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워커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20억에 가까운 인구가 영어를 공부한다. 영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화자의 수보다 외국어로 공부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 영어를 쓰는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가 영국이나 미국이 아닌 중국인 이유다. 지역적으로 영어는 전 세계 60여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유산이면서 그 자리를 전기와 자동차,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명되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이 드리우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미 충분히 세계화가 이루어진 영어를 외국어로 공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차라리 영어를 공용화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영어사교육에서 오는 계층간의 갈등, 영어교육에 쏟아 붓는 막대한 예산 절감등 사회 경제적으로 충분히 많은 이득이 있지 않을까? 1990년대 후반 소설가 복거일이 영어공용화를 주장했을 때, 그의 생각에는 분명 이런 맥락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민족어의 긍지, 애국심의 발로를 무기로 한 많은 민족주의자들의 인신공격성 비난으로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이 나라의 언어가 버젓이 있는데, 일제 치하에서도 지켜낸 민족의 언어를 두고 어떻게 영어를 공용어로 쓸 수 있느냐가 그 반대의 주된 논지였다. 복거일은 매우 불충한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여론은 복거일을 앞에 두고 나름 가슴 뿌듯해 하는 민족주의의 발로를 위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영어는 여전히 그 ‘공용화론’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서화된 제도가 없고, 효력있는 규제가 없을 뿐이지 이미 한국은 실질적인 영어 상용화국가가 되어간다.
한국에 온 외국인 영어사용자는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한국어를 배우지 않거나 배워도 별 진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로버트 할리나, 이참, 샘 레밍턴 같은 사람들의 한국어 실력은 정말 놀랍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거나 배우려해도 실력이 잘 늘지 않는 이유는 일단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경우, 동네 슈퍼에 가도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하다못해 주인아줌마가 영어를 못하면 아마 중고등학생 자녀를 통해서라도 말을 할 것이다. 물론, 영어로 말이다. 어느 장소에 가도 영어 사용자는 매우 친절하게 영어로 대접받는다. 표지판, 안내판, 메뉴, 상점이름 사실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 만큼이나 많은 곳에서 영어가 병기되어 있다.
홍대 앞 가나다 한국어 학원이나,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그들은 한국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단다. 특히,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교류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단 어느정도 영어가 되는 사람들이고, 영어가 되다보니 자신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음에도 소통은 주로 영어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간간히 그들이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한다. “대박” “소주” 같은. 하지만 외국인들이 애써 더듬거리는 한국어를 써 보려고 해도, 대개 동석한 한국인들은 처음 몇마디만 1학년 국어교실의 선생님처럼 천천히 말해주고 이내 다시 대화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이루어진다.
영어를 쓴다면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큰 불편이 없을 만큼 한국은 영어가 통하는 나라다. 한국에서 얼마나 영어가 광범위하게 쓰이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영어공용화론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의 철퇴를 내리쳤지만, 점점 더 미친 듯이 가중되는 영어교육을 한번 생각해 보자. 파주에, 경기도에 영어마을이 생기고 제주도에는 점점 더 많은 국제학교가 유치될 것이고, 영어체험관이 생겨났다. 2010년 3월 2일 포스텍은 영어공용화 캠퍼스를 선언했고 서울의 몇몇 사립대학에서도 영어수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술지의 경우도 당연히 한국어로 쓸 때 보다 영어로 쓸 때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다 못해 미취학 아동들도 영어로 태권도를 하고, 영어로 피아노를 배우기도 한다. 이쯤 되는 현실이고 보면, 오히려 공용화되지 않아서 생기는 불이익이 공용화 되었을 때 감수해야하는 민족적 자존심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지 않을까?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느냐의 문제와 상관없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층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사회 경제적으로 능력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원정출산을 하고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내며 영어권의 수업을 내용으로 하는 외국인 중고등학교로 보내는 건 뉴스도 아니다. 오죽하면 원정출산을 못 가게 된 것이 뉴스가 되었을까. 공용화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문제는 사실, 자식들에게 지속적으로 꾸준한 영어를 교육시킬 만한 여력이 없는 부모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문제일 것이다. 영어권으로 수학하러 가는 학생들과 부모들은 자신의 기득권에 안정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한달짜리 영어집중훈련, 영어마을 체험이라도 보내려고 한다. 효과가 있는지의 문제보다, 일단 부모로써 해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의무를 다했다는 자기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용과 효과면에서 이쯤되면 국가정책상의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최소한 출판과 방송에서 영어권의 방송을 전면 수입해서 보여주거나 개방하거나 하는. 그럼 최소한 티비를 보면서 기본적인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을까?
고종석이 지적한 것처럼, 공용어로서 영어를 반대하는 것은 영어를 좀 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통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겠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의미한다. 공용화론을 주장하는 것보다, 공용화론을 반대하는 목소리에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다. 공용화된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하게는 초중고등학교의 이중언어교육, 방송채널의 개방, 인터넷 저작권의 개방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다시 한번 고종석의 말을 빌린다면, “적극적으로 영어공용어를 추진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면, 영어가 공용어가 되어 가는 추세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울러, 플레이 보이나 허슬러도 아주 자연스럽게 볼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