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환상과 영어교육

by 사주영웅

어느 한쪽의 주장에 나의 믿음을 실어야 한다면, 나는 모국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선택하고 싶다. 늘 느끼는 문제이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념으로서의 그런 모국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국어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만큼 자신의 비언어적 감정과 느낌, 생각을 언어적인 것으로 만족스럽게 치환하지 못한다. 제 2외국어를 사용할 때 느끼는 모든 문제점들 예를 들어, 문법, 어휘, 문체와 유창성, 심지어 발음을 비롯한 언어적인 수준의 높고 낮음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모국어는 사실상 제 1외국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언어와 마음, 언어와 의식, 언어와 사고간의 관계는 많은 언어학자들이 고민해온 길고 긴 숙제중의 하나이다. 비언어적인 의식 혹은 문화적 요소가 언어적인 요소에 스며들었는지, 언어적인 구조가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의 문제는 언어의 특성상 개인적인 편차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만큼 쉽게 일반화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는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는 분명 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체계라고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언어활동은 사고를 언어로 치환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작동과정은 능숙함과 신속함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모국어는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국어라는 개념은 그 표현만큼 ‘모국어’적이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 모국어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후천적인 선택에 의해서도 모국어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다양한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학능력이 각광을 받는 시대엔 생물학적인 모국어와 실재 사용하는 언어가 상이한 경우가 많다. 물론, 어릴 때 처음 익혔던 언어에 대한 정서적인 느낌이나 감정은 이후에 습득된 외국어를 통해서는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능성으로써 어머니의 맛을 흉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미 당신은 어린 시절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미 유년기를 벗어난 이후에 유년기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정서, 감정은 쉽게 되가져 올수 없다. 그것은 외국어라는 언어적인 문제라기보다 훨씬 더 생물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국어를 선택하는 문제는 물론,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 별다른 노력 없이 얻어지지만 언어의 경우는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로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태생 이면서 영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어둠의 속”을 썼던 조셉 콘래드는 선원생활을 하다가 20대 후반이 되어서 영어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영문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말은 더듬었다지만 누구보다 더 세련된 문체와 필력을 구사했던 콘래드는 외국어를 모국어보다 더 잘 사용했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은 무너지다” 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나이지리아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영어는 명백히 식민주의자의 언어였지만, 그는 영어로 글을 썼고 현대 대부분의 영문학 커리큘럼에는 그의 소설이 포함된다. 영어는 그도 인정했다시피, 식민주의자들의 언어였지만, 아체베가 느꼈던 사회정치적인 상황, 특히 언어가 서로 다른 부족간의 소통을 위해서 부족들의 모국어는 뒤로 미룰 수 있는 언어라고 아체베는 밝힌 적이 있다.


모국어는 너무 당연한 개념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일체의 의심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국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믿음의 근거가 정말 모국어에 있는 것인지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괴테가 “모국어로 쓰여진 문학이 최고의 문학이다”라고 했다지만, 그건 지금처럼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의 고찰이니 만큼 21세기에 모국어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논거로 쓰기에는 그 세월의 간격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이전에는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들은 점점 풍부해지고 있다. 국적이나, 언어를 선택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종종 우리는 인종을 선택하거나 성을 선택하는 일들도 목격하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흑인의 피부색을 벗겨내려고 일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노력을 했었고, 매트릭스를 제작했던 워쇼스키 형제는 영화가 상영될 때 즈음엔 자매가 되었다. 젊은 부부는 문제가 있는 문제가 있는 난소의 미토콘드리아를 제거하고 다른 여성의 미토콘드리아를 이식해서 실질적으로 엄마가 둘이 되는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이정도 라면, 이제 사실상 운명 빼고 모든 것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적인 사고에서 가장 운명과 직결된 부분으로 여겨지는 얼굴이며 기본적인 체형까지도 현대 의학은 취향에 바꿀 수 있게 해주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은 얼굴을 고치고 팔자도 고치려 한다. 하지만, 모국어는 그러한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것처럼 다루어진다. 물론, 모국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국어에 대한 믿음 혹은 모국어가 가지는 속성에 대한 이해가 상당부분 센티멘탈한 정서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번역을 폄하하는 문제 혹은 소통에 있어서의 권위적인 위계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모국어가 가지는 언어-사고의 관계는 외국어가 가지는 언어-사고의 관계보다 긴밀하게 느껴진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모국어가 당연히 외국어보다 더 쉽고,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주장이라고 본다. 하지만, 덧붙여 말한다면, 모국어는 그렇게 언어 이전의 사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더 우리를 구속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한국사회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한다. 하지만, 한국어에는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그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속성이 존재한다. 짐작하겠지만 언어적인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권위적인 위계질서와 맹목적인 센티멘탈리즘이다.


언젠가 있었던 한국 국적의 비행기 추락사고에 대해 말컴 글래드웰은 그것이 부분적으로 한국어 특유의 언어구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즉, 문제를 감지한 부기장이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존댓말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경험 많은 기장에 의해서 간단하게 묵살 당했고,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부기장이 기장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기장은 상황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제 오늘 신문에 보도된 진주외고에서 일어난 기사를 보면서나는 한국어의 저 불합리한 존댓말의 체계가 어떻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17살 16살 아이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감수해야 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고, 또 그것을 아이는 왜 받아들여야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대부분의 중,고등학교도 같은 현실이겠지만, 고등학교 2학년에게 대놓고 반말을 하는 1학년생은 흔하지 않다. 분명 언어적인 차원에서 생기는 위계가 실질적인 관계에서 권력과 명령 그리고 복종의 관계로 나타났을 것이다. 진주외고의 경우 기숙사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니까 언어적인 문제는 제외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럼, 그 기숙사의 특별한 공간에서 사감의 역할을 하는 고등학교 2학년이 1학년에게 얼차려를 주고 함부로 구타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이라도 만들어 놓았던 것일까? 상식적으로 그런 어리석은 규정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 학생간의 있었던 치명적인 위계관계는 분명 언어적인 위계와 무관하지 않다.


공식적으로 군대 내부의 문제도 비슷하다. 병 상호간 지시를 금지한다는 국방부 차원의 명령은 사실상 이병이 일병에게, 일병이 상병에게, 상병이 병장에게 존댓말을 쓰고, 그 윗계급은 아랫계급에 막말을 하는 현실에선 별 의미가 없다. 존댓말의 쓰임과 관련한 공식적인 법률조항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령, 우리는 길거리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을 때, 경찰에게 존댓말을 써야 할까? 동사무소에 가서 간단한 업무를 볼 때, 우리는 존댓말을 써야 할까? 그런 세세한 경우에 대해서 존댓말의 사용 규정을 정해 놓은 법률이 있을까? 대부분의 경우, 존댓말은 한국인의 의식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게 각인된 존댓말의 위계는 대부분 껍질만 남았다.


존중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보다, 상대방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위계적인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복종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결국, 한국어에 존재하는 위계의 질서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내가 의식하지도 못했던 순간 나의 머릿속에 모국어라는 명목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지금 이순간조차도 어딘가에서는 언어적인 위계에서 오는 권위와 폭압에 의해 결정되는 사항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모국어에 대해서는 막연한 환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좀 더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언어와 의미가 일치한다는 환상이다. 내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사랑’이라는 의미가 완벽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다. 하지만 그런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사실은 완벽할 수 없고, 오히려 그렇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젠 꽤나 상식적인 차원의 인식이 되었다. 이해는 늘 계산한 것만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지만, 오해는 이따금씩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는 것과 실제 의미하는 것의 간극이 많은 경우 소통의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행복한 인연 같은 새로운 의미의 결은 늘 ‘오해’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나의 모국어로 100퍼센트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100퍼센트 이해된다는 말도 나는 별로 반갑지 않다. 끊임없는 소통의 노력이 더 값진 것이라면 100퍼센트는 무의미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늘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고민하고, 계속 새로운 의미로 채워 넣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가치 아닐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의 원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 이었다. 직역한다면 “통역하면서 잃어버리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일본이라는 이방인의 사회에 던져진 영어사용자들이 느끼는 언어적 문화적 소외감을 표면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영화속에 등장하는 두 남녀 주인공들이 사실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가족, 연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제목에 쓰인 “translation” 은 외국어를 모국어로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언젠가 시를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Poetry is what gets lost in translation.” (시는 번역하면서 잃어버리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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