를 파묻고 한껏 숨을 들이켜고 나서는 기분 좋은 얼굴로 제게 말을 합니다. 아마 아내와 제가 아직 연애를 하던 시절에 샀던 것으로 기억되는 이 책. 십 년이 넘은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심지어는 바다까지 건너와 이제는 노랗게 바래버린 종이의 냄새를 아이는 좋아합니다.
"아빠도 그렇게 오래된 책 있는데."
'오래되어 바랜 책'이라는 문장과 함께 잊고 있던 책 한 권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새로 산 책들에 치어서 책장 구석으로 밀려난 이 책을 마치 구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얼른 꺼내 들어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아이는 책을 건네받고선 주르륵 훑더니 얼굴을 파묻습니다.
"음, 이것도 냄새 좋아."
"그렇지? 이 책도 노랗게 바랬지? 이건 산지 한 20년 되었다."
"내 책은?"
"그건 엄마가 산 건데... 10년쯤 되었네."
아이에게서 책을 다시 건네받고 책을 훑어봅니다. 여기저기에 그어진 밑줄들과 책 여백에 휘갈겨진 메모들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그동안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창 영화를 공부하던 때. 제게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감독의 명단 최상단을 차지했습니다. 그의 영화를 공부하듯이 보았고, 그의 책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읽었습니다. 한 번 다 읽은 후에는 차에 두고서 짬이 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 또 읽었습니다.
<Kieslowski on Kieslowski>.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쓴 자신의 인생과 영화에 관한 책입니다. 저는 작품에 관한 리뷰보다는, 작품을 만든 창작자들의 인터뷰를 훨씬 즐겨 읽고, 또 듣습니다. 만든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는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길을 걷는 저 자신의 직업적인 부분도 크게 작용할 터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배우는 것도, 자극받는 것도 많습니다. 20년 전의 저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 생각이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 들게 했었더랍니다.
What I'm thinking of is caring also for the audience's spiritual life. Maybe that's too strong a word but something which is a little more than just box-office.
책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관객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합니다. 그는 이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상영되던 때 키에슬로프스키는 베를린의 길을 걷다 어느 나이 든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는 키에슬로프스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에겐 수년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데면데면 살아가고 있던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영화를 함께 볼 기회가 생겼고, 영화를 보고 나서 딸이 5-6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며 뽀뽀를 했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말합니다. 이 두 모녀는 아마 그러고 나서도 금방 또 싸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딸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순간, 단 5분 동안이라도 행복했다면, 그 5분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 가치가 있다고요.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즉, 그의 마지막 영화를 우리가 만난 것도 그만큼의 세월이 지난 셈입니다. 동시대를 살며 그의 더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제가 달래는 방법은 그가 남긴 영화를 보고, 그가 남긴 책을 읽는 것입니다.
요즘은 영화들이 지구를 구하느라 너무 바쁜 거 같습니다. 타나토스도 죽었고, 한동안 안전할 것 같으니, 이제는 영화가 '사람'들에게도 신경을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람을 혼자 떠올리며(제가 바란다고 이뤄질 리 만무하겠죠) 겉은 많이 헤지고, 속은 노랗게 바래어 힘을 주어 만지면 바스러질 것만 같은 그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습니다. 다만, 구석에 있던 그를 이번엔 좀 더 잘 보이는 가운뎃 자리로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