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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Sep 03. 2023

루틴의 위대한 성스러움

알고리즘영단어:routine, route, router

루틴routine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이나 과정의 패턴을 말한다. 잠들기 전의 루틴,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루틴. 출근해서의 루틴, 식사할때의 루틴. 현대인에게 루틴은 종종 신화가 될 정도로 많이 강조된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루틴routine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잠이고, 또 하나는 집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것.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반복되는 이 루틴은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의 성聖스러울 정도로 규칙적인 루틴이다.


집 역시 인간에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루틴을 제공해 준다.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것은 단지 귀소지가 안정된 정착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유목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어느 하루의 아침에 길을 나서면 반드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필요하다.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잠과 집이라는 루틴의 뿌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루틴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전쟁이나 질병같은 이른바 예외상황뿐이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루틴의 중요성, 루틴과 성공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다. 루틴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 앞에서 괴로워한다.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를 가야할지를 늘 고민한다. 


하지만, 잠들고 나서 깨어날 때, 우리는 깨어날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일단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의식과 관계없다. 잠든 상태에서 다시 각성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생물학적인 인간의 루틴이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가장 건강한 루틴이다. 


집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사회적이고 학습된 것이지만, 거의 보편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루틴이다. 간혹 집이 두개여서,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는 사례가 생길 수 있지만, 루틴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개별적인 장소의 차이와 관계없다. 루틴의 핵심은 집이라는 공간을 나서면, 다시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발길이 향하는 장소는 이곳이 될 수도 있고, 저곳이 될 수도 있지만, 돌아간다는 루틴은 분명하다. 


이 두 가지의 루틴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 두 가지의 루틴은 대개의 경우, 루틴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 너무나도 근원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중년이 되기 전까지, 잠과 집은 루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순간, 잠에서 일어나고,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루틴처럼 느껴진다. 삶의 권태나 지루함,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혐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루틴이 매우 성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반복으로 인해 내가 하루를 살고, 집이 늘 거기 있음으로 인해 내 하루를 뉘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다른 많은 루틴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성공적인 삶의 효율성과는 차원이 다른 루틴의 성誠스러움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에 반대되는 성스러움의 성聖이 아니라, 나태하거나 불규칙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반대되는 의미의 성실함의 성誠이다. 루틴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나 과정 혹은 양식이다. 지속적으로 예외없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성실한 것과 의미가 통하는 면이 있다. 동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용>에는 이러한 성실한 것에 대한 성찰이 매우 중요한 주제를 이룬다. 


태양이 매일 똑같이 뜨고 지는 것처럼, 바닷물이 늘 똑같이 들고 나는 것처럼, 달이 늘 똑같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계절이 돌고,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자연의 루틴은 절대로 어김이 없다. 동양 최고의 고전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중용>은 자연의 성誠스러운 루틴에 대해 말한다. <중용>에서 말하는 성誠은 천지자연의 늘 그러함을 의미한다. 루틴이라는 관점에서 자연은 성誠스러움 그 자체와 같다.  


성실한 인간은 자연의 그러한 성誠스러움을 본받고자 한다. 흔히 사용되는 성실하다는 말의 성은 사실 어마어마하게 막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인 셈이다. 일에 대한 책임감과 끈질김이 하늘의 규칙적인 움직임처럼 변함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얼마나 무거운가. 

루틴routine이라는 단어는 루트route에서 파생되었다. 루트route는 길이나 도로 통로 숲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삼림이 빽빽한 숲에 길을 내기 위해서는 나무를 잘라내고 억지로라도 숲을 뚫어야 한다. 그래서, 가르다, 잘라내다라는 뜻과도 연관이 있다. 분열되거나 파열된다는 뜻의 rupta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Rupta-는 분열이나 쪼개짐 갈라짐 부서짐을 의미하는 rupture라는 단어는 어원을 충실하게 반영한 말이다. 화산의 분출을 말하는 eruption 에서도 확인된다. 화산이 분출되는 것은 밖으로e- 용암을 뿜어내기 위해 땅이 갈라지기rupture- 때문이다. 은행이 파산하는 것은  bankruptcy라고 한다. 은행bank이 망했다ruptcy는 말이다. 


루트route는 흔히 등산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알프스의 험준한 아이거 북면(North Face)에는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역사상 많은 등반가들이 스스로 탐색하고 경험한 루트를 통해 정상을 정복했다. 마치 아무도 가지 않은 숲을 갈라서 길을 만든다는 어원 본래의 의미처럼, 등반루트는 없던 길을 존재하게 만든다. 뒤따라오는 이들은 선배의 유산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게 된다. 

2008년 독일 영화 <Nordwand>는 산을 오르려는 순수한 열정을 품었던 두 독일 등반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토니와 안디는 명예, 돈, 사회적 보상, 그 어떤것 보다도 산을 오르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가졌다.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루이제는 베를린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토니와 안디에게 당시 정복되지 않았던 아이거 북벽의 등정을 부추긴다. 오로지 산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토니와 안디는 조금씩 아이거 북벽 정복이라는 열망을 갖게 된다. 


영웅적 아이콘이 필요했던 히틀러의 독일제국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부추기며 알프스의 마지막 난제로 남아있는 아이거 북벽정복을 정치적인 이벤트로 이용하려고 한다. 정치와 언론은 아이거 북벽을 정복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많은 등반가들이 등정 도중 목숨을 잃었기에, 죽음의 산이라고 불리는 아이거Eiger. 


아이거는 유럽의 전설에 흔히 등장하는 오우거ogre와 소리가 닮았다. 오우거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유럽의 거인괴물을 말한다. 무시무시한 역사와 어원을 갖고 있는 아이거 북벽North Face은 현재 가장 잘 나가는 등산용품 브랜드의 이름이 되었다. 한때,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봉우리의 이름이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최신 등산용품 브랜드가 된 사연은 아이러니 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당시의 등반장비는 정말 보잘 것 없이 단순하다.  지금처럼 고어텍스라든가 통기성, 보온성, 가벼움 등의 기능성 재질이 장착된 용품은 당연히 없었다. 주인공들은 면으로된 벙어리 장갑, 스웨터, 캔버스 천 같은 침낭, 자일, 캐러비너, 피켈 따위의 기본적인 장비만을 챙긴 채 등반을 떠난다. 심지어 토니는 자신이 직접 사용할 피톤을 대장간에서 만들기도 한다. 두 사람은 드디어 산이 있는 스위스로 출발하는데, 기차가 아닌 자전거로 이동한다. 독일에서 스위스 아이거까지 700킬로미터.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험난한 등반의 길은 때로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던 보잘 것 없는 손톱조각 끝까지도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성스러운 오체투지의 길.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는 순례의 길처럼 그려진다. 


인간은 높이 오를수록 자기 내면의 심연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드는 것만 같다. 나무가 높이 자라기 위해 더 깊게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높은 산을 열망하며 그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영혼은 그래서 어딘지 쓸쓸한 면이 있다. 세상도, 사람도, 사랑도, 일도 모두 까마득한 산 아래에 보잘것없는 점처럼 남겨두고, 그들은 오른다. 천국으로 오르는 길이라 한들 그렇게 필사적으로 오를 수 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만큼 드라마틱한 요소가 존재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산 위의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환경과 산 아래의 화려한 호텔로 상징되는 문명세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눈덩이로 갈증을 해결할 때, 호텔에서 망원경으로 북벽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샴페인을 마신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리스프로 허기를 달래면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은 호텔에서 스테이크와 포도주를 마시는 식이다. 


토니와 안디는 자신들만의 루트를 개척해서 최초로 등반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등반을 경쟁하던 다른 팀의 부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을 도와 함께 하산하던 중, 결국 눈보라 속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결국, 마지막까지 생존해있던 토니도 구조대의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En route라는 표현은 프랑스어지만, 영어에서도 많이 쓰는 말이다. 영어로 on the way라고 하면 된다. 현재 루트에 있다는 뜻이니까, 곧 온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와이파이 공유기로 사용하는 라우터router는 네트워크 간의 정보를 교환하는 경로를 탐색하는 장치다. 디지털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찾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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