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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Jun 20. 2023

안드로이드Android와 방탄소년단

알고리즘보카:android, idol, kaleidoscope

방탄소년단BTS은 한국의 대표적인 아이돌idol이다. 영어단어 아이돌idol은 한국어로 숭배의 대상, 우상이라는 뜻이다. 아이돌은 대중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이 되었다. 아이돌idol이라는 단어에서, ido-는 형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idol은 모양, 특히 사람의 모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우상숭배는 idolatry 라고 한다. 인형을 doll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는 그리스어로 아름답다는 뜻의 칼로스kalos와 형상이라는 뜻의 eidos, 그리고 본다는 뜻의 scope가 결합된 말이다. 아직도 문구점에 가면 쉽게 칼레이도스코프를 볼 수 있다. 삼면 혹은 원통 내부가 거울로 되어 있어서 간단한 무늬라도 기하학적인 대칭으로 인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말은 인간을 닮은 로봇이라는 의미다. 특히 인공지능AI이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지금, 안드로이드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Android는 사람의 형상이라는 의미다. Andro-는 사람의, 사람과 관계있는 의미를 갖는다. 영어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름, 앤더슨Anderson은 말 그대로 사람Ander의 아들Son 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맥락을 적용한다면, 사람의 아들은 예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상징적인 메시아로 등장했던 네오는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네오의 상징적인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구원자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극중 이름이 앤더슨, 곧 사람의 아들 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Andro-라는 말이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류학anthropology 에도 역시 andro-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남성을 의미한다. androgyny. 라는 단어를 보면 그것이 훨씬 분명해진다. Androgyny는 양성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andro-는 남성, 그리고 gyny는 여성성이다. gyny는 misogyny여성혐오, gynaecology 여성의학과 와 같은 어휘에서 여성이라는 의미로 실현된다. mis-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misanthrope 이라고 하면,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에서 안드로이드는 매우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전기양을 꿈꾼다는 것은, 사람처럼, 안드로이드도 잠이 오지 않을 때, 눈을 감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을 100마리까지 세는 것과 관련한 인유allusion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1982년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서 <블레이드러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2019년 LA를 배경으로 <블레이드 러너>는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SF적 디스토피아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블레이드 러너>는 무수한 컬트매니아를 파생시켰을 만큼 스타일과 테크닉, 그리고 주제 면에서 이후의 수많은 사이버펑크 SF쟝르에 영향을 주었다. 


  제목의 “블레이드러너”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안드로이드가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지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은 안드로이드와 사람을 분간하지 못한다. 심지어 안드로이드 자신조차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동물은 물론 인간까지도 인공적으로 창조할 수 있게 된 시대.  사람인지 안드로이드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가 필요한 시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은 여전히 안고 살아가야 하는 역설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런 시대에 “인간”이라는 말은 매우 양가적이다. 인간적이어서 좋을 수 있지만, “인간스러워서” 사악하기도 하다.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엘던 타이렐( Eldon Tyrell)사의 모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More Human than Human) 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단순히 회사의 좌우명일수도 있지만, 영화의 주제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일 수도 있고, 혹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의 핵심이 될 수 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로이, 프리스, 조라, 레온 등은 모두 넥서스 6(Nexus 6) 라는 첨단 기술의 집약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이다. 전쟁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위해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에겐 처음 제작될 때 결정된 한정된 수명이 있다. 기껏해야 4년 정도로 별로 길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최고의 정점으로만 채워 넣은 것처럼, 안드로이드들은 짧은 생애의 주기 동안 모든 것을 쏟아내고 수명을 다한다. 


자신의 수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기존의 안드로이드들과는 다르게 로이와 그 일행들은 자신의 창조주, 혹은 아버지, 혹은 제작자인 타이렐 박사를 찾아온다. 마치 필멸의 인간이 신을 찾아나서듯, 로이는 타이렐 박사를 만나 자신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의 수명은 창조주인 타이렐 박사도 어쩔 수 없는 영역임을 알게 된 로이는, 자신의 미리 예정된 운명과 그 운명을 프로그램한 타이렐 박사에게 분노하며 급기야 박사를 살해한다. 박사의 눈을 가해함으로써 사망하게 하는 로이의 행위에는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오이디프스』를 비롯, 많은 신화와 전설속에서 눈을 가해하는 것은 일종의 벌이며 복수의 의미를 갖는다. 로이는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에게 일종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는 로이가 시의 한 구절을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영국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저항과 혁명의 정신”을 묘사한 「아메리카」 라는 시이다. 물론, 이 시는 원래의 작가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의 주장으로 블레이크로 낙점되었다고 하는데, 그 본문의 내용은 영화에 차용되면서 의도적으로 약간 수정되었다.


 원래의 본문은 “불타는 천사가 날아오른다, 천둥이 하늘 높이 울려퍼질 때. 그들의 해안가: 오르크의 불길로 분노가 불타고 있다“("Fiery the angels rose, and as they rose deep thunder roll'd. Around their shores: indignant burning with the fires of Orc.") 이지만, 영화에서는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추락하는 것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Fiery the angels fell; deep thunder rolled around their shores; burning with the fires of Orc.)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중 하나가 바로 정해진 운명에 대한 저항이라면 로이는 자신이 마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상으로 추락하는 루시퍼와 같다. 


시종일관 영화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성서적인 주제를 계속 암시하는데,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은 비단 안드로이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평범한 인간들도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까? 영화는 인간의 자리에 인간을 세워서 표현하기 어려운 진실을 인간이라는 자리에 안드로이드를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따르는 자와, 그 운명을 거스르는 자. 로이와 데커드의 대립은 어쩌면 그런 구도로 읽혀질 수도 있다. 


로이와 데커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할 만하다. 일단, 둘은 모두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또한 로이와 데커드 모두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하는 엄격함을 갖고 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잔인한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로이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저지른 폭력은 매우 충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데커드 역시, 자신이 추적해서 발견한 안드로이드를 처리하는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사실상 평범한 사람들에겐 인간과 다름없다. 그런 안드로이드를 퇴역(영화가 시작될 때, 이러한 안드로이드의 제거는 처형(execution) 이 아니라 퇴역(retirement)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데커드의 폭력은 충분히 정당한 이유가 있지만 관객에게는 여전히 무자비한 폭력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토록 잔인했던 로이가 마지막 순간 데커드에게 보여준 모습은 인간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용서와 구원이었다. 마치 냉장고의 스위치를 뽑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이나 망설임 없이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키는 데커드의 모습과는 한편으로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로이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지만, 데커드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삶의 최우선인 것처럼 여긴다. 누가 더 인간적인가? 라는 상투적인 질문이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자신의 운명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결정’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자기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자시의 삶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창조주가 자신처럼 물리적인 존재로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이는 분노와 동시에 기쁨과 환희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던 그가 이제 수명이 다해가는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창조한 손길에 기대어 자신의 구원을 의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자신의 삶 전체에 걸쳐서 송두리째 잃어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상실감. 그것은 창조주 아버지에 대해 처음에는 애원과 비탄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은 모두 표정이 무겁다.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종족을 위해 자신들이 치러야 했던 막대한 고통과 괴로움의 기억들을 안드로이드들은 트라우마처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안드로이드의 존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안드로이드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연출된 장면은 데커드와 로이의 결투 장면에서이다. 싸움 끝에, 데커드는 빌딩 끝에 간신히 매달려 추락 직전까지 가게 된다. 바로 그때,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던 로이가 그의 손을 끌어당겨 데커드를 구해준다. 이 장면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숭고함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로이가 자신의 못박힌 손으로 자신의 고통은 개의치 않으면서, 자신을 죽이려했던 데커드를 구해주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 인간적인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했었다. 떨어지는 데커드를 끌어 올린 로이는 자신이 인간의 노예로 두려움 속에 살면서 겪었던 일들을 읊조린다. 그리고 그 장엄한 우주공간의 놀라운 경험들도 결국은 “그 모든 시간들은 모두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마치 빗물 속에 사라지는 눈물처럼”이라고 말하는 데, 그것은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존재로서, 인간과 안드로이드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존재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오히려 로이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안드로이드로서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데커드를 구해주는 로이의 모습은 어떤 인간애의 발로라기보다는 기계 고유의 경제성과 효율성, 혹은 불필요한 행위를 지양하는 객관적인 특성으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무력한 인간, 그 인간을 떨어뜨려 죽게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복수의 관점에서 당연하지만, 안드로이드의 관점에서는 불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데커드와 로이가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상황 속에서 생겨났을 법한 분노의 감정을 로이에게 투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투영된 감정의 주체로서 분노와 증오가 격렬하게 증폭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로이가 데커드의 손을 잡아 올렸을 때, 로이는 자신안의 분노와 증오를 초월한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그러한 로이의 모습이 숭고한 인간애의 발로라고 해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로이와 그의 안드로이드 동료들이 정말 “더 인간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들이 삶에 대해서 집착할 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분노할 때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로이의 일행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과 멜랑콜리적인 고독과 우수는 안드로이드들이 더욱 더 인간처럼 느껴졌던 이유가 되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통감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압도적인 상실감, 그 치명적이고 폭압적인 운명 앞에서 그들은 굴복하지 않으려 치열하게 투쟁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치열함 속에 인간적인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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