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정신과 한국의 영어교육

by 사주영웅

한국이 서양 의료체계를 받아들인 것은 역사가 길지 않다(길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한의학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초라할만큼 짧다).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1885년 세워졌으니, 서양식 의료체계는 맥시멈으로 해야 130년 남짓 된 셈이다. 하지만 당시 병원 설립을 주도했던 의사들이 모두 선교사들이거나 서양출신 의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교육을 시작해 한국인 의사들이 주체가 되어 병원을 세우는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확대되기 까지 이후 30-40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서양의학이 도래한 것은 얼마 오래 되지 않는다.


한글이 한국인의 말이 된 것도 그와 엇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만들어지기는 세종때 만들어졌다지만, 한글이 학술적, 문화적인 중요 언어로 사용된 것은 불과 반세기정도에 불과하다. 문학이 본격적으로 한글로 쓰여진 것도 해방을 전후로 해서 시작되었다. 굳이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한 문화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명백하게 객관적이다. 그 언어로 쓰여진 과거의 자료들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면 된다. 한국은 한글과 한자 사이에서 애매하게 헤매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쓰여진 중요한 사회적, 문화적, 학술적 기록들은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을 것인데, 그것을 읽을 수 있는 후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도 아니다. 배운다 해도, 그것은 고전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격증이나 시험을 위해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서 학문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채 안된 일이다. 당장 80년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많은 학술서적들은 한자를 병기했었다. 조사 빼고 거의 한자로 이루어진 책들은 지금도 청계천 헌책방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글로 뭔가를 쓴다는 것은 한글로 충분히 연구가 될 때 온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이전에 한자가 있던 자리를 이젠 영어가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한국사회의 정서를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수백년전 영국에서 쓰여진 자료를 참고로 쓴다. 수백년전 독일에서 쓰여진 책을 근거로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를 논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나는 멜랑콜리에 대한 책을 쓰면서 400년전에 영국의 로버트 버튼이 썼던 “우울의 해부”를 상당부분 참고하였다. 400년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영어를 후천적으로 공부한 외국인이 읽을 수 있을 만큼 영어는 400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 400여년동안 쓰여진 수없이 많은 영어자료들은 말 그대로 지금 현재사용하고 있는 영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수백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같은 언어로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한국의 상황은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손자가 읽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세대간의 소통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학술적인 글을 쓰는 경우, 이전에 쓰여진 관련 자료를 참고해야 할텐데, 일단 한글로 쓰여진 자료를 찾기 쉽지 않고, 또 그 주제에 관한 오래전의 글이 있다 해도 한자로 쓰여졌다면 또 한번 번역의 수고를 더 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쉬운대로 영어권의 참고자료를 찾는다. 그나마 영어로 된 자료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편이니, 한글로 쓰는 글의 상당한 논거들은 영어권 자료에서 빌려온 것이 많다. 한국 야구팀에 외국인 용병의 수가 많아지고 축구팀의 감독과 코치가 외국인으로 대체되는 형국과 비슷하다고 할까.


한글로 쓰여진 자료들이 많아서 한글로만 학문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좋겠다. 당연히 올 수 있다. 일본은 좋은 사례다. 기초학문은 물론, 학문의 거의 전분야에 걸쳐서, 일본은 굳이 외국어를 몰라도 일본어만으로도 깊이 있는 학문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 놓았다. 그것은 번역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된 “서양의 모든 지식을 일본어로 번역”하려고 했던 전국가적인 번역사업은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학문적인 영역은 물론 사회, 경제, 문화에서 일본이 이룩한 가시적인 성과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들의 언어로 연구하고 고민하고 또 그것들이 축적되어 후배들이 다시 연구해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굳이 외국어로 된 자료들을 “해석”해야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당연히 그 시간동안 그들은 연구의 주제 자체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었을 것이다. 원서로 쓰여진 책으로 어떤 전공을 공부한 적이 있다면 한번쯤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한국어로 쓰여졌다면 더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영어건 한자건. 물론, 원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특수한 부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한자로 읽어야 이해가 더 잘 되는 한의학의 원리가 있을 것이고, 독일어로 읽어야 더 잘 이해되는 철학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그 일부분은 일종의 사치품 같은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내용의 대부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인 번역을 폄훼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의 많은 강의들은 이국의 언어를 무기삼아 내용의 빈곤함을 감춘다. 해석에 연연하며 학생들의 어학능력을 탓하느라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교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번역에 대한 한국의 이중적인 잣대는 정말로 기만적이다. 외국어를 매개로 하는 많은 학문의 경우, 번역본을 읽는 것은 때로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맹목적인 “원문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무턱대로 번역은 학술적인 레퍼런스의 리스트에서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얼마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어로 번역되어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한국 문학의 쾌거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남의 언어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건 천시하면서, 한국어가 영어로 번역된 것은 뿌듯해 하는 꼴이다. 번역원에서도 서둘러 한국의 다른 작품들을 영어 혹은 주요 외국어로 번역하려는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문제는 번역이 아니라 작품의 진정성에 있는 것인데, 온갖 미디어는 오로지 그 “상” 하나 받는것에 연연한다. 좋은 작품이 쓰여지는건, 좋은 작품이 쓰여지는 토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번역되어 있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고, 힘들게 번역을 해 놓아도, 제각기 잘난 사람들은 번역에 대해 온갖 트집만 잡으려고 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 번역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열악해질 수 밖에 없다. 번역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문화적으로도 빈곤해 질 수 밖에 없다. 당장 교보에 가서 서가를 살펴보자.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번역은 그것이 잘 되었건 잘 되지 않았건, 그 자체로 격려할 만한 것이다.


종종 티비에서 한국의 선진적인 의료기술을 보도하는 뉴스를 본다. 세계최고의 심장이식수술 권위자, 최고의 정형외과 전문의, 최고의 성형수술권위자 등등. 하지만 난 과연 저렇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최고가 된 의사들이 과연 그 최고의 자리에 어울릴만한 의학적인 고민을 해왔을까 의심스럽다. 서양의학은 히포크라테스 이후 거의 2000년 넘는 세월동안 인간의 몸과 또 그에 합당한 몸을 다루는 정신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왔다. 의사들이라면 누구나 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재벌 2세가 나오는 막장 드라마에서도 이따금씩 볼 수 있을 만큼 흔하지만, 과연 한국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과 의학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한국은 서양의학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서양의학이 고민했던 사상적인 혹은 인문학적인 측면은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인문학적 고민은 한의학을 하는 사람에게서 훨씬 더 자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형병원에서 의사는 단지 직장인이고, 환자는 고객일 뿐인 경우는 허다하고, 담당 의사라는 사람은 VVIP 환자가 아니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전에는 정말 순수하게, 생명에 대한 외경이나 환자들에 대한 박애, 의학적 지식을 통한 헌신과 같은 숭고한 목적을 생각하며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갖고 의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공대에 진학하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공대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따로 과외를 한다는 뉴스가 얼마 전에 보도되었다. 공대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정작 공대수업을 따라갈 준비는 안되어 있다는 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럴 수 있는 학습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 수능을 준비하는데 쏟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생명이나 의료행위의 숭고함에 대해서는 고민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의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게 뭔지 고민해보자(고민해야 알 수 있나). 수능 점수일까? 아니면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일까? 수능점수의 높고 낮음이 어떻게 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인문학적인 고민이 수반되지 않은 수능기계들이 의사가 되는 구조가 계속되는 한 한국의 의사들은 의사라기 보다 의료기계 오퍼레이터, 혹은 기업화된 병원의 소모성 직장전문의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대개 의학의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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