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와 명리학
유전자 공학의 발달은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영화 “가타카”에 등장하는 유전공학의 미래가 이젠 공상과학영화속의 환상만이 아닌,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유전공학의 상식적인 지식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자.
“사람의 모든 유전자는 23쌍의 염색체 속에 들어있다. 그중 22쌍의 염색체를 크기에 따라 번호를 붙여 가장 큰 쌍을 1번이라 하고 가장 작은 쌍을 22번으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쌍은 성염색체이다. 여성은 두 개의 X염색체를, 남성은 하나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작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크기는 X염색체가 7번과 8번 염색체 중간 정도이고, Y 염색체는 가장 작다” (게놈)
이러한 생물학적인 발견을 믿을 수 있을까? 과학적 지식에 대한 믿음은 과학이라는 체계에 대한 믿음이 선행해야만 가능하다. 사회의 교육, 종교, 법률, 미디어등 모든 체계들은 간접적으로 이러한 체계에 대한 믿음을 공고하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거위 입에 물리는 깔대기처럼, 일단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시작하면 그 깔대기를 통해 과학과 종교와 예술에 대한 모든 지식은 특별한 검증없이 그대로 흡수된다. 명리에 대한 의심이 가능한 것은 명리라고 하는 지식체계를 통과시킬 깔대기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런 점이 사실 다른 모든 진리의 체계를 역으로 의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깔대기 없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누군가가 당도를 측정하는 기계에만 의존하여 과일의 맛을 추정한다면, 그는 과일의 단맛을 믿기보다 기계의 측정수치를 믿는 것이다. 염색체에 대한 현대 생물학의 주장은 과학기술과 생물학이라는 학문체계에 대한 믿음이 선행할 때 가능하다. 현대과학의 가장 큰 업적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업적이아니라 과학을 과학적인 것으로, 과학에 대한 신화적 믿음을 보편적인 일상속에 침투시켰다는 것이다. 과학은 자신과 동류인 신화적 믿음체계를 거의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역설적이지만 신화적인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과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진리의 체계들은 순식간에 샤머니즘이 되거나 비합리성이라는 비난조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 우리가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를 신봉하고, 또 그러한 형식으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과학 역시도 그 반대편에 자신의 반테제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말해지는 과학과 창조론의 이분법적 대비는 사실상 과학의 구색맞추기식 놀이에 불과하다. 창조설은 과학이 만들어낸 손쉬운 논쟁상대일뿐,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는 진리체계만큼 정교하지 않다. 자연에 근거한 신화체계야 말로 절절한 반테제라고 할 수 있다. 신화 역시 인간과 세상을 설명하는 진리의 체계이다. 과학이 인간 자체에 대한 진리라면 신화는 삶에 대한 진리의 체계라고 할 수 있고 명리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가장 멋진 상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 특히 20세기에 이뤄진 현대과학의 역사는 길지 않다. 수천년간 인간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했던 신화적 체계가 그토록 짧은 시간만에 고작 수백년에 지나지 않은 과학의 체계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과학은 그 자신이 압도적인 지식의 체계가 되기 위해 규모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게놈에 대한 설명을 잠깐 인용해보겠다.
“게놈이라는 책은 10억개의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책정도 크기의 책 5000권이나 성경 800권 정도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만약 내가 이런 책을 1초에 한 단어씩 매일 8시간씩 읽는다면 이것을 모두 읽는데 한 세기가 걸린다. 만약 내가 이책의 모든 문자를 1센티미터에 한자씩 적어 넣는다면, 다뉴브 강(길이 2860킬로)만큼이나 긴 길이가 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책이 바늘끝보다 작은 크기의 세포 안에서 현미경으로나 관찰할 수 있는 핵이라는 작은 구조물 속에 모두 들어있다”(게놈).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바늘끝보다도 작은 구조물속에 저토록 방대한 정보가 들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과학이 발견하고 증명했다는 것도 놀랍다. 하지만 저 정보와 이것을 일종의 과학적 지식으로 전달해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과학적 진실이 개인의 삶에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정보가 인간의 삶에 개인적 차원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의료의 권력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과연 좋은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병원에서 바늘끝보다 작은 부분에 뭔가 나에게 안좋은 요소가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한다고 권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과학은 인간에 대한 많은 지식을 발견했지만, 그것이 삶에 대한 지식은 아니다. 인터넷 시대의 다른 많은 정보가 그런 것처럼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인 지식의 범람은 분명 반가워 하기만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정보가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되지만 넘쳐나는 정보역시 그에 못지 않게 해롭다. 정보가 없어서 선택을 못하는 것보다 복잡할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 때문에 선택을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선택의 역설로 잘 알려져 있다. 과일 잼을 사기 위해 세 개의 잼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과 12종류의 잼 앞에서 결정하는 사람들중, 결국 잼을 사는 사람은 더 적은 선택지 앞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많은 선택, 막대한 양의 정보는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과잉정보의 상황을 후천성 정보면역결핍증이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어떤 정보다 유용한지, 어떤 정보가 사실인지 점점 그 분간능력을 잃어버리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높은 수준의 과학은 명리학과 달리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 체계를 이해하는 인식론적인 절차는 물론이고 도구의 도움 없이는 과학은 존립할 수 없다. 과학은 그것을 얻기 위해 교육의 체계에 복종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전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리의 체계는 자연이다. 거기에는 개인이 따라야 하는 공식과 체계가 상대적으로 훨씬 적다. 자연에 대한 관찰로, 자연의 원칙을 유추하여 명을 이해하는 것일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매우 억압적인 학문이다. 그것이 진리의 문제를 100퍼센트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유일하고 가장 객관적인 진리의 체계인 것처럼 주장한다. 심지어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조차도 진리체계로서의 과학의 위상을 깍아내리지 못할 정도로 현대과학은 전지전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과학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종속되려고 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과학이 과연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가? 최첨단 컴퓨터는 그것을 소유할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을때 의미가 있다. 의료기술의 눈부신 발전 역시 안타깝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다. 현대의 의술이 만약 그 가면의 웃음만큼 인간적일 수 있으려면 역설적으로 새로운 의술의 개발보다 인간적인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더 많은 투자와 비용을 지출하는게 옳다. 하지만 아직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높은 치료비와 보험의 사각지대에서 100 년전에 개발된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와 국가들은 과학적 성취와 신의료기술의 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의료적 진보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억만장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고위공직자의 성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에 골몰하는 현대의료기술은 역설적으로 그 혜택을 받기 힘든 대다수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과연 이러한 시스템이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시스템이 아무런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는 반드시 의료기술과 과학에 대한 신화적인 맹신이 자리잡고 있다. 교육은 앞장서서 의료신화를 제조하는 공장이 되어버렸다. 현대의 교육제도는 거대한 신화의 본원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학은 명리가 인간의 운명을 불완전하게 밖에 추론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이 밝혀냈다고 주장하는 세상에 대한 물리적 지식은 우주의 규모에 비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일천한 지식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과학은 그 자신 신화가 되기 위해 제도를 시녀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명리는 오히려 이러한 신화화를 거부한다 명리를 믿는 것은 가장 폭넓은 차원에서 자연의 순환을 믿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자연의 거대한 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한다고, 그런면에서 자연은 항구하지 않다고. 하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해 볼때 개인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100 여년 간의 자연은 영원과 같다고 할만큼 동일한 순환속에 있다. 그 단순한 진리를 믿게 하기 위해 또 다른 제도의 힘을 빌려올 이유가 없다. 자연은 숨쉬고 느끼고 바라보면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믿는데 거짓의 신화와 기만의 심리학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명리는 진보적이다. 또한 명리의 거울을 통해 제반 이데올로기적 체제에 의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복적이고 좌파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진보라는 길을 보여주면서 사실상 개인의 발목에 과학의 신화라는 사슬을 채우고 있다면 그 과학은 과연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명리는 진보라는 당의정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과 세상을 비춰준다. 그에 맞서서 어떤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명리는 해답이라기보다 해답으로 가기 위해 내가 견지해야하는 의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디스커버리 채널 히스토리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과 같은 세상에 대한 아주 명백하고 단순한 진실을 보여준다고 통상 믿어지는 미디어에서 아홉개의 조작되지 않은 내용 사이에 슬쩍 조작된 한 개의 내용을 집어넣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매순간 그런 조작과 기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수는 없다. 결국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자면 어느 정도의 의심과 비판에 대한 충동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독자가 문학을 읽을 때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의심의 보류와 같다. 다시 말해 세상 대부분의 진리체계들은 사실 문학과 같은 상상과 공상을 근거로한 진리체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개인들에게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지 않게 통제하고 기만하고 조작하려 한다는데 있다. 마술과 마법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심이 더 많다. 어린 아이들을 제외하고 마법과 마술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술이나 마법은 인간과 삶과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명리는 이런 단편적인 마술이 아니다. 명리는 세상의 공고한 신념체계와 종교체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명리에 대한 사람들의 의심과 비판이 사실은 이 사회의 각종 제도 종교 교육 철학 윤리등의 제반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명리는 좌파적이다 태생부터 현 질서에 대한 의심과 전복의 가능성을 유포하면서 진격하는 것이다. 명리의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은 명리가 현재 대우받고 있는 사회적 위상과도 관계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