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묻고 명리학으로 대답한다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면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그럼 저랑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은 인생이 같은건가요?” 라는 질문이다. 사주는 확률적으로 518400개의 조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분명 자신과 같은 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럴 경우, 같은 사주를 갖고 있어서, 같은 운명을 살게 될 것인가?
사람들이 많은 것만큼 살아가는 양상도 다를텐데, 사주만을 가지고 운명을 풀이하는 것이니, 그런 질문은 매우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주를 감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금 사주를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진 운명의 행로가,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동일한 사주의 주인공이 갖고 있는 운명과 같다고는 선뜻 말하기 어렵다. 심지어, 동일한 사주의 주인공이 다른 시간에 감명을 받는다 해도 그 감정의 결과가 100퍼센트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이런 문제의식은 비단 현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과거 명리학의 고전을 저술한 임철초 역시도 동일한 사주가 어째서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가에 대한 사유를 남긴 바 있다. 그의 적천수 천미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같은 年 月 일 시에 태어난 사람 백명이 있다면 모두가 한가지로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마땅히 그 시의 선후를 보아야 하고, 또 산천의 다름과 세덕의 다름을 궁구하면 열명중에 아홉명은 적중한다. 그중에 맞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은 이쪽은 벼슬이 있으나, 저쪽은 자식이 많고, 이쪽은 재물이 많은데, 저쪽은 처가 아름답고 하는 정도의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적천수 천미 230)
사주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추론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 인간의 삶과 운명은 사주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더더욱 그렇다. 현대에는 인간의 삶과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만한 외적 요인들이
극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 사주불여심상 이라고, 사주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조금 냉소적으로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현대는 사주보다 부모가 인생에 더 큰 영향을 준다. 물론,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 역시 사주로 결정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말이다.
만일 명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면 분명 동일한 사주에 대해서는 동일한 감명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옛날 조선의 왕들은 자신과 사주가 동일한 사람의 운명을 알고자 그런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 확인한 기록도 있다. 그런 기록에서조차 왕과 동일한 사주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중엔 거지나 빌어먹는 사람이 종종 등장한다. 그럼, 어떻게 지금 현재 사주를 보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의 운명과 다른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양자역학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최첨단에 있는 정교한 양자역학은 이미 물리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양자도약이나, 보는 것이 전자의 운동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은 거시물리체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것으로까지 생각된다.
양자역학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전자의 운동은 사람이 관찰하고 있을때의 패턴과 그렇지 않을때의 패턴이 다르다. 사람이 관찰하고 있을 때 전자는 입자처럼 움직이지만, 관찰하지 않을 때, 전자는 마치 파동처럼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자가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는 의식적인 주체인 것처럼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운명을 생각해보면, 사주를 감명하는 행위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이 관찰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일종의 주체와 같다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이 추명되고 있을 때, 그러한 운명의 패턴으로 나타나지만, 추명되지 않을 때, 운명은 운명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관찰을 의식하는 전자와 같이, 운명또한 추명의 행위를 의식하고 있다고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주를 추명하는 사람입장에서, 이러한 양자역학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학에서 밝혀놓은 많은 이론들은 명리학의 과학적 체계와 중첩될 수 있는 인식론적 프레임을 갖고 있다. 특히, 물리학에서 인정하고 있는 4개의 힘의 종류는 고스란히 명리학의 오행사상과 연결될 수 있다. 오행은 5이지만 여기서 실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은 4가지이며, 나머지 하나는 힘들이 작용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의 체라고 할 때,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힘의 종류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을 대중적으로 쉽게 가르쳐주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설명하면서 일상적인 환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운동을 그 방정식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이처럼 천변만화하는 삶의 운동과 사건을 하나의 고정된 방정식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은 다양하지만, 그것의 근본원리는 단순하다는 것이다. 삼원색을 생각해보자. 중학교 미술시간에 삼원색을 처음 배울 때, 미술선생님의 말은 믿기 힘든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단 3가지 색의 배합만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리 복잡하고 다양해도, 결국 근본체계에 있어서는 단순한 것, 그것은 우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없이 다양하고 각기 다른 운명의 행로는 사주팔자로 모두 설명되는 것이다. 단지 간단한 수식이고, 여덟글자에 불과한데, 그것으로 어떻게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명리학과 물리학이 공통적으로 알려주는 한 가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무리 달라 보이는 많은 현상들이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모두 동일한 요소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