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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Aug 09. 2024

낭만에 대한 로망은 모든 로맨스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


낭만이라는 말은 묘한 매력이 있는 말이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대체적으로 감성과 분위기, 자연과 느낌, 순간적인 영감과 분출하는 감정들이다. 어느정도 낭만주의라는 문예사조에 대한 배경지식이 작용한 흔적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낭만은 낭만주의와 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 유럽에서 시작되어 19세기 전반에 절정을 이룬 예술적, 문학적, 지적흐름이다. 계몽주의의 중심이었던 산업 혁명과 자연의 과학적 합리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낭만주의는 감정, 개인주의, 자연과 과거의 미화를 강조하며 근대성의 기계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영향과 대조를 이루며 이성중심적인 것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문예사조라고 할 수 있다. 


비오는날 포장마차에서 기울이는 소주 한잔에서도 찾을 수 있는 낭만인데, 낭만주의는 꽤나 복잡한 지적 여정을 갖고 있는 역사적이고 지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낭만주의는 뭔가 엄청 거창한 것 같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그렇다 치고, 비슷한 듯 다르게 쓰이는 단어가 또 있다. 

바로 로망이다. 

언제부터인가 로망은 꿈이나 희망, 바램, 설레임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멋진 경춘국도를 달리는 로망을 꿈꾸는 것에서부터, 구식 타자기로 정말 글자를 집어던지듯이(打字)글을 써 보는 로망, 유럽을 자전거로 일주하는 로망 등 로망은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희망사항과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럼, 낭만과 로망은 다른 말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낭만과 로망,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지만, 용법이 달라진 말이다.


한국어의 낭만이라는 말은 영어의 Romanticism을 낭만주의로 번역한데서 연유한다. 영어를 소리나는 대로 읽어보면 로만티시즘인데, 일본에서 이 단어의 앞부분인 Roman을 번역하면서 소리나는 그대로 浪漫(물결 랑, 가득할 만)이라고 번역한다. 한자의 뜻은 상관없이 소리만 맞춰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浪漫主義의 일본어 발음ロマン主義에서 ロマン(roman)은 영어의 발음과 거의 비슷한 로망이다. 하지만 똑같은 한자가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발음이 달라졌다. 한국어 한자로는 浪漫을 ‘낭만’이라고 읽는 것이다. 덕분에 로만티시즘romanticism은 낭만주의가 되었다.


일본어 한자는 소리를 중심으로 채택한 것으로 한자의 의미는 본래 romanticism과 별 관계가 없다. 그런데, 그 한자를 그대로 선택해서 한국식으로 낭만이라고 읽으니, 한국의 낭만은 romanticism과 소리로도, 뜻으로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말 뜬금없는 단어가 된 셈이다. 이제와서 낭만을 버리고 로망으로 가기엔 각각의 단어가 지나온 길과 역사가 너무가 길고 많다. 


낭만도 아니고, 로망도 아닌 로맨스romance도 있다. 흔히 남녀간의 사랑을 말할 때 로맨스라고 종종 말한다. 로맨틱하다는 형용사는 대부분 남녀간의 열정적인 사랑이 그 화염에 휩싸이기 직전의 바로 그 상태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 로맨스에는 분명 우리가 낭만적이라고 부르는 어느정도의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사랑과 열정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원래 로맨스는 중세유럽의 로망스romance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꽤 역사가 깊은 말이다. 원래 romantic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온 ‘로망스’방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로방스어 등이 속한다. 이러한 로망스어로 쓰여진 기사이야기를 중세엔 로망스Romance라고 불렀다. 대부분 시의 형식이었고, 또한 뭔가를 찾으러 떠나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사이야기엔 대부분 사랑이야기가 빠질수 없다. 


이후 낭만적romantic, 낭만주의romanticism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9세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의미상의 변화를 겪게되면서 매우 중요한 철학적, 역사적, 예술적 개념으로 진화한다. 샴페인과 어울릴 것 같은 낭만에 이런 복잡한 지적 실타레가 얽혀 있다니! 


이러한 낭만주의적 맥락에서 로맨스는 보통 상상력과, 감각, 감성의 숭배, 있을 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차 있는 말이다. 그래서 로맨스romance라는 말은 종종 소설fiction을 의미하는 말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모두 이 로맨스의 정신이 지배하는 시기를 겪는 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A. N. 화이트헤드(Whitehead)는 바로 이 유년의 시기를 로맨스의 시기라고 말한 바 있다.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관찰하고 해석한다. 아직 세상의 법칙이 주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상력은 제한이 없다. 그 상상력은 종종 감각적 데이터를 왜곡하고 과장하는데, 이 때문에 성인이 되었을 때 대부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쪼그라들 수 밖에 없다. 


한참을 걸어가야 끝이 나오던 골목길이 이렇게 짧았나? 

그 높던 은행나무가 겨우 이정도 높이라니? 

커다란 대문이었는데,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다니? 


남녀간의 로맨스도 충분히 즐겁게 음미할 만 하지만, 유년시절의 로맨스에는 뭔가 속절없이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늘 자신만의 로맨스romance를 아무도 모르게 쓰고 있는 것 같다. 그 로맨스가 언젠가 리얼리티가 되리라는 로망을 품고서 말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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