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존대법과 영어교육

by 사주영웅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는 존대법이 없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화법은 분명 한국어보다 상당부분 더 활성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효’라는 개념은 한국과 중국 고유의 개념이다. 당연히 영어에는 효에 상응하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어권 사람들은 부모의 존재와 의미를 우리와 많이 다르게 생각할까? 용어는 없지만 행동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존대법은 영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영어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말과 행동들이 살아있다.


인턴쉽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실직한 두 중년의 사내가 구글에 입사하기 위해 갓 스물이 넘은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성공적으로 인턴쉽 과정을 끝마치게 된다는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라고 할까. 구글본사의 캠퍼스가 파스텔톤으로 그려지는 아기자기한 배경이 꽤 볼만하다. 구글의 캠퍼스를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는 재미도 있지만, 나에게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중학교 정도의 아이를 둔 중년의 아저씨들이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무살 젋은친구들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삶의 경험에서 아저씨들은 물론 선배였지만 똑같이 인턴쉽 프로그램을 받는 예비 지원자로서 청년들의 스무살은 아저씨들의 40대와 차별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아저씨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그들이 나이가 많다고 더 배려해주지도 않았다. 물론, 이 사십줄의 아저씨들도 젊은 친구들의 그런 말과 행동을 크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연히 싸가지 없게 내보이는 젊은이들 특유의 그 이기적인 행동과 배려하지 않는 언행은 기분이 나쁠만도 한데, 아저씨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런 장면들은 영화적인 연출인지, 문화적인 차이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나이차이는 그들간에 이루어지는 소통의 방식에 어떤 정당성이나 이유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그 소통에는 한 개인으로서의 인격과 능력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천천히 만들어지는 믿음만 있을 뿐이라고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더 해 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의 ‘다른’ 부분이지, 반드시 더 ‘좋은’부분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영화속에서 젊은이들이 아저씨들을 자신과 같은 동료로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나이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인생에 대해 그들이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유대감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그 이십년 넘는 세월의 간극이 우정이라는 믿음으로 채워지고 관계는 평등해진다.

한국에서도 점점 특유의 연령주의, 나이를 중심으로 결정되는 문화는 점점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젊은 세대들에게는 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예전만큼 존대는 대우받지 못하고 있고, 특히 영화를 중심으로 존대법으로 위계가 규정되는 화법은 그 지위가 점점 퇴색해 가고 있다. 존댓말은 불편하다. 특히 어떠어떠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심지어 어쩔 수 없는 기분으로 존댓말을 써야할 때에도,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불편하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꼭 통행세를 무력으로 받아내는 양아치들이 버티고 있는 가까운 길을 피해서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존댓말은 아주 불편하다. 물론, 가끔 통행세를 내지 않고 지나려다가 곤혹스런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영화들은 존댓말을 현실에서만큼이나 엄격하게 지키고 있지 않다. 나이도 대충 건너띄고, 형 동생 사이도 대충 건너띄고 불편한 존댓말 대신 편한 말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사실, 그게 더욱 흡인력 있지 않은가?


한국어의 존댓말은 사실상 이젠 열등한 기능이 되어버렸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상대와 어른에 대한 공경심,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식상한 이유로 존댓말의 의의를 포장하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시대가 지금과는 달랐을 때, 즉 예를 들어 노비같은 차별적인 계층이 존재하던 시대의 일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존댓말은 별 의미가 없다.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춘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무시하고 우습게 생각한다고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은 꽤나 어리석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는 알량한 '존댓말'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평말이라 해도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의사소통의 촉수들이 꿈틀거린다. 어조, 억양, 말씨, 목소리, 말투, 손짓, 그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의사소통의 촉수들의 조심스런 탐지는 행하는 사람과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 '존중'의 의사표현으로 충분히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시대는 변했는데, 존댓말에 대한 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은 존댓말의 권위를 조금씩 유폐시키기 시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속에서는 마치 죽은 자리를 맴도는 유령처럼, 존댓말은 불구의 몸으로 떠나지 않고 있다. 존댓말이 없으면 얼마나 편하고 신나며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혹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존댓말은 그 어법이 기형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닐까? 원래의 존댓말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비민주적이며, 억압적이고, 맹목적이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오히려 존댓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은 한국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이다. 어느정도 한국어학당에서 공부를 잘 한 경우, 대체적으로 그들은 양아치같은 고등학생들 보다도 훨씬 더 존댓법을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존댓말의 사용은 맹목적으로 관성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나이와 학번으로 대표되는 모든 연번의 순위를 기준으로. 이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다. 존댓말에서 높임의 대상은 반드시 나이로만 결정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항상 더 어린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위에 있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중년에 접어든 누군가는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젊은이들에 대해서 모든 가치의 측면에서 거의 무조건적인 우위에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인생의 선배들, 중년이거나 혹은 퇴직후의 삶을 살고 있는 노교수이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들 그렇게 젊은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자신들은 얼마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는지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이에서 오는 이런 문화적 오만함이 아주 불쾌하다. 어엿한 성인이고 자기 삶의 궤도를 추적해 나가는 열정의 소유자들에게 상처가 깊을수록 성숙해진다느니, 꿈을 품으라느니, 희망을 잃지 말라느니, 청춘을 잘 가꾸라느니..등의 닭살 돋는 말들을 콘돔포장지에 쓰여진 활자처럼 유혹적으로 찍어내고 있다. 그렇게 젊은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은 선배들이 정작 만들어 놓은 지금 현실은 어떤지 반성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청춘에게 보내는 중장년층의 센티멘탈한 메시지는 나에겐 아주 기만적으로 들린다.


존댓말은 그 본래의 고유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고, 이젠, 나이주의나 전근대적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고집스런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존댓말은 차라리 없느니 못할 것이다. 굳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편한 말을 놔두고 권력의 위선적인 시녀역할이나 하는 존댓말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을까? 억지스럽게 존댓말을 이끌고 가느니, 편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걸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내 생각에는 백만배 더 중요하다. 아 그런데 누가 처음 말을 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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