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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리드하라-21세기의 명리학

by 현현

21세기의 명리학


과학과 첨단 기술로 무장한 21세기에 갑자기 왠 고리타분한 명리학 타령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복고의 귀환이라고 말하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응답하라 씨리즈부터 현대문화는 어느 순간 과거를 지향하고 있다. 먼 미래의 우주를 그리는 스타워즈도 있지만, 분명 고대세계의 신화를 그리는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 같은 수 천 년 전의 세계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도 점점 더 트랜드의 중심이 되어간다. 현대에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들은 어느 한 순간 번성했던 과거가 있었고, 시대와 사상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그 중요성이 퇴색된 것들이다. 한때 주류였으나, 점차 주변으로 밀려 마침내 흔적만 남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프로이트가 “억압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고 할까. 하지만 동시에 프로이트는 그렇게 “억압된 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개체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어린 시절의 억압된 몽상이나 욕구불만이 성인이 되어 나타나는것과도 비슷하지만 계통적으로 살펴볼 때, 그것은 어떤 한 문화와 세계관 속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적절한 환경이 되었을 때 다시 꽃피게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의 꿈이 성인이 되어 미래의 비젼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뱀파이어가 HBO의 화끈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티비쇼로 재창출 되기도 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었지만, 인간이 창조한 또 다른 인간적인 인격체의 탄생은 이제 AI라는 찬란한 과학기술로 되살아 난다.


과거의 것이 새삼 현재속에서 되살아 나는 것은 스토리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스티븐 풀(Stephen Poole)은 <리씽크>에서 어떻게 과거의 것이 첨단의 얼굴로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전기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전기자동차는 휘발유 자동차보다 더 이전의 대표적인 자동차 모델이었다. 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정유회사들은 자신들의 휘발유를 팔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 모델을 선호했었고,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은 19세기 등장했던 전기자동차를 단명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오랜시간 지속되는 배터리를 해결하지 못했던 기술적인 한계는 물론, 당시 정유회사들의 정치적인 책략이 결합되어, 사실은 100년도 더 전에 모습을 등장했던 전기차는 별다른 역사적인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론 머스크가 테슬라라는 전기자동차 회사를 만들고, 럭셔리한 디자인의 전기자동차를 세상에 선보였을 때, 사실 그건 과거로의 회귀 같은 것이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테슬라의 전기자동차는 머스크가 새롭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과거 속에 묻혀있던 원초적 아이디어에 21세기 기술을 접목시킨 것이다. 과거의 것이 현재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은 전기차 기술만은 아니다. 명리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는 정신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비평 혹은 사회비평, 철학 분야에서 생태주의는 마치 현대에 들어서 새로 만들어진 이론처럼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생태주의의 주장은 아주 간단하다. 자연과 자연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연과 자연의 균형의 문제는 명리학은 물론, 수 천 년간 동양사상의 핵심적 중추를 담당했던 주역이 담고 있는 가장 근본원칙이기도 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중, 그것은 곧 중용의 가치가 되기도 했고 명리학에서 중화 혹은 절충의 이론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생태주의와 같은 새것처럼 보이는 이론을 너무 경박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생태주의의 바탕은 이미 명리학이라는 체계 속에서 수 천 년동안 이어져 왔고, 이제 자연에 대해서 새삼 눈뜨게 된 현대인들은 다시한번 명리학의 생태주의적 유산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명리학은 수 천 년 전에 성립된 학문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때를 만난것이라고 해야 한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군대의 침략은 막을 수 있지만, 제때를 만난 사상은 막을 수 없다”고. 이제 명리학은 분명 21세기 현대인의 삶을 조명하는 가장 가치있는 인문학이 될 것이다.


과학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에 대한 독선적인 믿음은 사실 근거가 빈약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오해한다. 셀드레이크는 이러한 문제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몇 안되는 양심적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과학의 망상>에는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이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유물론 철학, 혹은 ‘과학적 세계관’이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과학적 세계관이란 과학의 발전에 의해 끊임없이 대체되어온, 언제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신념체계다. 이번 장에서 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과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신화, 그리고 이 요소들이 어떻게 과학자가 사람이라는 명백한 사실과 충돌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과학은 인간의 활동이다. 과학이 유일하게 객관적이라는 추론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객관성이라는 환상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기만하게 만든다. 이것은 진리를 찾는다는 과학의 고귀한 이상에 반하는 일이다. . . 객관성이란 환상은 거리감에 따라 힘이 세진다. 생물학자, 심리학자, 사회과학자들은 물리학을 너무도 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자신들의 혼란스런 영역보다 훨씬 더 객관적이고 엄밀한 것으로 바라본다. . . 더 멀리 갈수록, 환상은 더 강해진다. 과학자들의 객관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구원의 희망을 찾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에 빠진 사람들이다”(과학의 망상).


명리학은 계절에 관한 학문이며, 시간에 대한 철학이고, 그 결과, “때”라고 하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통해 개인의 운명을 추론할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타이밍이 있다. 때와 타이밍에 대한 속담이나 표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 “때” 와 “타이밍” 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동서양은 물론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단순히 타이밍이라는 흔한 말로이야기 되기도 하지만, 적절한 시기,혹은 때, 혹은 기회라는 말은 개인의 인생을 묘사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명리학에서 누군가의 운이 발복하는 것은 적절한 때를 만났을 때 가능하다. 한 사람의 팔자를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한다면, 때는 그 토대에서 어떤 결과가 산출되는 시기를 말한다. 명리학에서 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팔자라는 일종의 씨앗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결실을 맺는 것은 오로지 때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한 운명에 대한 상념이 아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생기론자였던 베르그송은 이와 관련한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가능성은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그곳에 항상 존재해왔을지도 모른다. 이 가능성은 결국 뭔가의 개입으로 인해, 피가 수혈되거나 생명이 주입됨으로써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과학의 망상 147, 재인용). 베르그송의 이러한 생각은, 명리학에서 개인의 운명을 추론하는 관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때가 발하는 시점은, 팔자의 원국에 있는 기운과 그것의 물질적 발현이 함께 공명하는 것을 말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음양의 이원론적인 체계는 기와 질, 물과 상, 이와 기 등의 또 다른 이분법적인 체계로 확장된다. 이때, 명리에서 어떠 현상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는 바로 물과상의 결합, 기와 질의 결합이 나타나는 시기라는 것이다.


별의 궤도가 한번 결정되면 변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의 생활과 습관과 생각도 저마다의 궤도가 있을 것이다. 궤도를 벗어나는 것은 별의 수명이 다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사람이 자기 삶의 궤도를 바꾸는 것은 분명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궤도는 어찌보면 사람이 그 궤도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누군가는 동쪽으로 가고 누군가는 서쪽으로 간다. 타원으로 가거나 원형으로 혹은 다소 불규칙한 모양으로 자신의 궤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궤도를 결정하는것과, 그 궤도를 바꾸는 일이 자유로운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일단 만들어진 궤도는 더 이상 그 사람 마음대로 쉽게 변경되지 않는다. 결정된 궤도는 운명처럼 그의 서지를 붙들어 맨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의 삶이 만들어놓는 이 거대한 궤도속에서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치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지만, 결국 그 선로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궤도 속에서 궤도의 힘을 느끼지 못할때 인간은 자유롭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자유의 한계는 그가 궤도를 벗어나려하거나 궤도의 힘에 저항할 때 비로소 느껴진다. 그때 그는 분명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힘에 구속되어 왔었다는 사실을. 명리는 궤도에서 탈출하거나 혹은 그 궤도 자체를 바꾸는 것을 종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명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자신과 궤도와의 관계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도울 있을 뿐이다.


일상적인 용법의 차원에서, 논리와 이치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가 맺는 일은 이치에 맞는 일이지만 그것을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논리는 인간의 지적 노력이 개입된 매우 인위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치는 자연의 논리를 인간이 이해했을 때 묘사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변화한다. 때문에 자연의 이치가 항상불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자연의 변화는 인간에게 가공할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8월의 눈보라가 몰아치거나 빙산이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는 현상을 목도할 때, 인류는 심각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자연의 이치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예외적인 변화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수 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변화 패턴의 관점에서 그러한 변화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논리로는 이치를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보이오티아 출신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상고 시대의 현명한 농사꾼이 어떻게 계절에 따라서 자기 일을 계획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농사꾼은 무엇보다도 천체의 움직임에 의지했고, 주변의 식물과 동물을 지침으로 삼았다. 플레이아데스(황소자리의 일곱 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달팽이가 더위를 피해서 식물 위로 올라갈 때면 농사꾼은 포도밭 갈이를 끝내야 했다. 그 별자리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는 수확철이다. 그 별자리가 사라지면 쟁기질하고 1년의 농사일을 끝내야 했다. 오리온자리가 나타나면 도리깨질하고 곡물을 창고에 저장해야 하며, 포도를 따야 한다. 게자리가 태양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할 때는 포도따기에 가장 좋은 시점인데, 이 시기는 매미 울음소리와 지중해 국화가 피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하늘은 또한 선원에게도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항해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하지와 동지 이후 50일 가량이었다. 10월 말경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대양 밑으로 가라앉으면 배를 해안에 묶어 놓아야 한다. . . 헤시오도스의 시는 농부가 계절의 변화를 잘 관찰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헤시오도스의 시에서 계절은 경제적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 활동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아, 계절을 파악하기 위해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필수적인 활동이었을 것이다”(그레이엄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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