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한국의 영어교육

by 사주영웅

예전 런던에서 개막된 도서전에 관한 기사가 기억난다. 특히 한국이 주빈국으로 개최되어 많은 한국작가들이 참여했다고 내용이었다. 기사는 “좋은 문학번역가 양성 절실”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시작했는데, 작가 이문열을 비롯 이번 도서전에 참석한 많은 작가들이 한결같이 번역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작가, 작품들이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번역의 문제가 어느 정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좋은 번역자가” 드물다는 사실이 영미권 시장 진출의 큰 걸림돌이고 “좋은 번역자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들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한국에서 번역의 문제는 민감하다. 특히 외국어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번역은 반역이라느니 하는 상투적이고 편협한 관점을 바탕으로 외국어 문학에 관한한 거의 대부분의 학계는 원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밀턴의 실낙원을 읽고 연구를 하는데에는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와 분석 보다 원문에 대한 해독 능력이 어느정도 인가에 따라서 학문적인 주장에 대한 신뢰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일전에 부산대 김영민 교수는 이것을 원전중심주의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었다. 언어적인 측면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작 언어적인 뉘앙스에 갇혀서 문학으로서의 전체적인 틀은 상대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것이 사실상 현재 외국어 문학전공자들의 상황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라고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경우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정작 작품의 전체 내용에 대한 이해와 토론이 어려워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갓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이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람 샌디나 헨리 필딩의 톰 존스와 같은 책을 원문으로 읽는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 대학원 영문과 커리큘럼에는 실질적인 학생들의 독해능력이 고려되지 않은 목록으로 차고 넘친다.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멜빌의 백경과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와 드라이져의 시스터 캐리를 비롯 예닐곱 권의 작품을 한 학기에 읽는 것은 정말 힘든일이다. 결국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겉으로 원어본을 읽는 척 하지만 안으로 늘 번역본에 목말라 한다. 영어로 읽겠다는 의지는 가상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강의실로 가져가는 것은 영어본인 경우가 많다. 번역본을 외국어 문학 수업에 텍스트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최소한 아직도 많은 외국어문학 수업에서는 그럴 것이다. 물론, 한 학기에 예닐곱의 작품을 다루는 석사과정의 커리큘럼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번역본을 병행해서 텍스트로 사용한다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문학에서 번역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위선적이다. 문학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언어적인 부분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쪽이 맞고 틀리다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둘 중의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경직성이다. 원본과 번역본은 서로 훌륭한 상호보완적인 텍스트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 번역본이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정당해 보인다. 원어에 대한 해독 능력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매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의 해독 능력과 학생의 해독능력이 균등하지 않다는 데에서 정당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가 생겨난다. 교수는 해당 언어에 대한 몇 년정도의 우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그러다 보면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과 이해를 소통하지 못하고 언어적인 해독에 대한 정보만을 얻어가는데 급급해 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많은 문학적인 것들이 강의실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채 사장되기 쉽다. 원문을 20쪽 읽고 와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번역본으로라도 작품 전체를 읽고 온다면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영어를 잘 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많은 경우 정말로 그렇다.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어를 잘 한다는 말 속에는 말도 잘하고, 잘 듣기도 하고, 표현도 잘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로지 책을 읽고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그런 능력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족쇄에 사로잡혀 외국어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는 텍스트의 한계는 분명하다. 석사과정을 마친다 해도 실제 읽을 수 있는 작품의 편수는 많지 않다. 개인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기 이전에, 커리큘럼 상에서 번역본을 텍스트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는 작품을 얼마나 읽을 수 있느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심지어 번역은 학계에서 연구 업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 언어적 능력이 충분한 학자들은 번역을 하느니, 차라리 논문을 쓰는 게 훨씬 더 나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번역을 해 놓고도 자신의 수업시간에는 번역본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이중적인 태도도 보인다. 여기에는 번역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매우 기만적인 악순환이 있다. 번역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은 장당 얼마짜리 아르바이트로 이루어지기 쉽고, 그러다 보니 충분한 언어능력의 소유자가 오랜 시간 공들여 하기보다 불완전한 능력으로 짧은 시간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질 낮은 번역본이 출판되고, 번역본에 대한 평가는 악화된다. 대학원생들이 초벌 번역을 하고 교수가 나중에 정리해서 번역본이라고 출판한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외국어 문학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이젠 한국의 작가들이 한국의 작품을 해외로 알리려면 번역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좋은 번역가를 “양성” 해야 한다고 까지 말을 한다. 도서전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도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중요한 행사이니만큼 소비재로서의 문학의 개념이 필요하겠지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풍토에 대한 고민 없이 잘 “팔수” 있는 수단을 먼저 고민하는 모양새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의 문학은 말 그대로 가장 한국적일 때 세계 시장에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겠지만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독하게 한국적이어서 번역이 된다 하더라도 해외의 독자들은 그 섬세한 의미의 결에 도달하기 어려워질 때, 그때 한국의 문학은 세계에 통하게 될 것이다. 그 정도가 된다면 언어적인 정확성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보다 아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에 충분히 본래의 문학적인 정수가 녹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경이나, 백년동안의 고독이나, 마의 산 혹은 테스와 같은 책들을 읽을 때, 난 분명 그 언어적인 디테일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충분히 그 작품에서 오는 감동과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충분히 좋은 문학은 언어적인 해석에서 오지 않고 직관적인 구성에서 온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분석보다 감성적인 이해로 평가된다.


학계와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에 대한 위와 같은 이질적인 견해가 빠른 시일내에 조화를 이루게 되어 번역활동과 번역 문학이 아주 의미 있는 행위로 인정될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번역을 생산할 수 있기 위해 번역은 많이 소비되어야 한다. 문학을 선망하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아직 삼중당 문고, 사루비아 문고, 범우사 문고판, 서문문고 등의 책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일본어 중역으로 선택된 제목이라 하더라도 나는 아직 폭풍의 언덕이나 춘희와 같은 번역본의 제목에 더 마음이 끌린다. 완벽한 번역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완전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번역이 반역이라면, 사실 그 훨씬 이전에 언어자체에 이미 반역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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