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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hyun Park Oct 29. 2018

아카가와 온천

계획 없이 여행을 한다는 것

때는 2018년 7월, 친구들과 구마모토(熊本)의 구로카와 온천(黒川温泉)을 가기로 하였던 날이었습니다. 준비할 때는 좋았는데, 막상 출발할 때가 되니 천재지변이 걱정되더군요. 역시나 걱정은 현실이 되었고, 동아시아를 내습한 태풍 때문에 이륙을 못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약간 지연되긴 했지만,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하였고, 도착도 잘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창 밖에 비가 미친 듯이 오는 것만 빼면요.

나중에 숙소에 들어가서 안 사실이었지만, 서일본은 유례없이 강한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구마모토 역시 비가 매우 세차게 왔지만, 그나마 후쿠오카-사가-나가사키 일대에 비하면 적게 온 편이었더군요. 그래도 비구름대의 바로 남쪽 아래여서, 그리고 구마모토 공항에서 숙소가 있던 구쥬 고원으로 가는 길이 지도와는 달리 매우 험해서, 가는 내내 비와 안개,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아소 산 칼데라를 넘어야 하는 길인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안개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비구름이었던 것을 뚫고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험난하게 운전했던 게 무색하게 그다음 날부터는 비가 잦아들었습니다. 비 때문에 늦는 바람에 예약을 취소할 뻔했다는 주인아저씨에게 참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아소 산을 보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전에 온천이나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숙소의 바로 근처에 온천이 하나 있더군요. 그 이름도 되게 예뻤습니다: 아카가와 온천(赤川温泉). 어차피 목욕도 해야겠다 싶어서, 아침 샤워도 스킵하고 코 앞에 있는 그 온천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멀더라고요. 막상 차로 달리니 몇 분은 걸렸습니다. 걸어갔더라면 최소 10분은 걸렸을 오르막길입니다.


온천을 운영하는 곳은 아카가와소(赤川荘)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빨간색 건물의, 아기돼지 삼형제에 나올 법한 삼각형 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담한 빨간 집이 녹음 속의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니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뭐든지 침울해 보일만했는데도 말이죠.

꼭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집 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쩐다, 영업 중이라고 쓰여있었지만 문이 잠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허탕 치고 돌아가야 하나 했는데, 안에서 어떤 할머니가 나오시더군요. 온천장을 운영하시는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시더니, 태풍과 폭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손님이 안 올 줄 알고 문도 안 열고, 준비도 안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왕 온 거 목욕만 하고 갈 수는 없겠냐 하니,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원래 700엔인 목욕료도 반으로 깎아주고, 타월도 무료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명이니 원래대로라면 2100엔을 지불했었어야 할 것을, 1000엔만 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시설은 많이 낡았습니다. 아무래도 할머니 혼자 운영하시다 보니, 유지보수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샤워 부스는 몇 대 있지도 않았는데 한 대 빼고는 다 고장 나 있었고, 탈의실도 낡은 티가 팍팍 났습니다. 온천수 인증서도 색이 누렇게 바래서, 세월의 흐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벽면 역시 이 온천의 세월을 증명하듯 유황이 딱딱하게 침전되어 하나의 층을 길게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부는 굉장히 청결했었습니다. 청소 상태는 매우 양호했고, 무엇보다 그 날의 첫 손님이다 보니 무언가 개운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매력적이었던 건 폭포를 바라보며 온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폭우 때문에 불어난 수량으로 폭포는 매우 힘차게 쏟아지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도 없는 이 온천에서 정말 기분 좋게, 폭포를 바라보며 온천물에 몸을 적실 수 있었습니다.

폭우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폭우 덕분에 폭포가 더 웅장해보입니다.

아카가와장의 온천은 26도의 유황온천입니다. 분류상 냉광천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폭포를 바라보며 노천탕에 있기는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폭우 때문에 여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외기 온도가 낮아서, 노천탕에 오래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탕의 온탕에서 주로 목욕을 했습니다. 주인 할머니 말씀으로는 원천의 온도가 워낙 낮아서 내탕은 가온을 하지만, 가케나가시(掛け流し, 원천을 한 번만 쓰고 흘려보내는 것) 방식의 좋은 온천이라며 매우 자부하셨습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온천수의 수질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유노하나(湯の花, 온천수의 성분이 응고되어 떠다니는 모습이 온천수의 꽃 같다는 것에서 유래) 때문에 물의 색은 우유 탄 듯 뽀얗지만, 목욕하면서 불쾌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유황 성분으로 물이 우유 탄 듯 뽀얗습니다.


아카가와 온천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유일한 정보는 구글 맵과 숙소 근처의 도로 표지판, 이 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비록 낡았지만 이렇게나 근사한 온천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건, 저로서는 행운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전에 잘 계획한 곳만 가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양함을 놓치게 하는 여행 방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행에 계획이 없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은 분명히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단지 우리가 계획한 대로만 여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만 공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씩이라도 아무런 계획 없이 어딘가를 불쑥 가보는 것,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색다른 매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덧 1. 이 온천에서 목욕한 후에, 피부에 났었던 뾰루지와 여드름이 사라졌습니다.

덧 2. 저희가 목욕을 막 마무리했을 즈음에, 우리 일행 말고도 세 팀이 더 왔었습니다. 그중 두 팀이 한국인이었는데, 이것도 꽤나 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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