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삶을 반영하는가
인터넷에서 뉴욕 타임즈에 실린 영화 관련 기사들을 이리저리 별생각 없이 뒤적이며 읽던 와중에 My Woody Allen Problem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사가 쓰인 것은 2018년 1월이었으니 한참 전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무방한 글이었습니다. 기사는 저에게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작품과 창작자의 삶은 분리되어 말해져야 할까?
영화/TV 쪽에서 일하다 보니 주변 지인들도 대부분 이쪽 관련 사람들입니다. 물론 반드시 그 이유에서만은 아지겠지만, 사정이 그렇다 보니 심심찮게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가'입니다. 이때 딱히 뭔가를 꼽기 힘들어 제 나름대로 만들어 낸 대답이 '대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몇 명의 이름를 말해줄께'입니다. 그 명단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왕가위, 허우 샤오시엔, 리차드 링클레이터... 그리고, 그 길지 않은 명단에서 늘 가장 (한국 감독 중) 윗자리를 몇 년 전까지 차지하던 이름은 '홍상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홍상수. 그의 첫 장편 영화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시작으로 모든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인터뷰라면 빠짐없이 챙겨 읽었고, 그의 영화에 대한 기사는 공부하듯 꼼꼼이 읽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학부 생활을 했던 학교와 학과의 후배라는게 은근한 자랑이자 자부심이었고, 그가 유학 시절 즐겨 읽었다는 책을 저 역시 학교를 다니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그의 불륜이 알려지게 되면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의 영화를 좋아하는 게,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든 감독이 나의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머리에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김기덕. 이미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회자되던 그의 소문들.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 지금에 그의 영화를 계속 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홍상수의 경우는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받아들이는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기덕의 경우는 도덕의 차원을 넘어 범죄의 차원으로 넘어 온 심각한 문제입니다.
좋은 예술,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만 나오는 것일까요? 삶과 작품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의 기사가 다룬 우디 앨런이 그렇고, 13살 소녀를 강간한 죄로 미국에서 도망가 현재까지도 미국 입국을 하지 않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제대로이지 않을지언정, 그들의 작품은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홍상수나 김기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평가는 창작자를 배제하고 온전히 작품만으로서만 이뤄져야 할까요 ?
사람에 따라 여기에 대한 의견은 다를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작품은 작품을 만든 창작자로부터 비롯됩니다. 창작자들이 흔히 하는 표현에 의하면 작품은 창작자의 산고를 통해 나온 아기입니다. 작품과 창작자의 거리가 가깝고 멂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모든 작품은 창작자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미성년자를 강간한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며 마음이 편할 순 없습니다.
창작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순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인'이라는 이름으로 연예인들에게 유난히 가혹하게 적용되는 도덕의 잣대는 자칫 폭력일 수 있습니다. 설리가 평상시 속옷을 입던 말던 그것은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그게 도덕적으로든 법적으로든 문제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함께 일하는 여배우를 성폭행하고, 작품을 위해 힘을 쏟는 스태프를 구타한다면? 이것은 '도덕'의 문제, '사생활'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이제 그들의 영화를 볼 수가 없습니다. 작품보다는, 영화보다는, 또 예술보다는 삶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