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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인종차별과 관계가 있나?

by 현현

광장공포증이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agoraphobia라고 한다. 공포증이라는 말은 대부분 -phobia로 끝나는데, phobia 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의 두 아들 중 하나인 phobos에서 생겨난 말이다. 전쟁과 공포는 아버지와 아들만큼 서로 관계가 깊다. 그래서, 고소공포증을 acrophobia 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든 두려워하는 대상을 앞에 두고 뒤에 phobia만 붙이면 ~ 공포증이라는 말이 만들어진다. 조만간 스마트폰포비아Smartphone phobia라는 말도 생길것이다.


광장공포증이라는 말 앞에 있는 아고라agora는 원래 광장이라는 뜻인데,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게시판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처럼,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였을 것인데, 게시판의 성격과 기능으로 보면 꽤 이름을 잘 지은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광장이었다. 이곳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며, 철학자들이 강론을 펼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단어 그대로 "모이는 장소”라는 뜻의 아고라는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고, 집회와 시장을 겸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 아고라agora라는 단어는 흥미롭게도 다른 영어 단어들의 뿌리가 되기도 하는데, 의미는 전혀 별개인것처럼 보인다. 혹시 생각해 볼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카테고리와 알레고리다. 카테고리와 알레고리는 한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이런 단어들이 광장을 의미하는 agora와 관계가 있을지 의아해진다. 광장이라는 의미가 이렇게 각기 다른 언어의 가지로 뻗어나갔을까?


먼저 agora(아고라) 자체는 오늘날 영어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광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리스어 ἀγορά에서 온 이 단어는 본디 “민중의 집회” 또는 집회가 열리는 시장을 의미한다. 어원은 "모으다”라는 뜻의 더 오래된 뿌리에서 왔는데, 이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라는 개념과도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아고라에서는 정치 토론부터 상거래까지 온갖 일이 이루어졌고, 이 두 가지 분화된 의미에서 그리스어 동사 agorázō (장을 보다)와 agoreúō (공적으로 말하다) 같은 말도 파생되었다고 한다. agoraphobia(광장 공포증) 역시 아고라에서 나온 말로, 문자 그대로는 “광장에 대한 두려움”이다.


category(카테고리), 즉 “범주”라는 말은 겉보기엔 아고라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원을 따라가 보면 고대 그리스의 재판정이나 광장의 한복판과 관계가 있다. 고대 그리스어 κατηγορία (katēgoría) 는 본래 “고발” 또는 “비난”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의 동사형 κατηγορεῖν(katēgorein)은 kata- (아래로, 반대하여)와 agora (집회, 광장)가 합쳐진 것으로, “광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다”, 특히 “공개적으로 고소하다”는 의미였다. 법정이나 민중 집회에서 사람들 앞에 대고 누군가의 죄를 소리 높여 호명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된다. ‘카테고리’의 뿌리는 바로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세우는 행위에 있다. 지금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call someone names 누군가를 모욕하고 비난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발이 어쩌다 범주가 되었을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대를 지목하여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점차 일반적인 “이름붙이다, 지칭하다”의 뜻으로 완화되었다. 그리고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이 단어를 새로운 용도로 활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을 몇 가지 큰 갈래로 분류한다고 보았고, 이 갈래들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의 카테고리아를 채택했다. 원래는 “죄명을 부름, 단죄”를 뜻하던 말이 철학자의 손을 거치며 “분류의 범주”를 뜻하게 된 것이다. 이후 라틴어 categoria와 불어 catégorie를 거쳐 카테고리는 현대 영어에서 “범주, 분류군”이라는 뜻으로 정착했다. 한 고대 광장의 소란스런 고발 소리가, 지금은 학술 용어로서 질서 정연한 분류의 언어 속에 숨겨진 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레고리라는 말이 친숙할 것이다. 특히 문학에서, 알레고리는 흔히 우화나 비유담처럼 겉으로는 하나의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 다른 뜻을 품은 은유적 이야기를 말한다. 알레고리 역시 agora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이것은 아고라에서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어 ἀλληγορία(allēgoria)는 állos (다른)와 agoreúein (공개적으로 말하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다른 것을 말한다”는 의미다. 즉, 하고픈 말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둘러서 하는 것, 그것이 알레고리의 본래 뜻이었다. 다른것을 의미하는 앞부분의 al- 은 바꾸다는 뜻의 alter, 혹은 가명을 의미하는 alias 와 같은 단어에서 볼 수있다.


어린시절, 어른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틈에 있다보면, 어른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속삭임으로 바뀔때가 있었다. 마치 뭔가를 잘못 말해서 누군가가 그 말을 들으면 자신이 잡혀가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대목에서 어른들은 목소리의 데시벨을 한없이 낮추고, 머리를 가까이 대고서 말을 하다가, 그 대목이 지나면 다시 허리를 펴는 것이 반복되었다. 물론, 그 내용이 어떤것이었을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뭔가를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울때는 그렇게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나 보다.


고대에도 민중이 모인 장소에서 직접 말하기 어려운 진실이나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야 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가령, 권력을 풍자하거나 도덕을 교훈하기 위해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다르게 말하기”는 점차 문학과 예술의 기법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알레고리는 표면과 내면에 두 겹의 뜻을 지닌 이야기 기법을 가리키게 되었다.


알레고리라는 수사적 기법은 추상적 개념이나 관념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구체적인 이미지나 상징을 이용한다. 동물농장에서는 그런 상징으로 "돼지"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돼지들이 두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그 "돼지"가 뭘 의미하는지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살펴보면, “모이다”라는 낱말 뿌리는 인도유럽 여러 언어에 퍼져 있어서, 라틴어 grex(무리)에서 온 gregarious(떼지어 사는, 사교적인) 같은 단어와도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segregation에도 모임과 무리를 의미하는 gre-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어는 분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se-와 무리와 집단을 의미하는 grex, gregis가 결합된 말이다. 그래서 segregation은 무리에서 분리시키는것, 다시 말해 사회적 분리와 차별을 의미한다. 흑인과 백인을 따로 앉히고, 여성과 남성의 공간을 구분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는 언어와 법은 모두 분리를 의미하는 segregation과 관계가 있다.

category가 개념을 분류했다면, segregation은 사람을 분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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