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리드하라

종교가 되어가는 과학

by 사주영웅

DNA에 관한 현대 과학의 지식은 그야말로 종교적이라고 해야 한다. 인간의 DNA “정보”속에 한 인간개체의 거의 모든 생물학적인 정보가 다 들어있어서, 그 사람이 어떤 병을 앓게 될지, 얼마나 오래 살지, 어떤 성격의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니, DNA는 그야말로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던 지옥의 명부이고, 데스노트이며, 개인의 미래가 적힌 운명록 같은 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DNA를 믿는가? 과학자라면, 더구나 생물학관련의 전공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DNA를 믿을 것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미시적인 차원과 거시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성경을 계속 집필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없는 믿음은 없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틀어 성경이라는 물리적 믿음의 실체가 그토록 중요했던 사실은 종교가 성립되기 위해 반드시 성경의 역할을 하는 어떤 텍스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DNA나, 알프스 산맥 아래에 묻혀있다는 입자가속기 그리고 허블망원경 같은 기술집약적인 장치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과학이라는 현대세계의 경전을 끊임없이 새로 고쳐쓰고 있다.


의약계에서는 해마다 새로운 신기원을 기록하는 화학물질을 발견하면서 불치병의 목록을 줄여가고 있지만 그게 정작 가난한 병자의 병원비를 줄이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열광하고 과학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최첨단 과학이 나의 삶과 관련을 맺는 경우는 매우 특수한 경우에 제한될 뿐이다. 내가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과학이 인류 문명을 비롯하여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자연의 위협과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 어느덧 종교적, 그것도 맹신적인 추종을 강요하는 교조적인 신화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문제 삼고자 할 뿐이다. 루퍼트 셀드레이크는 자신이 뛰어난 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있는 철학을 공표함으로써 평생 쌓아올린 학문적인 업적은 물론 사회적인 명성도 위험에 빠뜨리게 되었다. 주변의 동료들, 과학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한 내용은 사실 일반적인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합리적인 미신류와 같은 것이었다. 셀드레이크의 주장은 소박하다. “과학자들이 자유로운 탐구를 제한하고 상상력을 금기시하는 독단에서 벗어날 때, 과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흥미로워질 것”(과학의 망상 10)이라는 것이다.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귀담아 들을 만 하다.


“현대 과학은 모든 현실이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물질적 현실을 제외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도 뇌의 물리적 활동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물질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화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신은 단지 사람들의 정신, 그러니까 머릿속에 깃든 한낱 생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믿음들이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은 의심할 바 없는 실재다.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기법들 또한 그러하며, 이 기법들에 근거한 공학 역시 그렇다. 하지만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를 지배하는 신념체계는 19세기에 구축된 이념에 근거한, 신앙과도 같은 행위일 뿐이다.”(과학의 망상 13).


셀드레이크가 가지고 있는 과학에 반하는 과학적인 관점은 다소 신비적이며 종교적인 암시까지도 보여준다. 스티븐 풀은 사실 앞선 세대에 이루어졌던 진보적인 사상들이 어떻게 현대에 다시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살피며 셀드레이크의 이론을 예로 들고 있다. “셀드레이크가 제시한 ‘형태 공명’ 개념에 따르면 결정과 단백질의 형성은 식물과 동물의 형성처럼 시간을 가로질러 연결되는 비물질적 ‘형태장’을 토대로 습관에 따라 좌우되며...이러한 공명을 논의하던 중 자연계의 기억이라는 개념이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주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스티븐 풀, 225). 그리하여 인류는 문화와 언어 지역을 넘어서 수 천 년 혹은 수 백 년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225). 이러한 정신적인 획득 형질이 다음세대에 전달된다는 사실은 2013년 체리 냄새를 두려워하도록 조건화된 생쥐의 새끼가 역시 태어날 때 부터 체리 냄새를 두려워하는 성격을 갖게 된 실험으로 증명된바 있다(스티븐 풀 232).


과학은 일견 정신적인 것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학의 외연이 과학의 본질을 상당부분 규정하는데서 기인하는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심리학이나 성격, 마음의 태도를 분석하는 정신분석 역시도 과학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과학은 사실상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양쪽 모두를 다루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 19세기 전까지 과학과 종교는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대 물리학의 초석을 마련한 뉴튼 역시도 자신이 밝혀낸 모든 과학적, 물리적 체계는 궁극적으로 신의 섭리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김용옥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19세기가 날조한 가장 큰 기만적인 환상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과학은 이러한 관념적인, 정신적인, 유심론적인 바탕의 모든 이론체계에 대해서 미신과 불합리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물리이론이나, 스티븐 호킹의 우주이론이 얼만큼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수학은 논리보다 창의성에 바탕을 둘 때 발전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궁극의 이론은 수식의 정합성이나 논리의 체계에 의해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론의 발전엔 대개 논리의 비약이 있었고, 그 비약의 과정은 대부분 직관이나 상상력에 의한 비논리적인 정신활동의 결과였다.


20세기 전 세계 수학계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던 인도의 수학자 라마누잔은 자신의 공식을 매우 직관적으로 만들어 냈다. 그는 “신이 자신의 혀에 공식을 올려놓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직관에 종교적인 상상력 혹은 직관의 영향이 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공식이 분명 훌륭한 것이기는 해도, 그것을 서구의 과학자들에게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볼 때, 자신의 공식은 너무나도 자명한 것이었지만, 논리와 합리의 체계에 종속된 서구의 수학자들에게 그의 공식은 증명되기 전까지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라마누잔은 하디 교수와의 노력으로 자신의 공식이 허무맹랑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 철저하고 논리적인 체계의 구조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게 된다. 똑같은 공식이었지만 라마누잔의 공식은 처음 그것을 소개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이 증명되었을 때, 비로소 수학적으로 인정되었다. 라마누잔의 에피소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견 상상력과 직관이 어떻게 논리와 합리성과 결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인 능력이 허용하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의 범주는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인 정의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면,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이성적인 것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실제 20세기 전후 인류가 성취한 과학기술의 경이는 수 천 년 동안 인간이 상상했던 것들의 이성적인 발현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을 이루고 또 그것을 증명하면서 인류문명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의 과학자들이 상상이나 직관, 혹은 정신적인 추상의 활동에 대해서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단순히 과학의 입장에서 정신적인 것을 부정하는 태도라기보다, 이미 교조적인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과학이 자신과 비슷한 영향을 잉태하려는 상대를 압도하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경쟁심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상상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영재육아, 과학교육, 수학경시대회와 같은 과학과 논리와 체계의 정합성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모든 활동들은 아이들의 무한한 정신적인 능력에 일종의 사슬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굳이 과학을 독려하지 않아도, 수학을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상상력은 이미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널리 알려진 과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그는 20대에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를 만났다. 당시 보어를 만나 밤새도록 벽난로가에서 나눈 이야기들에 대한 꼼꼼한 기억은 그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이젠베르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 두 물리학의 천재들은 덴마크의 매서운 겨울밤을 지새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의 주된 주제는 물리학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과 신화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와 최고의 젊은 물리학도가 밤새도록 문학과 신화를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단지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개인적인 취향의 범주를 넘어 그들이 지향했던 과학의 지향점, 혹은 과학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영감을 준다. 그들이 이야기했던 문학과 신화와 인간의 문제는 결국 그들의 숙명이었던 과학과 절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정점에 섰던 그들은 상식적인 차원의 과학 너머, 인류가 이미 오래전부터 친숙하게 여겨왔던 신화의 영역을 보았던 것일까?


과학자답지 않게 통상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에 흥미를 가졌던 닐스 보어에 관해서는 한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양자물리학자였던 닐스보어는 자신이 지내는 시골집 앞문에 말편자를 걸어두었다. 서양에서 말 편자를 문 위에 걸어 두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입춘대길 이라는 글자를 대문에 써 붙이는 것처럼 흔한 미신적 행위이다. 말 편자가 행운을 불러다 준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인 보어가 그런 미신적인 행위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란 한 손님이 편자를 보고 “설마 그런 미신을 믿는 건 아니죠?” 라고 말하자, 닐스 보어는 이렇게 대답한다. “믿지 않아도 효과가 있더라구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자신들의 구원자로 등장한 네오를 의심하는 트리니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믿을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닐스 보어는 자신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던 날, 수상식장에서 사용하게 될 가운에 동양의 음약팔괘도의 문양을 집어 넣어달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다. 당시 음양 팔괘도를 구할 수 없었던 스웨덴 한림원은 어쩔 수 없이 한림원 근처 중국집 요리사에게 음양팔괘도의 문양을 그려달라고 요청하여 임시로 가운을 제작해 제공했다는 여담도 전해진다. 또한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앙 11세가 보어에게 왕실과 국가의 수장에게만 수여되던 코끼리 훈장을 하사할 때, 보어는 태극의 문양이 그려진 자신만의 문장을 스스로 디자인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태극 의미를 선택하여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새겨넣었다(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213).


동양사상에 대한 보어의 관심은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과학과 음양론.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컴퓨터의 기원이 된 라이프니쯔의 이진법적 체계가 사실은 중국의 음양사상에서 유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은 동양사상의 원칙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또 그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특히 정반합의 변증법을 주창했던 헤겔의 사상 역시 중국 선교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가 전파한 음양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매우 신빙성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계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과학현상을 분석하는데 자신의 신체적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경우, 광학기기와 계량도구 그리고 각종 인간의 경험적 한계를 한참이나 초월하는 각종 첨단기계로 과학을 분석한다. 현재 우리가 상식적으로 과학이라 믿고 있는 상당부분은 이러한 기계적인 장치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증거와 통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객관성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몸의 철학” 어디에선가 이런 말을 한적 있다. 과학자들은 관찰의 결과를 아주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그 현상을 관찰하는 자신의 감각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현대 과학은 대부분 보이고, 만져지고, 들리는 감각적 경험을 곧장 과학적 진리의 증거로 채용한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제기한 아주 오래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도출되기까지의 단계적인 회의론을 살펴보면, 퐁티의 문제의식은 사실상 데카르트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데카르트는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감각에 혼란을 야기하고, 감각적 경험을 교란하고 기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퐁티가 제시한 “감각적 경험”에 대한 의심은 데카르트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다시 되풀이 한 것이며, 여기에는 감각적 경험으로 유추하는 객관성의 문제가 사실 겉으로 여겨지는 것만큼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자신의 회의론을 진행시킨 데카르트는 결국, 인간이 담보할 수 있는 객관성의 진실은 결국, 인간의 정신적 세계, 사유의 힘, 인간 내면의 본유적인 관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과학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고, 데카르트의 유심론은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사회적 신뢰를 확보한 과학과 기술의 팽창앞에 다소 전근대적인 철학으로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상대성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이, 20세기 첨단 과학이 제시하는 이론들은 대부분 이전까지 인간의 정신적 체계를 통해 획득된 통일된 전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했고, 그 결과 인간의 정신을 통해 확립된 주체와 정체성은 사실상 절대적일 수 없으며, 외적, 물리적 조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의식을 퍼뜨리게 된다. 절대적으로 주체적인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매우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성의 부정, 주체상실의 문제는 20세기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세계관으로 군림한다. 모더니즘 문학은 잃어버린 절대성에 대한 길고 지루한 상실의 애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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