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리드하라

과학적인 맹신과 주술적 합리성

by 사주영웅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믿음의 양극으로 질주하고 있다. 사람들의 믿음은 절대적인 맹신이거나 혹은 절대적인 불신, 오로지 그 두 편으로만 갈라지고 있다.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는 절대의 양분법처럼, 현대의 믿음은 이것을 믿거나 저것을 믿지 않는 오로지 두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을 가르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 그것은 과학이다. 시대와 사고방식에 대한 무비판적, 무차별적 믿음의 산포라는 측면에서 지금 이 시대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가하던 중세의 종교 훨씬 그 이상으로 특별히 과학에 대한 “종교”적인 맹신이 견고하다. 톰 크루즈를 비롯 헐리우드 유명배우들이 소속된 미국의 신흥종교단체인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교의 이름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신앙단체로서 ‘사이언톨로지’라는 이름은 즉각적으로 과학과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문명의 시초부터 함께 했지만 적절한 종교적 신성성을 부여받지 못했던 과학은 이제 비로소 종교의 이름을 가지려고 하는 것 같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 과학분야의 전문가들은 거의 예언자급의 파급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과 사고방식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 과학과 의학과 천문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경험적인 세계를 한참이나 초월하는 극도로 미세한 단위에서 거의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확대된 우주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수많은 복잡한 관념들은 차라리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 그리고 그 의미의 실체는 상당부분 일상적인 삶과 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난 아직도 양자역학이나 쿼크입자의 발견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우주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것과 서울 시내 아파트 값이 해마다 거듭 올라가는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빛의 속도로 100만년을 달려가야 만날 수 있는 별의 존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해주는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 얼핏 들으면 어지간한 판타지 소설의 황당함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내가 무식하고 과문해서겠지만, 우주의 생성을 밝히는데 왜 “끈”이 필요한지 모르겠고, 서울 도시 한복판의 싱크홀도 공포스러운데, 우주엔 뭐 그리 홀이 많은지 모르겠다. 웜홀, 블랙홀, 화이트홀에 대한 이야기가 한때 매력적으로 들린적이 있었지만, 결국 그건 우주에 구멍이 났고, 또 한쪽 구멍이 다른 쪽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었다.


만약 옆집 아저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헛소리가 되겠지만 물리학이나 천문학 분야의 탑클래스 학자가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는다. 말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그건 추정이고, 유추이고, 추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과학이 전해주는 온갖 황당한 이야기들과 판타지 같은 이론들을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과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맹신 때문이다. 하다못해 뻔히 지어낸 이야기인줄 알면서 보는 공상과학영화를 보면서도 “말도 안된다”며 비아냥거리는게 평범한 사람들인데, 그들에겐 인간의 경험을 한참 더 초월하는 과학의 세계가 어떻게 그렇게 당연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릴 수 있을까?


간단하다.


과학은 교육의 외피를 둘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다른 많은 지식분야들처럼 과학이라는 특정한 교육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고 배운다고 생각한다. 교육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속에서 선택하는 많은 종류의 지식들 중 과학은 그 한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과학은 교육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과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형태로든지의 교육을 받는다면 그것은 과학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적 교육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사고와 세계관을 장착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과학과 교육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심지어 과학이라는 과목 자체를 싫어하고 배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오로지 문학이나 철학이나 윤리와 같은 과목들만 공부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는 과학을 배우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과학적인 가치판단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아니 사실은 모르는 상태에서 훨씬 더 많이 빈번하게 사람들은 과학을 받아들인다. 과학은 21세기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사람들은 과학 앞에서 작아진다. 마치 조물주인 것처럼 과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다. 교육은 과학적 독선의 첨병이다. 교육과 사회가 맺고 있는 관계가 평범한 인간의 삶을 아주 치명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에서, 교육은 인간의 의식주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주된 콘텐츠를 이루는 것은 수학과, 과학과, 지식과, 그리고 그런 것들로 대표되는 합목적성, 논리성, 체계성과 같은 명백한 인과관계의 규칙들이다. 따라서 교육은 비합리적인 것,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 과학적이지 않은 것들과 대립되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해왔다. 교육은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으로 계층을 나누었으며, 지식과 지식이 아닌 것,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아주 손쉽게 구분할 수 있는 체계의 지식을 나누어 주었다. 과학은 믿음의 기준이 되었고,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믿음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과학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성실한 신자가 되어 가고 있다.


개인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과학적인 진리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타난다. 불교,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심지어 무속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까지도 과학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종교적 권위의 숭고함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진지해졌다. 그들이 숭배하는 모든 종교는 과학이라는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초라한 성전에 불과해졌다. 과학은 믿음에 부응할 만큼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다. 기적은 가장 완벽한 종교성의 징표 아닌가? 그 어떤 종교도 과학만큼 놀랄만한 기적을 충분히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기차부터 자동차 비행기에 전화 스마트폰 컴퓨터는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 군사장비와 우주의 심연을 눈앞에서 재현해준 허블망원경 가깝게는 주방의 전자레인지부터 보이지 않는 미시의 영역에서 구가하는 의학기술, DNA를 둘러싼 그 거대한 서사와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미 충분히 “기적”이 되고도 남는다. 이미 “기적”의 바다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어떤 “기적”이 경이롭게 느껴질 수 있겠는가? 이제 과학만큼 기적을 제공하지 못하는 다른 믿음 체계들은 거짓과 사기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과학적”으로 라는 말은 중세의 마녀재판이 21세기형으로 재현된 완곡한 표현이다. 거의 모든 형태의 믿음과 의심과 추측과 인과관계는 “과학적”이지 않으면 거짓이고, 가짜이고, 불합리한 것이 되었다. 과학의 당의정이 입혀진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믿음은 무차별적으로 자발적이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견고하다.


교육은 이러한 과학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범인류적인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 결국 현대교육시스템은 거대한 과학의 교리교육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는 거대한 종교의 단일한 교구속에서 살아가는 절대적으로 순종적이고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 교육을 위해 지출하는 모든 비용은 사실상 과학이라는 종교가 걷어가는 헌금에 불과하다. 아무리 비판적인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전화를 사용하고, 안경을 쓰고, 컴퓨터를 이용한다. 비행기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고 네비게이션을 사용하는 것은 종교적일만큼 견고한 믿음의 체계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자신이 타고 가는 지하철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탈 수 있을까? 자신이 의지하는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믿지 않으면서 목적지에 순순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


세탁기를 처음 사용하던 할머니들의 반응을 생각해보자. 손으로 하는 것만큼 세탁기는 믿을만한 세탁수단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세탁기가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실제 손으로 빠는 것만큼 세탁기로도 깨끗하게 빨래가 되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편리는 믿음을 잠식한다. 젊은 세대들은 세탁기가 손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리할뿐만 아니라 더 깨끗하다는 메시지를 광고와 과학을 통해 배우고 그것을 믿음으로 장착한다. 세탁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구세대는 모두 가고, 세탁기기 열어준 새로운 세계를 환영하는 젊은 세대는 세탁기의 기능과 효과에 대한 광고 메세지를 진리처럼 여기며 세탁기를 신봉한다. 세탁기는 식기세척기를 통해 신자들의 폭을 넓히고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더니 이젠 다이슨 진공청소기도 그 대열에 포함시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는 프리미엄 청소기에 대한 믿음의 견고한 초석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들이마시고 있다는 미세먼지의 노예가 된 것처럼 온통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괴로워한다. 사태가 이러하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해결해주는 진공청소기는 그 얼마나 경이로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청정하게 해주는 것.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적으로 신체적으로 느끼기도 전에 공기질 측정기의 오염농도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쓰거나, 외출을 자제하거나 아니면 대기업에서 만든 값비싼 공기청정기를 집에 들여 놓는다. 이 모든 물건들의 기능과 효과와 그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의 배경은 모두 과학에 기초하고 있다. 측정단위가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도 어려운 그리스문자 같은 표식들이 어느 순간 우리들의 일상속으로 침투하더니, 급기야 우리들의 평범한 생활마저 좌지우지 할 만큼의 강력한 영향을 갖게 되었다.


사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짬뽕 맛있는 집” 이라는 문구에 끌려 한끼를 허탕칠때가 많은가? 블록버스터 영화가 개봉될때마다, 우리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보게 될거라는 기대를 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상상력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온 세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가짜이고 거짓인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리에게만 유독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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