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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Sep 15. 2023

“미신”보다 더 무서운 “미신에 대한 미신”

알고리즘영단어:superstition,understand,charm

스티비 원더의 노래 <슈퍼스티션superstition>은 가벼운 미신에 대한 노래다. 뭔가를 충분한 객관적, 과학적 근거없이 믿는다면 그것은 쉽게 미신이 된다. superstition은 잘못된 종교적 믿음,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믿음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라틴어 수퍼스티티오넴 superstitionem으로 부터 유래했는데, 이 말은 예언, 위로하는 말, 초자연적인것에 대한 두려움, 신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등을 의미한다. 좀 더 쉬운 관점으로 단어를 분석해보면 superstition은 super와 -stition으로 나눌 수 있다. super는 슈퍼맨superman에서도 알수 있듯이 뭔가를 초월하거나, 위치상 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stition은 stand, assist, persist 등의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서 있는 것st-을 의미하는 뿌리를 갖고 있다. superstition은 간단하게는 “서있는 것 위” 혹은 “위에 서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세계를 높이로 구분해본다면, 인간의 키 높이 이상의 것들은 닿기 어렵다. 손이 닿기 어려운 구체적 경험적 한계는 곧장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유비된다.  이해한다는 뜻의 동사 understand를 “남의 아래 서다”라는 말로 분석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겸손하게, 남보다 아래 서야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자신의 높이 아래에 있으면 통제하거나 이해하기가 쉽다. 자기의 영향력 아래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원적으로 superstition과 understand는 정확하게 반대로 대응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superstition은 인간의 이해 “위에 서있는, 초월해서 존재하는” 의미로 추상하라 수 있다. 단어의 분석만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어떤 도덕적인 판단의 의미가 개입되어 있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미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가혹하게 비판적이다. 미신이라는 말은 이미 사회적인 비판적 평가가 내포된 단어다. 무언가에 대해서 ‘미신이다, 미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인 지칭이나 묘사 이상으로 도덕적이며 주관적인 비판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행동이나 믿음에 대해서 그것을 무심코 “미신적”이라 한다면 분명 큰 시빗거리가 될 것이다.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미신은 일종의 개인적인 믿음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미신에 대한 사회전체적인 폄훼와 비판은 종종 불공평해 보인다. 

미시적으로 살펴본다면 현대인들의 일상속에서 늘 미신적인 것들과 함께 살아왔고, 또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다. 미신적인 어떠한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지향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미신과 주술적인 것에 관계가 있다.  


미신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매우 선택적이다. 대체적으로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편인것 같다. 봐서 괜찮은것 같으면 용인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미신으로 폄하한다. 내가 쓰면 풍수고, 남이 쓰면 미신이라는 식이다. 기독교에서는 사주팔자를 미신으로 치부하지만, 그걸 강조하는 목사님은 개띠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뭔가 엽기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때로 부정의하고, 부당하게 행해졌던 어떠한 사회적 습속에 미신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구한말에서 근대초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 존속했던 미신들은 매우 끔찍하고, 괴기스러우며,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실제로 위협을 받거나 생명을 잃게 되는 극단적인 사례까지 빈번하게 있었던 것은 몇몇 기록들만 살펴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미신적 사회문화상에 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엽기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미신의 사례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지독한 가뭄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집단으로 방뇨를 했고, 또는 가뭄이 누군가가 매장을 잘못해거 그런 것이라 믿으며 남의 무덤을 함부러 파헤치기도 했다고 한다. 산으로 소를 끌고 올라가서 도살한 후, 피와 살을 산에 뿌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기우제이기도 했다. 지금의 관점으로야 터무니없는 짓들이지만, 거의 100여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이 연구에서 특히 공포스럽게 소개된 것은 인육포식에 대한 사례들이다. 불치병에 걸린 절박할대로 절박해진 사람들은 사람고기를 먹기도 했다. 특정한 장기, 특히 어린이의 특정 장기 등을 먹으면 병이 치유된다고 믿는 바람에 납치와 살인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분명 어리석은 믿음으로 인한 공포스러운 범죄였던 것은 틀림없다. 


당시의 신문에 보도되었던 것으로 볼 때, 그러한 사건들은 꽤 엽기적으로 이루어졌고 현대에 보도되는 공포스러운 살인사건을 능가할 만큼,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생생하게 공포스럽다. 대부분 무지몽매한 미신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당시의 언론은 보도했다고 한다. 미신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미신적인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태도는 여전히 그 파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벌어진 미신으로 인한 사건, 사례들에 대한 수집과 조사 및 연구는 대부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는 문화적 방법으로 당시 조선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미신에 물들어 있는지를 연구했다. 그래서 일제치하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한국 민속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본정부의 어용연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때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연구가 여전히 한국민속연구에 많은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연구는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한국의 미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문화적 미시사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총독부의 지침에 의해서 실시된 민속학적 연구였기는 하지만, 여전히 무라야마 지준의 저서는 매우 중요한 학술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당시 횡행하던 어리석고 공포스러운 미신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당시 한국의 문화적, 민속적 습속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준의 연구대상에 동양술수의 고급점술인 육임, 자미두수, 명리학등이 빠져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 김만태는 육임, 명리, 자미두수 등의 고급 동양술수는 책이 목적하는 바에 부합할 만큼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이지 않았던 것에서 이유를 찾고 있다. 책의 목적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무작위적인 미신적 습속을 파헤치는 것인데, 육임, 자미두수, 명리학은 학술적인 체계가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점복과 예언>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한가지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지준에 따르면, 이순신은 총탄을 맞고 운명하기 전에 부하들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내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내 입에 떡을 물려라" 


이순신이 총탄에 맞은 것으로 생각했던 적장은 조선군에 별다른 혼란이 없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자 점을 친다. 그러자 적장의 점괘에 이순신장군이 땅에 두 발로 서서 떡을 먹고 있는 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순신은 적장이 점으로 자신의 전사유무를 알고자 할 것을 미리 파악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자신도 전투를 앞두고 주역점을 종종 치곤 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과거엔 점을 치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던 듯 싶다. 


현대인들도 매일 점을 보며 살아간다.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점집을 찾아가지는 않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 나름대로의 점을 치고, 또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은 유독 길고 뜨거웠다. 뉴스에서는 더위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말하지만, 개인들은 저마다 언제쯤 더위가 그칠지를 한번쯤 예측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예측은 종종 기대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뭔가를 기대하는 행위는 반드시 예측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예측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내면 속에서 일종의 점을 볼 수 밖에 없다. 여기엔 어떤 점치는 행위도 없고, 점법도 없고, 점구도 없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점의 메카니즘과 유사한 방식으로 현실을 예측하고 이해하지 않을때는 단 한순간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영위하는 현실이 평소와 같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평소와 같이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충분히 객관적인 근거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미신적일 수 있다. 만약 매 순간 그러한 믿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려 한다면, 평범한 일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매순간 고향의 친구들이 잘 살고 있는지 전화를 해야 할 것이고, 타고 나갈 자동차의 타이어가 괜찮은지 점검해야 하고, 식당에서 먹는 음식이 안전한지 분석해야 하며,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신분이 확실한 사람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일상이 아무런 수고스러운 검증절차없이 그대로 진행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어떤 면에서 거의 허구에 가깝다.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고싶은대로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깨질 때, 일상은 크게 휘청거린다. 


우리는 종종 한국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친구가 사실 오래전 이민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한 열차사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특히,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갑자기 일정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순간들은 모두 자신이 나름대로 예측했던 “점”이 빗나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주 미시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우리들 삶의 구석구석에는 점과 예측과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일종의 사회적 관성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문화적으로, 민속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소재들이기도 하다. 


무턱대고 미신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것은 또 다른 미신과 다를 바 없다. 점과 사주팔자, 풍수 그리고 관상으로 이어지는 동양술수는 종종 미신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동양술수학에는 단순한 미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학술적 체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기만적인 미신적 믿음과 혼동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개화, 계몽, 문명, 그리고 과학으로 이어지는 현대사회의 거시적인 흐름은 과거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들을 맹목적으로 부정했다.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서구에서는 그러한 과거의 문화적 유산들이 구시대적인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분적으로 존속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나도 빨리 급진적이며 전면적으로 부정되었고 또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신은 종종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변별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근대문물과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서양은 합리성, 논리, 근대성이라는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져왔다. 반면, 비합리성, 주술적, 미신적, 전근대성은 전적으로 동양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식의 무모한 구분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다. 서양은 여전히 주술과 미신이 공존하고 있는 문화이고, 동양역시 합리적인 사유와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미신은 과학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 과학의 최선봉에 있는 과학자들 중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닐스 보어는 자신의 집 현관위에 말 편자를 걸어놓았었다. 서양에서 말 편자는 행운을 가져온다는 상징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흔한 미신중 하나다. 양자역학분야 최고의 과학자가 이런 사소한 미신을 믿는게 어이가 없었던지, 보어의 집을 방문했던 동료가 보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 정말 이걸 믿는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보어가 말한다. 

"물론, 저도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효과는 있는 것 같더라고요"


리차드 도킨스 역시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아끼는 장서가 몇 권 있었는데, 그 중에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초판본도 있었다. 어느 다큐멘타리에서 그는 자신이 소장하는 그 책을 마치 보물을 다루듯 소중히 다루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책 덕분에 초자연적인 것을 믿을 필요가 없어졌죠"


그가 책을 아주 극진히 소중하게 다룬 것은 단지 책값이 비싸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경외처럼 보였다고 한다.  


좀 더 극적인 사례는 야구와 관계가 있다. 2007년도에 양키스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공사가 있었다. 공사에 동원된 캐스틱놀리라는 인부는 당시 양키스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레드삭스의 팬이었다. 그는 공사를 진행하던 어느날 레드삭스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와서는, 양키스 스타디움의 어느 한 장소에 레드삭스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묻는다. 일종의 저주아닌 저주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의 행위는 거대한 스타디움 어딘가 한 구석에 그냥 티셔츠 한 장을 묻은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양키스 구단의 관계자들은 라이벌 선수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파내기로 결정한다. 더구나 그냥 파낸것도 아니고 적절한 의식을 진행하면서 꺼냈는데, 그 자리엔 많은 기자들과 방송사들도 있었다. 티셔츠를 꺼내는 공사는 5시간이나 걸렸다. 발굴된 티셔츠는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는데, 17만 5천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양키스 구단이 그 티셔츠 한 장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한 그 감정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미신이 갖고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여전히 개인을 괴롭히는 미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률체계가 발달하고 범죄자를 수감하는 시스템이 발달해도 여전히 범죄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연계된 사회적 이슈는 자주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다. 관성적인 미신기피증이 있기 때문일까? 기성 종교, 혹은 꽤 규모가 있는 종교단체에서도 여전히 황당한 사건과 범죄는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미신이 개인에게, 혹은 인류에게 끼친 해악은 그래봤자, 과학이 끼친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다. 만약 미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근원이 미신으로 인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피해 때문이라면, 과학은 이미 오래전에 매장되었어야 한다. 과학만큼 인간을 집단적으로 대량 살상했던 것은 없다. 잔혹했던 중세의 종교재판, 인종간의 갈등으로 인한 집단린치, 국가간의 이념 대립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지만, 과학만큼 무자비하고, 맹목적으로 인간을 해치는 것은 없었다. 


많은 과학기술들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살상을 목표로 하는 군사기술로 수렴되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미신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으로 비난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하면서, 정작 과학기술이 과시하는 미사일제조, 핵폭탄제조, 개량된 총기류에 대해서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9시 뉴스에 아무렇지 않게 소개되는 군사장비들은 사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살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마치 다이슨 청소기나 새로나온 삼성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지구 어딘가에 정말 살아 숨 쉬는 인간들에게 죽음을 불러오게 할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펜하이머는 그런 면에서 미신보다 더 위험한 과학의 어두운 면을 인지하고 또 인정했던 과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핵폭탄을 만들고 나서, 그는 진정 자신이 만든 것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를 분명히 깨닫는다. 그것에 비하면 미신이 갖고 있는 위험성이란 기껏해야 부적과 굿, 그리고 기만적인 굿으로 지출된 지폐다발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이 마치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처럼 과장되게 비난하는 것은 분명 “미신”보다 더 무서운 “미신에 대한 미신”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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