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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Jun 23. 2024

Science와 Literature는 동의어?

과학이라는 단어는 분석이라는 단어와 궁합이 좋다. 


과학적 분석이라는 표현은 과학적 직관이나,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표현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분석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과학은 기본적으로 나누고 자르는것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누고 자르는 것을 통해 수가 생겨나고, 측량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통상 ‘과학’이라고 인식하는 학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정치과학이라던가, 사회과학, 심리과학, 심지어 연애과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든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체계를 갖고 있으면 가져다 붙일수 있는 꼬리표처럼 사용된다. 심지어 침대도 과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연과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전형적인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학문일반 전체에 대한 범용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이러한 ‘과학’이라는 단어의 특징은 영어단어 science의 용례에 그대로 나타난다. 


과학을 의미하는 영어단어science는 원래 알다, 배우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자르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skei와 관계된 말이기도 하다. 어원적으로 알다는 뜻과 자른다는 의미로 분석되지만, 아는 것과 나누는 것이 어떻게 관계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뭔가를 배울 때, 한번에 전체를 알수는 없는 일이다. 영어를 배워도 알파벳을 나눠서 배우고, 수를 배워도 1부터 10까지 나눠서 공부해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직관이나 깨달음과는 다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배우지 않고서 할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 장착되어 있다. 


숨쉬기, 몸을 움직이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불학이능不學而能. 


배우지 않고도 능하게 할 수 있는것들은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양에서 과학이 본격적으로 발달되면서 자연과학이나 물리학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scienc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그 이전 science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science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서 학문 일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양심은 영어로 conscience라고 하고, 의식은 consciousness라고 한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번쯤 이 두 단어의 스펠링이 헷갈리다고 느낀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두 단어의 어원적 구성은 서로 비슷하다. 


양심을 의미하는 conscience라는 말은 함께 라는 뜻의 con-과 알다라는 뜻의 science의 결합이다. 이때, 아는 것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을 알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올바른 것을 알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양심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심이라 어의에 대체적으로 부합한다. 

의식이 있다는 것도 역시 con-과 어원적으로는 science의 결합이다. 형태는 -scious로 나타났지만 의미는 science에서와 같이 알고있는, 알수 있는 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국어로 번역된 개념으로 살펴볼 때, 양심과 의식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말 같이 보이지만 영어의 어원으로보면 거의 동일한 단어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한국어의 용례도 살펴보면 양심이라는 말은 의식이라는 말과 치환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쓰레기를 무단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양심”이라는 자리에 “의식”이라는 단어를 써도 사실 큰 의미상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conscience 와 conscious의 비슷한 어원적 특징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느라 번역했던 사람의 노고가 느껴진다. 


과학이라는 단어 science의 어원인 skei-는 자르고 나눈다는 뜻을 갖고 있는 어원으로 정신분열증을 의미하는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에도 들어있다. 스키조프레니아는 말 그대로 정신이 조각조각 분열되는 심각한 정신질환이다. 보통 짝을 지어 등장하는 정신질환에는 paranoia가 있다. 역시 심각한 정신관련질환인데, 편집증, 망상으로 이해된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전지전능하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이때, 전지全知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omniscient 라고 한다. omni-는 전부, 모두를 의미하고 science와 동일한 어원에서 파생된 scient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전능하다는 표현은 비슷하다. omnipotent라고 한다. potent는 유력한, 세력이 있다는 뜻이다. poti-에 해당하는 부분의 핵심적인 의미는 바로 힘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힘과 권력을 의미하는 단어 power에도 포함되어 있다. 

나이스nice라는 말은 한국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 짧은 단어가 뭘 분석할게 있을까 싶다. 하지만 나이스는 부정어 ne(not)과 알다는 뜻의 scire-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어원의 구성으로 본다면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바보같다는 뜻이다. 지금 현재 알고 있는 뜻과는 정 반대인것처럼 보인다. 맞다. 12세기 정도의 옛날 나이스nice라는 단어는 어리석다는 뜻의 silly 등과 같은 단어의 유의어로 사용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섬세하다거나, 훌륭하고, 정확하다는 뜻의 의미로 변화되었다. 


현재 과학이라는 말로 사용되지만 science는 또 다른 영어단어 art와 대조되어 일반적인 학學 이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특히 19세기 science 와 art가 일본에서 번역되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술學術이 곧 science와 art의 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일본의 니시 아마네는 영어를 번역하면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개념어를 만들어냈다. 그에 따르면 science는 순수한 의미에서 알고자 하는 앎이고, art, 곧 술術(기술技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서 아는 것으로 파악된다.


니시 아마네의 번역과정을 연구한 야마모토 다카미쓰에 따르면 이러한 학과 술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생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술의 단초가,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식의 단초가 있다” 이것은 다시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과 “자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구분은 결국 science와 art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기술이라는 뜻의 artis는 그리스어로는 테크네techne에 해당하고, 지식을 의미하는 scientiae의 그리스어는 에피스테메episteme에 해당한다. 에피스테메는 인식론이라는 영어단어 epistemology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따라서 그리스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술과 지식은 테크네와 에피스테메로 나눠진다. 


Science는 온전히 인간의 앎과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때 literature와 동의어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문학이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단어 Literature는 과거에 문자와 글을 읽을 수 있는 포괄적인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지식전반, 학문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국어로도 식자층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학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것과 일맥 상통한다. 


최근의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리터러시가 반드시 문학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해력, 글쓰기, 배움, 지식, 학술적능력등과 같이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지적능력을 의미할 때도 리터러시literacy라는 말은 자주 사용된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과 과학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SF문학쟝르도 있는데, 어떻게 문학과 과학이 서로 대립될 수 있겠는가? 과학은 이성을, 문학은 감성을 주된 소재로 한다는 편견때문일텐데, 과학자에게도 문학적 감성은 필요하고 문학가들도 자신의 문장을 엄격하고 치밀하게 다듬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문과와 이과라는 학제적 구분이 이런 불필요한 편견과 갈등을 더욱 더 고착시키고 있다. 문학없는 과학없고, 과학없는 문학없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1963년 자신의 마지막 저서를 출판한다. 제목은 『문학과 과학』Literature and Science이었고 책의 주된 내용은 문학과 과학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면서 영국의 시인 매튜 아놀드의 먼 조카이기도 했던 헉슬리는 이미 과학과 문학의 조화를 시도할 운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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